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없는, 아날로그 나라는 어떤지 아세요?

[최지윤의 스페인 이야기] Welcome to 아날로그 사회 큼지막한 벽보로 된 시험 시간표 도어락 대신 꼽고 돌려야하는 열쇠 하이패스는 싫어! 현금 개찰구로 가! 그런 나라에 공인인증서가 도입되고..

스페인 슈퍼마켓 ‘메르카도나’의 계산대. 사진=abc.es
스페인 슈퍼마켓 ‘메르카도나’의 계산대. 사진=ab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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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꾹꾹 눌러 적은 ‘학생 카드’

처음 스페인 대학 강단에 섰을 때 한국과 너무나 다른 대학 시스템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학기 첫날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스무 명이 넘는 학생들이 쭈뼛거리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신의 개인정보가 적힌 ‘학생 카드’였다. 증명사진을 풀로 붙이고, 본인의 인적 사항과 수강하는 과목 정보 등을 손으로 꾹꾹 눌러 적은 카드였다. 컴퓨터와 핸드폰 자판이 더 익숙한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 많은 사람의 손글씨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학생들이 제출하는 학생 카드의 양식. 사진=eduvolution.blogspot.com
학생들이 제출하는 학생 카드의 양식. 사진=eduvolution.blogspot.com

종강을 앞둔 지난해 12월의 어느 날, 학부 행정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종강 후 학생들이 학기말 시험을 볼 강의실 예약을 위해 꼭 직접 행정실을 방문하라는 내용이었다. 학생들 시험 보는 장소는 당연히 과목을 강의했던 강의실이라고 생각했건만, 강의실을 따로 예약하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마침 연구실에 있었던 터라 연락을 받자마자 내려갔다. 행정실 직원은 “빨리 잘 오셨어요. 늦게 오시면 원하는 강의실이나 시간대를 예약할 수가 없거든요!”라며 나를 반겼다.

알고 보니 강의실 예약은 선착순이라 빨리 오는 교수가 원하는 강의실과 시험 시간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강의실 신청서는 수기로 작성해야 했다. 원본은 행정실이, 복사본은 담당 교수가 갖는다. 행정실 직원은 반쯤 내려간 안경을 치켜올리며 두꺼운 공책에 예약 내용을 하나하나 작성했다. 며칠 후 학부 건물 입구의 게시판에는 과목별 시험 일정이 큼지막하게 게시되었다.

한국에서는 종이 한 장 필요 없이 온라인으로,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일이 스페인에서는 예전 스타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놀랐다. 병원에 가서도 그렇다. 대학병원이나 큰 병원은 처방전이나 모든 서류를 프린트해서 주지만, 아직도 처방전이나 진료 확인서를 자필로 써 주는 개인 병원 의사도 많다.

열쇠가 없으면 집을 나서지도 못하는 생활

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아날로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초등학교 시절, 집 열쇠는 도어락으로 바뀌었고, 이후로 열쇠를 사용해 본 적이 전혀 없다. 그런데 스페인에 오자마자 집, 직장 열쇠가 생겼다. 어느 날, 건물 현관문을 열어야 했다. 그런데 열쇠를 왼쪽으로 돌려야 할지 오른쪽으로 돌려야 할지, 몇 번을 돌려야 하는지 몰라서 말 그대로 쩔쩔맸다. 그 모습을 본 내 또래의 남자가 친절하게 도움을 주었다. 다 큰 성인이 문도 못 열고 있던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다시 생각해도 쥐구멍으로 숨고 싶다.

스페인 생활 초기에는 열쇠를 사용하는 것이 어색했다. 스페인 집 문은 손잡이를 돌려서 열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여냐고? 열쇠를 꽂고 돌려야 문이 열린다. 그래서 잠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 실수로 열쇠를 챙기지 않으면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집 안에서 문을 잠글 때도 밖에서 문 열 때 사용하는 열쇠로 잠그는 희한한 시스템이다. 그뿐만 아니라, 열쇠를 계속 가지고 다니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운동하러 갈 때 주머니 속에서 달랑거리는 열쇠가 너무 거추장스럽고 신경 쓰였다.

스페인 가정집의 현관문 모습. 위 사진은 집 외부, 아래 사진은 집 내부. 출처 =puertasdesegura.com
스페인 가정집의 현관문 모습. 위 사진은 집 외부, 아래 사진은 집 내부. 출처 =puertasdesegura.com

긴 여름 휴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에 가까워지는데 열쇠를 어디에 놨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집주인에게 여분의 열쇠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휴가 중이라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파트 현관에 도착했는데 한숨이 나왔다. 울며 겨자먹기로 열쇠공을 불렀다. “현금으로 300유로요”라고 쿨하게 말씀하시는 아저씨에게 조금 깎아주실 수 없냐고 사정했지만,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빨리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며 너털웃음만 지으셨다.

