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웅 北 IOC위원 뺨 후려갈긴 조철제 전무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한국 아마복싱 전성기 이끈 조 복싱협회 전무 1970년대 “북한보다 앞서라” 특명 수행 김택수 체육회장과 환상의 콤비 이뤄
또 한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다. 지난 주말 필자는 SM 프로모션 홍성민 대표, 조철제 전 대한복싱협회 전무 내외와 함께 압구정동의 한 식당에서 만찬자리를 가졌다. 동석한 홍 대표는 필자가 용산공고 복싱강사로 재직할 당시 훈련받던 학생이었다. 1993년 9월 제40회 전국선수권우승을 포함, 밴텀급에서 2관왕에 올랐던 복서출신이다. 그 후로 용인대를 졸업하고 국민대 석사학위를 받고 2005년 목동에 SM 프로모션을 설립했다. 현재 서울을 포함, 수도권 12곳에 복싱체육관을 총괄 운영하고 있는 스포츠사업가다.
한국 아마복싱협회 행정 이끌어
이번 칼럼의 주인공은 1970년대 한국 아마복싱의 중심축에서 활약한 조철제 협회 전무다. 1935년 5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나 성의경 선생을 시작으로 김택수, 주상점, 노병렬, 민관식, 김명곤으로 연결된 한국 아마복싱협회 백년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강낙원 선생을 통해 복싱과 인연을 맺는다. 강낙원은 조선 무덕관을 설립하고, 1934년 1월 20일 성의경, 이혜택 등과 함께 전조선 아마복싱협회 창설을 발기한 한국 복싱의 원조(元祖)다.
연세대 체육학과도 창설한 강낙원 선생은 조철제 전무의 처조부(妻祖父)였다. 강낙원이 운영한 무도관(武道館)은 복싱과 유도 등을 배우기 위해 김두한, 신마적 등 장안의 주먹들이 찾아와 수련한 체육관이었다. 강낙원은 해방 후 미국에서 귀국한 우남 이승만 박사의 경호를 총괄하는 경호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휘하에 있던 인물중에는 비운의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도 있었다.
조 전무의 아내로 명문가 집안 혈손(血孫)인 강혜산 여사는 이대 성악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녀의 외조부(外祖父)는 이승만 박사, 김소월 시인, 주시경 선생, 지청전 장군과 배재학당에서 동문수학한 해관(海觀) 오긍선 박사였다. 오 박사는 1907년 무하마드 알리의 고향인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센트럴 의과대학을 졸업, 한국인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공익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윤치호 선생과 함께 조선 최초로 경성 고아원을 설립했고, 나환자를 돌보는 등 세브란스 의전 교장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조 전무와 강혜산 여사가 결혼식을 올릴 때 김두한은 주례를 주선해주고 하야시에게 부탁해 조철제를 건설회사 상무로 취직시켜 주기도 했다. 강 여사는 대한복싱협회 전무라는 중책을 10년 동안 담당했던 조 전무가 회장단이 교체되는 진통을 겪을 때마다 협회 운영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이를 지원하는 등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모범을 보였다고 당시 대표팀 주장이자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한 박일천이 전했다. 조 전무는 1970년대 대한복싱협회 전무를 맡으면서 김택수 대한체육회장과 간담상조같은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었고, 이를 발판으로 한국복싱이 196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70년대 르네상스 시대를 펼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1970년대 아시안게임은 남북 대결의 장
1974년 9월 테헤란에서 개최된 제7회 아시안게임. 폐막 직전까지 사격에서 강세를 보이며 금메달 14개를 획득한 북한에 밀려 남한은 금메달 3개가 부족한 11개로 5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철제가 이끄는 한국복싱팀은 복싱에서 7체급 결승에 올라 박찬희, 유종만, 김태호, 김주석, 김성철이 5개의 금메달을 따내, 15개를 획득한 북한을 간발의 차로 제치고 일본, 이란, 중국에 이어 종합 4위를 달성했다.

당시 북한은 복싱에서 2개의 금메달 밖에 따내지 못했다. 막판에 복싱에서 금맥(金脈)이 터져 전세를 극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조철제가 이끄는 한국복싱팀은 1975년과 1976년, 1978년 태국에서 개최된 킹스컵 대회 1, 2, 4회 등 세차례에 걸쳐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박찬희, 박태식, 황철순은 대회 최우수복서(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수를 쳐 주고 싶은 대목이다. 대회 3번째 종합우승을 달성하자 태국 국왕은 조철제 전무에게도 특별상을 전하며 직접 축하해 주었다.
