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었다 하면 ‘완판’...스페인 왕비의 패션
[최지윤의 스페인 이야기] 레티시아 왕비, 패셔니스트로 각광받는 이유
패셔니스트가 되기 위한 마음자세는
패션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잘 나타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중 하나다. 유명인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의 전형적인 옷차림이 무엇이라고 단언할 정도쯤 되면, 패션은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본인의 스타일을 먼저 찾고, 그 다음에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잘 반영된 옷을 찾아내는 것이 좋다. 소위 옷 잘 입는다는 사람들을 보면, ‘TPO’(Time, Place, Occasion)와 트랜드를 잘 이해하고, 본인의 개성에 맞게 매치한다. 특히 그들이 입어서 화제가 된 옷을 보면 생각보다 저렴한 중저가 브랜드나 보세인 경우도 많아 놀라기도 한다.
명품을 걸쳐야 옷 잘 입는 사람, 패셔니스타가 된다는 것은 옛말이다. 그런데도 ‘샤넬 오픈런’을 할 정도로 한국에서는 명품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명품 브랜드는 날이 갈수록 가격을 올리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오늘이 가장 싸다”라면서 몇백 만원이 훌쩍 넘는 명품 제품을 산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자신이 번 돈을 원하는 곳에, 원하는 만큼 쓰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형편과 관계없이 비싼 가방 하나쯤은 장만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만연하고 있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다. 해외에 거주하며 한국을 제3자의 눈으로 보게 된 필자는 그동안 얼마나 패션과 외모에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됐다.
스페인은 2021년 세계 명목 GDP 순위에서 14위, 한국은 10위를 차지했으니 두나라의 경제 규모가 크게 차이나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제일가는 부촌들, 예를 들어 마드리드의 살라망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길을 걸을 때 명품백을 멘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 특히 필자가 교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더욱 그렇다. 옷, 메이크업, 가방 등을 보면 자신의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용성에 중점을 둔 차림이다. 명품은 고사하고 준명품을 들고 다니는 학생조차 보기 어렵다. 백화점 명품 매장에는 관광객이나 명품 대행 판매하는 중국인 상인이 대부분일 뿐, 현지인은 드문 편이다.

유럽 왕실중 가장 검소한 왕비 레티시아
반면 스페인의 국민 브랜드 자라(Zara) 매장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한국에서 자라의 가격이 현지보다 두 세배 정도 비싸지만, 현지에서는 합리적인 가격의 SPA 브랜드로 인식돼 빈부의 차이를 떠나 모두가 애용한다. 생각해 보면, 스페인은 로에베(Loewe) 같은 명품 브랜드도 유명하지만 자라, 망고, 오이쇼(Oysho), 마시모 두띠(Massimo Dutti) 등 소비자들이 큰 부담을 갖지 않고 구매할 수 있는 SPA 브랜드들이 훨씬 유명하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스페인의 한 연예뉴스 사이트(hola.com)에 따르면 스페인의 레티시아 왕비는 유럽에서 패션에 가장 적게 지출하는 왕실 인사 중 한 명으로 꼽혔다고 한다.
유럽 왕실은 보통 지출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기 때문에 연간 혹은 분기별로 얼마를 사용했는지 모든 국민이 알 수 있다. 유럽 왕실에서 가장 패션에 돈을 많이 쓰는 사람은 영국의 윌리엄 왕세손 부인인 케이트 미들턴으로 작년 한 해 동안 10만2711유로(약 1억3700만원)를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2위도 역시 영국의 해리 왕세손 부인 메건 마클이, 다음으로 네덜란드의 막시마 왕비가 차지했다. 옷가지 수로 봤을 때 스페인의 레티시아 왕비는 연간 111벌의 옷을 새로 구매해 케이트 미들턴에 이어 2위에 올랐지만, 지출한 돈은 총 2만1695유로(약 2900만원)에 불과했다. 옷 한 벌당 평균 가격이 301.32유로(약 40만원)로 가장 적어서 합리적인 지출을 한 것으로 분석됐다.
레티시아 왕비는 아나운서 출신으로 지난 2004년 왕세자였던 펠리페 6세와 결혼한 후 2014년 왕비자리에 올랐다. 두 사람은 한 파티 장소에서 처음 만났고, 펠리페 6세가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해 데이트 신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몇 차례 거절했지만 포기를 몰랐던 펠리페 6세가 계속 노력한 덕에 결국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그의 부모였던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소피아 왕비는 그에게 더욱 적합한 신붓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고, 레티시아를 며느리로 삼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껏 평민 출신의 왕비가 없었던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부모로서는 다른 나라의 왕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완고했던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자, 결국 결혼을 승낙했다. 게다가 레티시아는 이혼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결혼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전남편과의 결혼은 혼인성사를 한 가톨릭 결혼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면서 끝없는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결혼하게 된다. 당시 스페인 공영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었던 레티시아는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가정과 육아에 전념했다.
중저가 브랜드 즐기는 왕실 패셔니스트
스페인에서 그녀의 패션은 언제나 주목거리다. 레티시아가 입은 모든 옷의 브랜드를 분석하는 패션 블로그가 있을 정도. 그녀가 입은 옷이 완판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뛰어난 미모와 170cm의 큰 키로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 데다가 워낙 예전부터 스타일이 좋고 패션 센스가 있다고 소문이 나, 많은 여성이 그녀의 룩을 참고한다. 특히 스페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의 옷이나 중저가 로컬 브랜드를 다양하게 활용하기 때문에 그녀가 입는 옷은 언제나 화제가 된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국빈 자격으로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스페인 왕실은 성대하게 환영식을 준비했다. 마드리드 왕궁에 도착하는 문 대통령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레티시아 왕비는 스페인 디자이너 펠리페 바렐라(Felipe Valera)의 우아한 누드 핑크톤의 원피스를 입었다. 김정숙 여사는 옥색 빛이 도는 단아한 하늘색 재킷과 흰 원피스를 입었다. 김 여사와 레티시아 왕비는 이후 시각 장애인 지원 단체인 온세(ONCE)를 방문했는데, 당시 레티시아는 스페인 SPA 브랜드 마시모 두띠의 프린트 원피스를 착용해 캐주얼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을 한껏 자아냈다. 앞서 지난 2019년 10월에 스페인 국왕 내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청와대 전경과 잘 어울리는 플라워 프린트 원피스와 활동성을 강조한 마시모 두띠의 중저가 원피스를 착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국민 정서’ 함께 해야
레티시아 왕비는 결혼생활 중에 성형수술과 고부 갈등, 겸손하지 못한 태도 등으로 비난을 받았고, 의상에 많은 세금을 낭비한다는 기사로 인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스페인 왕실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기에 더욱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유럽 내 다른 나라 왕실에 비하면 레티시아 왕비의 지출은 적은 편이라는 걸 스페인 국민이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어쩌면 한 나라의 왕비로서 품위 유지비가 일반인보다 더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도에 지나치면 물론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레티시아의 패션이 언제나 이슈가 되고 그녀가 입은 옷이 완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렴한 스페인 SPA 브랜드와 자국 디자이너의 제품을 애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레티시아는 검소하고,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스페인 국민의 정서를 의식한 듯 같은 옷을 몇 번씩 다시 착용한 모습이 포착된 적도 있다.
언제나 왕비나 영부인의 패션은 그 나라 국민의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패션 철학과 나라의 이미지를 잘 대변하기’, ‘과하지 않게 표현하기’, ‘TPO에 맞는 의상 고르기’라는 삼박자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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