박종팔· 유제두와 맞짱 뜬 ‘헤라클레스 강흥원’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두차례나 일본을 경악시킨 강펀치 소유자 박종팔마저 제압...’역대급 펀치력’ 이름 날려

헤라클레스 강흥원의 현역시절 모습.
헤라클레스 강흥원의 현역시절 모습.

유제두 맞대결 펼친 강흥원

지지난 주말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경동시장에서 <흥원인삼>이란 상호를 내걸고 수삼직판장을 운영하는 전 WBC 크루저급 2위에 랭크된 강흥원 선배에게 모처럼 전화 연락이 왔다. 44년 전 한차례 맞대결한 전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유제두 챔프가 가게를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고 옛 추억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나눴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필자는 그곳을 방문해 강흥원 선배를 만났다.

두 복서는 복싱 열기가 뜨겁던 1978년 12월 17일 한차례 맞대결을 펼쳤다. 당시 동양 미들급 챔피언 유제두가 주호 선수와 대결한 후 5개월 만에 벌이는 경기로, 그의 동양 타이틀 21차 방어전이었다. 이 대결은 노련한 유제두의 원숙미(圓熟美)와 강흥원의 불꽃파이팅이 맞붙은 것이었다. 마치 백마고지 전투처럼 1회부터 12회까지 시종일관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결과는 강흥원이 유제두의 두터운 벽을 넘지 못한채 2 대 1 판정패한 경기였다. 21차 방어에 성공한 유제두는 경기후 11년 현역생활에 마침표를 찍으며 55전 50승(29KO승) 3패 2무의 기록을 남긴 채 은퇴했다.

유제두와 동양타이틀전을 펼치고 있는 강흥원(오른쪽)
유제두와 동양타이틀전을 펼치고 있는 강흥원(오른쪽)

늦깍이 복서, 전설의 라이벌전을 펼치다

유제두의 은퇴경기에 인상 깊은 파이팅을 펼쳐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강흥원. 그는 1949년 12월 28일 전남 영광 출신으로 15세에 상경, 청량리에 정착한다. 그리고 1970년 21살의 늦은 나이에 중산체육관에 입관해 채용석 관장의 지도를 받으며 한뼘씩 한뼘씩 성장했다. 그는 그해 4월 제23회 전국 신인대회에 라이트미들급으로 출전, 3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비록 한윤철에게 패했지만 소중한 은메달을 획득하며 자신감을 갖게 된다. 중산체육관은 1964년 대한체육회장을 맡은 소강 민관식 선생이 주도적 역할을 맡아 1965년에 세운 체육관이었다. 백인철, 한창덕, 정영근, 이석운, 고생근, 유장호 등 당시 기라성 같은 복서들이 이 체육관을 거쳐갔다.

1972년 11월 19일 23살의 늦은 나이에 청량리의 경흥체육관으로 이적한 강흥원은 박남용과 프로 데뷔전에서 무쇠 주먹을 적중시켜 1회 KO로 서전을 장식한다. 윤창수 관장이 사령탑으로 근무하는 경흥체육관은 황철순, 김종원, 김인창, 장흥민, 장한곤, 이필구, 최만성, 김종표, 최영철, 강인길 등 역대급 복서들을 배출한 사설 명문 체육관이었다.

강흥원은 1980년 1월 유병래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통산 25전 13승 2무 10패(8KO승)의 전적을 올렸는데, 이중 박남용과 불꽃 튀는 7연전(4승3패 강흥원 우세) 은 허버트강과 김현의 7연전(3승 3무 1패 허버트강 우세)과 함께 한국복싱 라이벌전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명승부였다.

박남용과 국내 타이틀전을 펼치고 있는 강흥원(왼쪽)
박남용과 국내 타이틀전을 펼치고 있는 강흥원(왼쪽)

강흥원보다 3살 젊은 박남용은 아마추어 시절인 1969년 제50회 전국체전 라이트미들급 금메달을 비롯해 그해 아시아 청소년대회 선발전 우승, 1970년엔 아시아선수권대회(마닐라) 은메달 등 아마 전적 87전 79승(47KO승) 8패를 기록한 후 프로 전향해 18전 11승 7패(4KO승)을 기록한 중견 복서였다, 강흥원은 두차례에 걸쳐 한국 미들급 챔피언을 지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숙적 박남용과 대결에서 거둔 결과물이었다.

일본 경악... 그리고 얻은 닉네임

강흥원은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원정 경기를 펼쳤는데 그 경기들도 전설로 남아있다. 1973년 12월 10일 첫 원정경기에서 만난 선수는 시바다 겐지 였다. 그는 강펀치인 임재근과 무승부를 기록했고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 에디 가소(니카라과)와의 타이틀전에서 판정패한 42전 30승(17KO) 4무 8패를 기록한 강자였다. 강흥원은 시비다 겐지와의 맞대결에서 1회에 전매특허인 특유의 강력한 좌우 훅을 터뜨렸고 상대는 거품을 물며 곧바로 실신, 일본 복싱 전문가들을 경악케 했다.

1978년 2월 8일 치러진 두 번째 원정경기에서는 가나 국가대표 출신의 일본 용병 피터 남보꾸와 대결을 펼쳤다. 강흥원은 이 경기에서도 맹폭을 퍼부어 4회 KO승을 거뒀는데 KO패한 남보꾸 역시 시바다 겐지와 마찬가지로 실신, 들것에 실려 병원에 이송될 정도였다. 피터 남보꾸는 1976년 6월 유제두와 부산에서 맞대결해 판정패 했지만 1973년 11월 17일 유제두의 13차 동양 타이틀 도전에서 챔피언을 괴롭혔던 미야코시 유지에 판정으로 승리할 정도로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강흥원의 강펀치를 맞고 혼절, 결국 엠블런스에 실려 나갔다.

