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권리 강화” 헌법도 개정한 나라

[최지윤의 스페인 이야기] 헌법에 ‘장애인’ 표현도 바꾸고 장애인 권리 강화하고 사회 통합 노력 시각장애인 재단 ‘온세’의 국민 복권 인기 사회가 장애인 차별 없애는 노력에 동참

장애인 승객의 탑승을 돕는 국영 철도(Renfe) 직원. 출처=truecalia.com
장애인 승객의 탑승을 돕는 국영 철도(Renfe) 직원. 출처=truecal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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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에 진심인 나라

교통량이 많은 평일 마드리드의 출근길이었다. 편도 1차선 도로가 꽉 막혀 차들이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인지 창문을 열어 빼꼼 앞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거동이 어려운 지체장애인이 승합차에 탑승하고 있었다. 차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 후로도 꽤 한참 출발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느긋하지만, 도로에서는 누구보다 참을성 없는 스페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러 역에 가면 가끔 전동휠체어를 타고 여행하는 스페인 사람을 본다. 여행 전 국영철도(Renfe) 사무실에 교통 약자 서비스를 신청하면 장애인이 열차에 오르고 내리는 것을 도와준다. 능숙한 손길로 장애인 승객을 돕는 직원을 보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구나 싶다.

스페인은 경제 규모로 봤을 때, 세계 10위 안에 드는 국가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데 진심인 선진국이다. 누구나 평등하고, 존엄하게 살 수 있도록 국가와 지자체에서 아낌없이 지원한다. 또한, 스페인 사회에서는 누구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많은 이들의 치열한 투쟁 덕분에 장애인에 대한 복지와 인식이 앞서 있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더 나아가 스페인 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담긴 단어를 없애려 노력하고 있다.

장애인을 위한 헌법개정

말에는 힘이 있다. 은연중에 사용하는 단어는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스페인 왕립학술원에 따르면, 스페인어에서 ‘dis-’는 반대, 부정의 의미를 가진 접두사다. 이제껏 사람들은 장애인을 ‘disminuido(힘이 부족한, 정상인에 비해 부족한 사람)’, ‘discapacidad(능력이 없는 사람)’라고 불러왔다. 이런 단어는 장애인을 부정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

요즘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할 때 쓰는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애인을 모욕하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말을 잘 못알아들은 사람에게 귀머거리(sordo), 혹은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 맹인(ciego)이냐고 비아냥거린다. 심지어 남을 욕할 때 ‘저능아(subnormal)’, ‘지능 발달이 늦은 사람(retrasado)’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지난 1월 스페인 의회는 장애인 관련 내용이 명시된 헌법 49조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장애인의 권리와 의무를 보호하고, 자율성과 사회적 통합을 돕기 위한 내용이 추가된 것이다. 또한, 오랜 기간 스페인에서 장애인을 부르던 명칭도 변경했다. 기존 명칭 ‘disminuido’ 대신, ‘장애를 가진 사람(persona con discapacidad)’이라는 용어로 새롭게 변경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소녀와 여성을 언급하며 이들에게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위원장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헌법에 장애 여성과 소녀에 대해 언급한 나라가 없다”며 이는 국제사회에 좋은 자극을 줄 것이라고 힘을 실었다. 스페인의 한 디지털 일간지(publico)는 스페인에서 장애 여성의 취업 가능성은 남성 대비 32.3% 낮고, 급여는 15.5%가 낮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헌법 개정을 통해 차별에 맞서 싸우는 장애인의 권리를 증진하고, 장애 여성이 더욱 보호받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스페인의 장애인복지지출비율은 독일보다 높고, 유럽 전체평균보다도 높다. 출처=한국장애인개발원, 연합뉴스
스페인의 장애인복지지출비율은 독일보다 높고, 유럽 전체평균보다도 높다. 출처=한국장애인개발원, 연합뉴스

매년 강화하는 장애인 복지

OECD 국가의 GDP대비 장애인 복지지출비율 자료를 보면, 스페인은 다른 나라에 비해 장애인 복지에 사용되는 예산비율이 높은 편이다. 스페인 정부는 장애인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존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에서의 지원을 매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장애 정도와 등급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지원금과 소득공제, 제반 혜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장애 연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비기여 장애연금(PNC)은 사회보험에 기여한 바가 없어도 장애 정도가 65% 이상, 충분한 수입이 없는 경우에 받을 수 있다. 영구장애 기여연금은 사회보험에 기여한 적이 있고, 불의의 사고나 산업 재해 등으로 후천적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에게 해당된다. 이 연금의 경우, 장애를 네 가지 등급(부분 장애, 전체 장애, 완전 장애, 중증 장애)으로 나누어 차등적으로 지급된다. 중증 장애 판정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동시에 장애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또한, 장애인을 부양할 의무가 있는 가족과 배우자에게도 세제혜택이 주어진다.

