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의 두 문화...문과와 이과의 차별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18)일본, 산업화·관료양성 위해 문-이과 경성제대, 일본식 문-이과제 여과없이 수용 유교적 세계관, 한국 문이과 차별 더 고착시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사(1933년) 사진=위키피디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사(1933년) 사진=위키피디아

국내에서 문과와 이과를 통합하자는 논의는 오래되었다. 2018년 박근혜 정부가 문이과를 통합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질적으로 수능에서 문이과 선택과목이 지정되면서 현재 문이과통합은 2022년까지 연기된 상태다. 지난해 처음으로 문이과 통합수능이 치러졌고, 수학에 강한 이과 학생들의 프리미엄이 현실화되면서 이들의 교차지원으로 대학입시는 대혼란을 겪었다.

현실적으로 문이과 통합은 학생들에게 수학과 과학을 좀 더 일찍 가르치자는 취지에 가깝다. 하지만 교육부는 문이과통합을 진행하면서 수학과 과학의 비중을 낮추는 꼼수를 부리며, 문이과 통합교육의 철학을 관료주의적 자구책으로 막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이 문제를 결국 정권 이후로 미루면서 문이과통합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교육철학은 또다시 다음 정권의 결단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일제시대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들 말한다.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에서 문과와 이과로 나눠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가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경성제대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최고 학부이자 유일한 대학이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쳐 현재 한국 대학교육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 중 대표적인 잔재가 바로 문과와 이과의 구분이다. 개교 당시 경성제대는 오직 3년제 법문학부와 4년제 의학부만 존재했는데, 문과는 법문학부로, 이과는 의학부로 입학하던 것이 현재 한국 교육 체제에 남은 문과·이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고, 토착왜구를 청산하자는 민주진보진영의 대대적인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에도 불구하고 경성제대가 구축한 문·이과 구분은 여전히 견고하게 한국의 교육현실을 장악하고 있다. 진정한 친일청산은 향후 100년의 대계가 될 교육철학을 제대로 세우고, 아무런 합리적 이유도 없이 지속해온 문·이과 구분 교육을 청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경성제대는 현재 우리가 대학로라고 부르는 서울 혜화동 인근에 설립되었다. 현재 마로니에 공원으로 사용되는 터도 원래는 경성제대가 사용하던 땅이다.
경성제대는 현재 우리가 대학로라고 부르는 서울 혜화동 인근에 설립되었다. 현재 마로니에 공원으로 사용되는 터도 원래는 경성제대가 사용하던 땅이다.

문-이과 구분과 일본 근대화의 족적

1924년 경성제대 첫 입시에서 문과 90명, 이과 80명이 선발된다. 이 중 조선인은 각각 29명, 1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29년 법문학부에서 22명의 조선인 졸업생이, 의학부에서 12명의 졸업생이 배출된 것이 한국 최초 문·이과 구분의 시작이다. 일본의 경우 1877년 법과, 이과, 문과, 의과 4개 학부로 구성된 최초의 종합대학 도쿄대학이 설립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공학을 전문으로 하는 ‘공부대학교’가 도쿄대보다 먼저 설립되어 있었다. 도쿄대에 공학부는 없었지만, 이과에는 기계공학과, 토목공학과, 지질학 및 채광학과 등 공학계 학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바라본 법문학부. 사진= 나무위키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바라본 법문학부. 사진= 나무위키