20살의 박종팔 마저 제물로 삼고

강흥원은 펀치 파워만큼은 역대급(歷代級) 복서였다. 결국 남보꾸는 그 경기를 끝으로 링을 떠나게 된다. 이때 경기를 직접 참관했던 국내 복싱기자들이 강흥원에게 ‘헤라클레스’라는 닉네임을 선물하게 된다.

강흥원은 1978년 6월 전년도 미들급 신인왕전에서 우승한 20살의 떠오르는 별 박종팔과도 맞붙는다. 당시 20전 13승(7KO ) 6패 1무를 기록중이던 29살의 강흥원이 한국 타이틀을 놓고 신구(新舊) 맞대결을 펼친 것이다. 공이 울리자 박종팔은 9살이나 나이가 많은 챔피언 강흥원을 향해 맹공을 펼친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박종팔의 주먹을 깊숙한 커버링으로 침착하게 막아내며 기회를 엿보던 강흥원은 1회 종료 직전 빈틈이 생기자 라이트훅 한방을 박종팔의 템플(관자놀이)에 정확히 명중시켰다. 이 펀치에 박종팔은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1회 KO패를 당한다. 펀치력만큼은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재확인시켜주는 경기였다.

헤라클레스 강흥원(왼쪽)과 동양의 호랑이 박종팔.
헤라클레스 강흥원(왼쪽)과 동양의 호랑이 박종팔.

이후 박종팔은 KO패의 충격을 딛고 19연속 KO 퍼레이드를 펼치며 국내 동양, IBF, WBA 타이틀을 차례로 접수하며 ‘동양의 호랑이’로 거듭났다. 훗날 박종팔은 강흥원의 펀치력에 대해 필자에게 “나경민은 물론, 백인철의 펀치력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펀치였다”고 회고했다. 강흥원은 앞서 1975년에는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인 주호와도 맞대결을 펼쳐 선전 끝에 무승부로 방어에 성공하는 등 테크닉도 탄탄한 복서였다. 이처럼 국가대표 출신에 아시아 선수선수권을 재패한 박남용, 주호 등 정상급 복서들과 대결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은 전투력을 보여준 강흥원은 펀치에서나 기량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세계 타이틀전 도전 문앞에서 좌절

1979년 5월 29일 강흥원은 신설 WBC 크루저급 타이틀 4강전을 치르기 위해 3번째 일본 원정에 나선다. 크루저급은 체중 79.38㎏ 이하의 라이트 헤비급과 90.72㎏이하의 헤비급 사이에 신설된 체급으로, 당시 동급 2위인 강흥원의 상대는 4위인 스즈끼 도시아끼(일본)였다. 여기서 승자와 동급 1위 카멜(미국)과 3위 시워크(미국)간의 승자가 그해 9월에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흥원은 이 경기에서 80㎏으로 출전했는데, 86㎏으로 링에 오른 스즈키에 피지컬(physical)면에서부터 압도당하며 4회 KO패를 당했다. 이어 1980년 유병래와의 한국 미들급 타이틀전에서는 2회에 경기를 포기하면서 9년에 걸친 프로복서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라이트웰터급 금메달 리스트이자 1979년 골든컵과 월드컵대회에서 금·은메달을 합작한 김인창은 선배인 강흥원에 대해 “극심한 생활고(生活苦)를 극복하기 위해 경기 당일까지 연탄배달을 하며 경기를 치렀던 복서”라며 “당시 강흥원 선배가 정상적인 훈련에 임했다면 유제두 선수는 몰라도 임재근, 주호 선수보다는 복싱 클라스가 한 단계위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가 곁에서 지켜본 바로도 강흥원은 유달리 후배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복서였다.

라이트플라이급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 장흥민과 '헤라클래스' 강흥원(오른쪽)
라이트플라이급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 장흥민과 ‘헤라클래스’ 강흥원(오른쪽)

70, 80년대 거물들과 나란이

그는 결혼도 경흥체육관 후배의 소개로 하게됐다. 그 후배는 장흥민으로, 1978년 한국체대 1학년부터 김명복배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됐고 이를 발판으로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 대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라이트플라이급 선발전에서 장정구, 홍진호, 홍동식 등 역대급 복서들을 제압하고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 후배였다.

장흥민은 경북체고와 안동공고에서 체육 교사로 33년간 근무하다 퇴직, 현재 경북 안동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는 선배인 강흥원이 자신이 성장한 경흥체육관 출신들의 모임인 ‘경흥회’ 모임의 초대회장을 맡아 1년에 5백만원씩 통큰 기부를 하는 등 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끈 ‘멘토’라고 말한다.

강흥원과 유제두 챔프(오른쪽).
강흥원과 유제두 챔프(오른쪽).

1970년대 유제두를 필두로 임재근, 주호와 4인방을 구축했던 강흥원은 박종팔을 축으로 백인철, 나경민등 80년대를 풍미했던 중량급의 거목들을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인상적인 파이팅을 펼쳐 올드 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헤라클레스’ 강흥원. 그의 변함없는 복싱 사랑을 기대한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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