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주자
[권은순의 ‘집, 돈보다 행복이다’] 남편의 취미방, 작은 골방에 만들지 말고 거실이나 침실을 남편 취미방으로 가꾸자 “남편도 집에서 편하게 머물 수 있어야”
‘큰 위로’가 된 남편의 오디오 취미
추억이 있는 음악은 언제든 몇 번이든 들어도 좋다. 혼자 운전을 하다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하면 그 감흥이 더해진다. 필자의 엄마는 67세라는 지금으로 생각하면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자기 쓰러져서 12일 동안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때 남편은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을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차 안에 꽂아두었다.
그 해 봄 중환자실에서 눈도 한번 못 떠보고 돌아가신 엄마의 병원을 매일 다니던 차 안에서 그 곡을 들으며, 분당 집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경부고속도로 중간의 무리 지어 피어있는 목련 꽃 옆을 지날 때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이후로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이 곡을 들었고, 남편도 가끔 틀어주는데 언제나 내 눈물샘은 충혈되고 만다. 그 눈물은 꼭 슬퍼서라기보다는 겹겹이 쌓인 추억 때문 아닐까? 그런 추억 만들기는 다분히 “언제나 이 음악을 들으며 장모님 생각을 함께 하자”라는 남편의 의도가 있었던 것. 그리고 필자는 남편이 이런 감성을 잃지 않고 살아오는데 일조를 했다고 스스로 칭찬하곤 한다.
나는 공간을, 남편은 분위기를 꾸민다
필자는 공간 디자이너다. 외부활동 뿐아니라 집에서도 공간을 꾸미는 것이 나의 담당이다. 남편은 우리 집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음악을 담당한다. 음악에 있어서 필자와 아이는 남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충만한 감성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다.
만나서 결혼하기까지 7년 반이란 긴 세월 동안, 필자는 남편의 이런 감성적인 부분을 좋아했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도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게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19.5평 신혼집에서 8년간의 시부모님과의 동거 시절, 그 후 28평 아파트, 32평 아파트, 43평 아파트를 거쳐 지금의 단독주택으로 옮기기까지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우선시했던 필자의 생각은 ‘가족이 집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였다.
남편은 음악을 듣고 책 읽는 걸 좋아하니 오디오 룸 겸 서재가 필요했다. 결혼 초, 아이가 없을 때에는 19.5평 아파트의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작은방을 침실로 했다. 대신 큰 방을 거실 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부부 침실을 남편의 취미방으로 내놓아
이후 본가에 들어가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동안엔 아파트 입구쪽 방 두 개를 우리가 사용했는데, 이 때도 방 하나는 기꺼이 남편의 방으로 할애해 오디오 룸과 서재로 사용했다. 그리고 28평 방 세 개 아파트로 옮겼을때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가는 아이를 생각해서 거실의 TV를 없앴다. 대신 오디오 시설을 설치해 거실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했다. 그 이후 30평대 아파트부터는 보통 부부 침실로 쓰는 가장 큰 방이 오디오룸 겸 서재가 되었다. 가장 큰 공간을 남편의 취미방으로 만든 것이다. 보통 가정에서 작은 방을 서재로 하면 남편이 외톨이 취미광이 되지만, 필자는 생각이 반대였다. 남편의 취미를 키워주고, 우리 가족이 그 취미를 공유하게 했다.
거실과 주방은 의도적이지 않아도 주부들이 많이 머무는 곳이다. 반면 침실은 크다고 해도 잠자는 시간 외에 그곳에서 지내는 경우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냥 가장 큰 방은 부부 침실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니, 남편이 맘 편하게 머물며 본인의 시간을 지낼 수 있는 효율적인 공간이 생긴 것.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 역시 일반적인 집의 공간들, 특히 침실의 쓰임새를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모두가 넓은 집을 갖고 싶은 소망이야 있겠지만 가지고 있는 한도의 공간에서 다양한 쓰임새를 생각해내면, 당장 이루지 못하는 큰 집에 대한 욕구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 상황에 맞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것이 생활을, 공간을, 집이라는 가족의 터전을 즐겁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남편은 일찍 귀가해서 가족들과
또 한 가지, 결혼을 준비할 때 남편은 예물 반지 대신 카메라를 원했다. 필자는 혼수 대신 카메라를 선사했고 그 후 35년간 취미로 사진을 꾸준히 찍어오면서 집에 암실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욕실이 두 개인 아파트에서부터는 부부 침실에 딸린 욕실은 남편의 ‘암실’이 됐다. 음악을 듣고, 사진을 인화하는 등 남편은 집에서 참 많이 분주하다. 집에 자기만의 공간이 생기니 여느 남편들과는 달리 집에 너무 잘 돌아온다.
집에서 가장 큰 방이나 살림 용도의 공간들을 ‘남편의 방’으로 양보하지 않았다면 남편을 위한 오디오 룸과 서재는 작은방에서 옹색한 모양을 가졌을 것이고, 그동안 남편이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살아온 행복감이 지금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남편들의 어깨가 처지는 게 싫다. 집에 와서 특별히 할 것이 없어서 무료하게 지내는 것도 싫다. ‘아이들 공부만 우선’이라며 조용히 지내야 하는 남편의 모습도 싫다. 남편도 집에서 편하게 머물 수 있어야 한다. 남편들도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고 싶을 것이다. 언제나 엄마와 아이가 우선이고 아빠는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할 거라는 착각에서 나는 일찌감치 깨어나 있었다.
여기서 끝으로 한 가지 더. 여러 남편들이 오디오 룸과 서재를 갖겠다며 시도를 하지만 공간을 갖는 걸로 마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만약 필자의 남편도 자신의 공간을 갖고도 활용하지 않았다면 계속 큰 방을 양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만의 공간이 주어진다면, 남편들이여 즐거이 그곳의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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