16세기부터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으로부터 서양학문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었던 일본사회에서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문과, 이과의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한 건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일본의 종교사회학자이자 도쿄 공대 교수인 하시즈메 다이사부로는 근대 일본에서 시작된 문과 이과의 구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이런 구별이 있는 것은 발전도상국의 특징이다. 칠판과 노트만 있으면 되는 문계와 비교할 때, 이계는 실험설비에 돈이 들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 일본은 학생수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수학 시험을 치르고 문계, 이계를 나누기로 했다. 입시 문제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전 단계에서 문계, 이계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이과의 교육에는 실험 및 기자재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비용이 더 발생하기에 이과계열 학생의 수를 제한할 수 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 자구책으로 수학시험으로 문과, 이과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문과 이과 구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과와 이과가 대칭적인 개념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과’가 1870년대부터 서양 자연과학 계열 과목을 아우르는 범주로 쓰였던 반면에 같은 시기 ‘문과’는 상위 범주로서는 동질적이지 않은 학과목- 전통적인 한학 및 국학 혹은 양학-을 대학의 성질에 따라 달리 부르던 명칭이었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정부로부터 <대학규칙>등을 통해 학제가 공표되면서, 상위 범주 명칭으로서는 유명무실했던 ‘문과’는 사라지고 대신에 전문학교의 예과 과정의 학과목 규정을 통하여 문과라는 개념이 다듬어지게 되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학제를 연구한 허지향은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어느 쪽이든 유용하게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그릇 역할을 하던 ‘이학’이 기호화된 초기의 예가 바로 학제였다. 이미 1870년, 일본에서 그것은 한 눈에 보일 정도로 서양의 형이하학 과목들을 묶는 범주로 사용된다. 그 때 함께 등장한 ‘문학’이라는 명칭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는 우리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에서 학제를 통해 문과와 이과가 등장한 역사적 맥락 속에는 서양으로부터 수용된 서양학문 중 형이하학적인 것들, 즉 자연과학과 공학 그리고 기술분야의 학문들이 자연스럽게 ‘이학’이라는 범주로 묶일 수 있었다는 사실과 기존에 혼란스럽게 불리던 여러 전통적인 인문학 계열의 학문들과 서양의 인문학이 한데 묶이며 ‘문학’이라는 범주로 ‘이학’에 대칭되어가는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일본 메이지유신기의 문이과 구분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메이지유신의 주축세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가중치가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서구에서 들어온 이질적이지만 강력한 형이하학 학문들이 ‘이학’이 되자, 나머지 학문들은 대부분 ‘문학’의 범주로 쫓겨나듯 포함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일본 메이지유신기의 근대화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조된 학제를 통해 시작된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메이지 시기 주로 법무를 담당하던 ‘사무관료’와 일본 산업화를 담당하던 ‘기술관료’가 대응하면서 오늘날처럼 더욱 뚜렷한 구분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메이지 4년인 1871년이 되면 기술관등급이 정비되고, 정부 기관 안에 기사, 기관의 총감독직으로 ‘기감’이 설치되는 한편 1893년 ‘문관임용령’으로 사무관을 채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근대화 시기 사무관료와 기술관료 사이의 구분은 확고해졌다. 이렇게 관료제에 생겨난 구분이 교육 체제에 영향을 주지 않을 리 없었는데, 메이지 중기 무렵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인 ‘구제고교’ 등을 통해 문·이과의 구분은 확고하게 일본사회에 뿌리내리게 된다.

1911년 공표된 일본의 고등중학교령 제 4조에는 “고등중학교의 학과를 나누어 문과 및 이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고, 1918년 발표된 고등학교령 제 8조에는 “고등학교 고등과를 나눠서 문과 및 이과로 한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그리고 이 고등과는 외국어에 따라 문과는 ‘문과갑류(영어)’와 ‘문과을류(독일어)’로, 이과는 ‘이과갑류(영어)’와 ‘이과을류(독일어)’, ‘이과병류(프랑스어)’등으로 구분했다. 고등학교에서의 학과목 선택이 이후 대학진학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진정한 문과/이과의 구별이 시작된다. 근대 일본의 서양학문 수용을 연구해온 학자 김성근은 “도쿄대학과 제국대학의 설립이 서양의 분과학문을 제도권 안에 체계적이고 매우 효율적으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처럼 외적 필요에 의해 땜질 식으로 학문을 수입한 결과, ‘학문의 필연적 연계’가 사라지고 다윈의 진화론보다 사회진화론이 먼저 유행하고, 뉴튼역학에 대한 이해 없이 계몽주의가 소개되는 식의 취사선택의 문제가 발생했다. 도쿄대학과 제국대학을 통해 본격화된 일본의 서양학문 수용과 제도화는, 철저하게 메이지 정부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 즉 ‘근대국가 수립에 필요한 산업화와 관료의 양성’이라는 국가적 요구가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전세계에서 종합대학 내에 ‘공학부’를 만든 건 일본이 최초였으며, 고급 관료의 빠른 양성을 위해 ‘법합부’에 각종 특혜를 제공한 것도 일본의 특이한 양식이었다.

1910년 일본 메이지 시기 제련소의 모습.
1910년 일본 메이지 시기 제련소의 모습.

율사와 의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식민지적 기원

“그 당시는 가장 똑똑한 사람은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던 시기였어요. 글을 쓴다든지 말이죠. 좋은 문장가는 대단한 존경을 받던 시대였으니까 모든 학문의 목적이 문학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전까지는 글이나 시를 잘 써야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 가장 부러움을 샀던 일이라면 관리가 되어 높은 지위에 올라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거였으니까요. 갑오경장 이후부터는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문학을 한다는 것이 별 소용이 없게 되자 법률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긴 했지만요.”- 안동혁

시기와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한국 교육제도에 여전히 남아 있는 문·이과의 구분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제도화한 일본식 교육제도의 반복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 문이과 구분이 뚜렷해지던 1920년대 세워진 조선의 경성제대는 일본식 문이과 제도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받아들였다.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대학인 경성제대가 체택한 그 제도는 이후 설립될 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일본에서 이식된 문이과 제도는 한국적 맥락을 거치며 다른 방식으로 사회 속에서 기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여전히 국립종합대의 경우 62% 이상이 이공계 중심이고, 사립대는 문과계열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종합대에서 이과비율은 약 38%에 그친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문이과의 구분으로부터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전세계가 과학기술력으로 패권을 다투는 시대에 이 문제를 되짚어보는 일은 의미 있을지 모른다.