이밖에 각 지자체에서도 장애인 지원과 인프라 개선에 힘쓰고 있다. 마드리드주를 예로 들면, 작년 한 해 동안 장애인의 이동권, 자율성 향상을 위해 2천억 원 상당의 예산을 투입했다. 거동이 불편한 시민의 주택 개조에도 보조금을 지급했다. 많은 신청자 중 1만 3천여 명에게 거주지 경사로와 휠체어 리프트, 엘리베이터 설치 등의 지원을 해줬다. 마드리드 지하철은 세계에서 가장 잘 마련되어 있다고 평가받지만,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충분하지 못했다. 마드리드 지하철은 2028년까지 추가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장애인의 접근성을 향상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마드리드주정부는 점진적으로 저상버스의 수를 늘리고 장애인이 자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음향경고 장치시스템, 보조 조명을 설치하는 등 인프라를 개선해 나갈 계획이다.

2021년 스페인에 방문한 김정숙 여사(왼쪽)가 레티시아 왕비와 온세 재단에 방문해 시각 장애인 복권을 구매하고 있다. 출처=europaexpress.es
2021년 스페인에 방문한 김정숙 여사(왼쪽)가 레티시아 왕비와 온세 재단에 방문해 시각 장애인 복권을 구매하고 있다. 출처=europaexpress.es

시각장애인 재단 ‘온세’가 발행하는 복권

스페인에는 장애인이 사회에서 독립적인 주체로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도 많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시각장애인 재단인 온세(ONCE)가 있다. 온세는 시각 장애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1938년에 설립된 단체이다. 재단은 매주 추첨하는 복권을 판매하여 발생한 수익을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교육, 고용 프로그램, 장학금 지급에 사용한다. 시각 장애인이 판매하는 온세 복권은 스페인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국민에게 인기가 아주 많다. 온세는 현재 사업 영역을 확대하여 스페인 내 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정부, 기업과 협력하여 장애인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고용 창출에 앞장서고 있다.

스페인 통계청(INE)의 자료에 따르면, 스페인에는 438만 명의 장애인이 있다. 2020년 기준, 근로 가능한 나이(16~64세)의 장애인은 총 158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온세 재단은 근로 가능한 장애인의 27.8%만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장애인의 취업을 장려하기 위해 여러 이니셔티브를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온세는 삼성전자와 손을 잡고 장애인의 취업 교육과 노동 시장 참여 증진을 위해 애플리케이션 ‘Ayho’를 출시했다. 삼성은 스페인 장애인 고용 프로그램의 디지털 전환에 앞장서고 있으며, 디지털 기술로 장애인의 접근성을 향상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온세(ONSE) 재단은 장애인 고용 촉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출처=once.es
온세(ONSE) 재단은 장애인 고용 촉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출처=once.es

스페인 비영리 단체 Funcas의 자료에 따르면, 스페인 장애인 근로자의 88%는 직장에서 차별당한 적이 없으며, 93%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스페인 정부와 기업은 단순히 장애인 고용에만 치중하지 않고, 그들이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일할 수 있도록 비장애인의 인식 개선에도 힘쓰고 있다. 국민의 성숙한 의식도 장애인의 사회 진출을 성공적으로 돕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도움이 자연스럽기 까지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같이 살아가는 인격체로서 장애인을 존중해 주는 스페인 사회를 보면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스페인 사람들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조심스레 걷는 시각 장애인을 보면 무턱대고 도와주지 않는다. 장애인을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하는 일이라며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건 비장애인의 이기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 개선에는 여전히 큰 노력이 필요하지만, 복지나 시민 의식은 그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기에 스페인의 미래는 밝게 느껴진다.

글쓴이

최지윤 칼럼니스트

최지윤 칼럼니스트는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전공했고, 국외 한국어 교육 사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세종학당(멕시코)’과 스페인 살라망카대학교 한국학과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스페인어권 국가의 한국어 교육 전문가가 되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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