허무한 실수로 큰돈을 날려버려서 속상했던 나는 아저씨에게 물었다. “스페인에서는 왜 아직도 열쇠를 쓰냐”고. 우선, 스페인 사람들은 도어락보다 열쇠가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열쇠를 디지털 도어락으로 바꿔야 하는 이유를 못 느낀다더라.

사람끼리는 얼굴 빤히 보고 얘기해야지!

그렇다. 생각보다 스페인 사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굉장히 보수적이다. 그렇기에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가 느리다. 100년 전 스페인 사진을 보면, 주요 건물들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신제품이 나와도 ‘구관이 명관’이라며 대체로 원래 사던 것을 사는 편이다.

스페인 도로에서 유심히 보게 되는 게 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스페인의 하이패스인 via-T를 사용하는 차량 출구는 언제나 텅텅 비어 있는 장면이다. 대신 현금이나 카드로 결제하는 출구는 대기하는 차량으로 꽉 밀렸다. 공항이나 백화점에서도 하이패스를 이용해서 간편하게 주차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다 주차권을 뽑는다. 하이패스가 일반화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도입 16년 만에 하이패스 이용률 90%를 달성했다는 한국과는 정반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또 아직도 많은 택시가 LED ‘빈차 표시등’ 대신 ‘빈차(Libre)’가 적힌 팻말을 사용한다. 손님이 탑승하면 택시 기사가 손으로 재빨리 팻말을 반대쪽으로 돌려 손님이 있음을 표시한다.

빈차(Libre) 팻말이 붙어있는 스페인 택시. 사진=yotaxi.es
빈차(Libre) 팻말이 붙어있는 스페인 택시. 사진=yotaxi.es

스페인에서는 무인 시스템이나 비대면 서비스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맥도날드, 버거킹 등 다국적 프랜차이즈 식당에는 키오스크가 조금씩 설치되고 있지만, 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에 무인 계산대가 생겼지만, 여전히 직원이 있는 계산대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무인 매장이 생긴다 해도 큰 인기를 얻지 못할 게 틀림없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직도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소통하는 일련의 과정을 간편함, 빠름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 눈을 마주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정다운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회는 생각만 해도 삭막하기 때문이라고.

어딜 가든 사람들은 바쁘게 볼일만 보지 않는다. 여유를 갖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데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그래서 물건을 사러 갔다가 직원의 고향이 어딘지, 식구가 몇 명인지까지도 알게 되는 재밌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병원에 가면 한국에서보다 진료 시간이 길다. 의사는 환자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고, 증상 외에도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비대면 방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면 문 앞에 놓고 가는 비대면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택배도 마찬가지다. 수령인이 없으면 배송원이 언제 다시 방문하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간다. 2차 방문 때도 수령인이 없으면 택배는 가까운 물류 센터에 보관된다. 집에 붙은 쪽지를 가지고 가서 보여줘야 택배 수령이 가능한 불편한 시스템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느리게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는 스페인

그러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스페인 사회는 파격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예전에는 종이로 모든 서류를 다 준비해서 관공서를 방문해야 했지만, 이제는 정부가 발행한 ‘공인인증서(certificado digital)’로 집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볼 수 있게 됐다. 스페인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20년쯤 후에나 이렇게 바뀌었을 거’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페인도 점점 디지털화가 되겠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전체 인구의 약 20%(950만 명)가 65세 이상 노인인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령화 국가다 보니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또한, 스페인 사회에 만연한 원칙주의와 관료주의도 디지털화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사람 냄새 나는 아날로그 감성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은 게 가장 주된 원인이라고 본다.

디지털 사회로의 첫 발걸음을 뗀 스페인 정부는 ‘디지털 스페인 2026’이라는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디지털 혁신을 위해 시민, 기업, 공공기관의 사이버 보안을 강화하고, 국내 기업의 현대화 및 디지털화를 촉진하고자 함이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도 온전히 누군가를 마주하고 인간관계의 따스함과 진실함을 잃지 않으려는 스페인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스페인 특유의 국민성 때문일까? 이 나라에서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아름다운 공존이 가능할 것만 같다.

글쓴이

최지윤 칼럼니스트

최지윤 칼럼니스트는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전공했고, 국외 한국어 교육 사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세종학당(멕시코)’과 스페인 살라망카대학교 한국학과에서 교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스페인어권 국가의 한국어 교육 전문가가 되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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