2004년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체육대회에서 이과반과 문과반 사이에 격문 대전이 벌어졌는데 이런 문구가 내걸렸다고 한다.

“‘뻥 대장 문과생’, ‘정치책=무술 교본’, ‘문과 흘러간 역사속에서 헤맬 때, 이과 미래를 향해 달린다.” (이과생이 문과생에게)

“‘이과, 뛰어봤자 발밑이다’, ‘사기당하면 와라, 아프면 가줄게’, ‘공돌이들 내 밑으로 면접 보러와.” (문과생이 이과생에게)

2000년대 초반 한국은 이공계 위기라는 현상을 겪었다. 이공계 출신의 취업율과 연봉이 문과와 예체능계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2000년대 초반 한국의 기업 경영진 대부분은 문과 출신이었고, 마케팅이나 회계 등에 약한 이공계 출신 경영자들은 정글과 같았던 한국의 기업환경에서 고전했다. 당시 문·이과 선택 비율은 65 대 35로 문과가 압도적이었다. 물론 기업계에서 이런 문과 편향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적어도 민간의 기업에서 이공계열은 이미 문과를 압도하고 있다. 한국을 이끄는 기업 대부분이 IT, 반도체, 의·생명과학 등인 상황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업체 인사담당자들은 이공계 전공자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게 하는 일은 쉽지만, 문과 전공자에게 자연과학적 지식을 겸비하게 만드는 일은 어렵다는 점을 잘 안다. 인문학자들은 이공계 출신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라고 부르짖지만, 현실에선 문과 출신 대학졸업자들이 코딩학원에 몰리고 있다. 대학이 위기라고 하지만, 의대와 공대를 가진 대학들은 여전히 강고하고 인문학 계열의 학과들은 줄줄이 폐업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고상한 철학교수는 이런 현상을 보며 인문학의 지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한탄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사 또한 이 강단 철학자의 말을 지지하고 있을까.

우리는 문과, 이과의 구분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경성제대를 통해 우리에게 이식된 것이며, 따라서 이를 개혁하는 것은 문이과 통합 교육을 통해 미래형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현재의 문이과 구분으로 경직된 교육체계의 모순을 수정하고, 나아가 일제시대의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19세기 적자생존의 논리가 유행하던 제국의 시대에 서양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던 일본의 맥락에서의 문이과의 구분과 식민지 상황에서 대부분의 과학기술 근대화를 일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맥락에서의 그것은 같을 수 없다.

나아가 19세기 중반 개항기부터 20세기 초반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잃어버린 80년 동안 수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서양의 과학기술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의 지배계층, 그리고 그 지배계층의 의식 속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유교적 세계관 속에서 조선-식민지-해방공간으로 이어지는 한국 과학기술근대화의 지속된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농공상의 유교적 신분체계는 문이과의 구분으로 이어졌고, 식민지가 되어서도 지배층이 이학 계열의 학문을 받아들인 경우는 의학이 유일했다. 조선말에서 식민지, 그리고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과학기술은 지배계층의 외면 속에 몰락한 양반이나 중인계층을 통해 생존의 수단으로 수용됐다. 글을 쓰는 것이 곧 정치였던 조선의 전통 속에서 문이과의 구분은 곧 하나의 계급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과학기술근대화 과정 이후에도 과학기술자들이 사회의 주체세력으로 부상하지 못한 이유 속에는 인문학이 곧 정치를 위한 학문으로 기능했던 조선, 그 조선의 전통이 청산되지 못한 채 일본을 통해 부분적인 과학기술근대화를 경험해야 했던 식민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비극적인 역사가 녹아 있다.

1910년, 나라는 망했고 지식인계층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나라를 구해보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한국적 맥락의 두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뿌리 깊은 문과와 이과의 구분과 차이가 나타났다. 문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조선학운동’은 서양학문을 어쩔 수 없이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문과 계열의 식민지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시작한 학문운동의 허망한 실패를 보여준다.

그 반대편에서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 엔지니어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발명학회’의 독립운동은 뜻과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 수준에서 독자적인 과학기술력을 갖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드러내고, 동시에 식민지 시기 문과형 지식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호한 이해와 무능이 초래한 비극을 보여준다.

두 운동을 대비하면서, 21세기 한국사회에 이르기까지 뿌리깊게 이어지는 문·이과의 갈등과 그 위계의 기원을 파헤쳐 보는 일은, 과학기술강국으로 가는 길이 국가의 유일한 생존이 되어버린 21세기 한국에서 우리가 반드시 되새겨야 하는 역사를 아는 일이 될 것이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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