킹스컵 3회 우승을 달성한 1978년 그해 12월 9일 태국 방콕에서 제8회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한국은 1951년 제1회 아시안 게임(뉴델리)부터 7회 대회(테헤란)까지 총 6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 중 22개가 복싱 종목에서 나와 복싱은 명실상부한 효자종목이었다. 8회 대회에서는 첫날 복싱에서 홍진호가 북한의 이병욱에게, 오인석이 북한의 김윤철에게 각각 2 대 3 판정패를 당하면서 탈락, 빨간불이 켜졌다.
하지만 김인창이 3회전에서 북한의 김윤철을 5 대 0 판정으로 잡고 도약하기 시작했다. 대회 5일째인 13일 오전까지 한국은 은 8, 동 9개로 종합 7위에 머물렀다. 반면 북한은 금 7개, 은 4개, 동 4개로 3위를 기록중이었다. 한국팀은 그날 오후 금메달 3개를 획득, 금메달 9개를 획득한 북한을 추격했다.
참가에 의의를 찾던 근대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탕 남작의 올림픽 정신이 이미 퇴색해버린 것처럼 아시안게임에서도 남북한은 총성없는 전쟁터에서 메달을 향한 의지와 집념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특히 복싱 미들급 경기에서 한국의 박영규가 북한의 장봉문에게 판정패를 당하자 신이 난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이 링에 올라 축하의 세레모니를 연출했다. 이에 조철제 전무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득달같이 달려가 내려오는 장웅 IOC 위원을 향해 빰을 후려갈겨 경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박대통령 “무조건 북한을 꺾으라”
폐막 이틀전 복싱경기 결승전이 열렸다. 한국팀은 북한에 금메달 숫자에서 14 대 10으로 4개가 부족했다. 한국복싱팀은 황철순, 최충일, 김인창, 황충재, 박일천, 김남희 등 6체급에서 결승에 올랐고, 북한은 이병욱과 구영조, 장봉문 등 3체급에서 결승에 올랐다. 이때 이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인물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을 청와대로 호출했다. 박 대통령은 남한이 북한을 꺾고 일본, 중국에 이어 종합 3위를 달성하기 위해선 복싱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김 회장을 태국 방콕으로 급파했다. 김 회장이 현장에 도착해 조철제 전무와 독대한 시간이 새벽 3시였다. 김 회장은 조 전무에게 한국복싱팀이 목표한 금메달을 획득해야만 북한을 꺾을 수 있다는 대통령의 특명을 전달했다. 날이 밝자 조 전무는 AIBA(아시아복싱연맹) 요직에 포진된 임원들을 찾아다니며 우리선수들이 판정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써달라고 간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폐막을 이틀 앞둔 18일 오후 조 전무는 남은 선수들에게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신념으로 경기에 임해달라고 주문했다.
복싱 선수단은 남은 6체급에서 황철순, 최충일, 김인창, 황충재, 박일천 등이 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또 테니스 종목에서 이덕희가 금 1개를 추가해 하루만에 6개의 금메달을 따냈고, 모두 금 16개 종합 3위로 뛰어올랐다. 반면 북한은 3체급에서 구영조만 금메달을 획득, 금 15개로 4위로 내려앉았다.

김 체육회장과 조 전무는 복싱판에서 서로의 앞길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존재였다. 조 전무는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 대회에서도 황철순, 김인창, 박일천이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조력해 한국 아마복싱을 탈(脫) 아시아권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조 전무의 복싱행정 인생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할 수 있는 마지막 무대였다. 하지만 한국은 국제정치의 이해와 맞물려 불참했다. 만일 모스크바 올림픽이 개최됐다면 장정구와 홍진호를 선발전에서 꺾고 대표팀에 승선한 복병 장흥민을 비롯, 황철순, 김인창, 박일천 중 한 명은 금메달을 따냈으리라.
조 전무는 1981년 영욕이 점철된 복싱판에서 아름다운 퇴장을 한다. 세월이 흘러 구순을 목전에 둔 조 전무 곁에는 ‘하숙생’이란 곡을 불렀던 가수 최희준, 33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동 의원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친들이 하나 둘씩 떠났고, 이젠 제28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진삼 장군 등 몇 안 되는 지우들만 남았다. 얼마 전 행사장에서 조 전무와 동석한 자리에서 만난 이 장군에게 조 전무는 필자를 복싱 전문기자라 소개시켜줬다. 이진삼 장군의 친동생 이진백 장군도 1979년 7월 베네주엘라에서 개최된 제31회 세계군인복싱대회에서 플라이급의 김지원이 금메달을 획득할 때 단장으로 참관했던 인연이 있었다.
1981년 대한복싱연맹 전무이사 직을 접은 그는 구순을 눈앞에 둔 지금에도 꺼져가는 한국 아마복싱의 불씨를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다. 조철제 전무의 변함없는 복싱 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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