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의 ‘슬픈 혁명’과 ‘이기적인 영웅’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19)식민지 ‘영웅’, 속물 엘리트로 변질되기까지 왕정에 집착한 개혁파 엘리트들이 외면한 ‘혁명’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비행사 안창남과 자전거 왕 엄복동(오른쪽).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영웅론이 유행했다. 안창남, 엄복동, 손기정 등의 영웅이 유행했던 데에는 서양의 영웅사관과 위인전이 수용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비행사 안창남과 자전거 왕 엄복동(오른쪽).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영웅론이 유행했다. 안창남, 엄복동, 손기정 등의 영웅이 유행했던 데에는 서양의 영웅사관과 위인전이 수용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대한으로 하야곰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랴 하면 능히 이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 최남선

최남선은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의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개월만에 자퇴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던 기회였던 일본유학을 무려 2차에 걸쳐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1908년 11월 귀국하여 <소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소년>은 혁신적인 미디어의 계발을 통해 새로운 한국 건설의 주체인 ‘소년’ 세대의 계몽을 이루려던 최남선의 야망이 담긴 잡지였다. 최남선은 이 잡지를 통해 주로 지리와 역사 관련 지식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유길준이나 장지연 등에 의해 세계 및 조선지리가 상당한 수준으로 저술된 시점이었고, 따라서 <소년>이 다루던 지리역사학엔 그다지 혁신적인 내용이 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최남선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습득한 근대 학문의 방법론, 특히 ‘과학적 사유’를 전면에 내세웠다. ‘과학’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소년>은 분명 다른 잡지에 비해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소년>이 다루던 과학지식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고, 과학에 대한 피상적 사유만으로 전개된 그 논의들은 ‘공리공론’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최남선의 동료들 중 실제로 과학자로 연구를 경험해본 이들은 전무했고, 그에게 과학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들, 예를 들어 돌바크와 디드로 등이 자연과 세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처럼, 일종의 인간정신의 새로운 진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최남선의 계몽주의 속에서 과학은 현실에 뿌리내린 계몽의 도구라기보다는, 식민지 지식인이 도달하기 불가능한 영웅을 소환하는 하나의 단계로 기능하고 있었다.

과학의 힘을 인식했으나 과학의 실천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최남선은 결국 문학이라는 전통적 학문을 통해 세계인식과 계몽을 동시에 이룰 수 밖에 없었다. 이광수도 최남선도 식민지의 계몽을 위해 과학을 동원하려 했지만, 그들 개인의 한계와 더불어 시대적 제한 속에서 결국 문학에 천착할 수 밖에 없었던 셈이다.

최남선은 '소년'이라는 잡지를 통해 신대한의 주축이 될 소년들을 계몽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과학에도 천착했으나, 문학에 심취했던 그에게 과학은 너무나 멀고 희미한 실체였을 뿐이다.
최남선은 ‘소년’이라는 잡지를 통해 신대한의 주축이 될 소년들을 계몽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과학에도 천착했으나, 문학에 심취했던 그에게 과학은 너무나 멀고 희미한 실체였을 뿐이다.

소년에서 ‘영웅’으로

문학을 학문의 종합으로 여기던 최남선의 의식 속에서 과학을 통한 계몽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처럼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대안으로 결국 그는 영웅과 위인이라는 주제에 점점 더 천착하게 된다. 1908년 <소년>에 실린 을지문덕의 이야기 <살수전기>에는 소년들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그들의 신체와 정신이 새로워진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단재 신채호 또한 20세기의 이순신을 기다리며 영웅전기를 계몽의 도구로 사용했고, 최남선을 비롯한 많은 문학적 지식인들은 <소년>을 통해 영웅 중심적인 역사관을 확산시켜나갔다.

‘영웅’이라는 말이 처음 한국 땅에 출현한 것은 대한제국 때의 일이다. 1895년 <한성신보>에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전기가 실린 것을 시작으로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대한제국의 독서계에는 ‘영웅’이라는 단어가 유행했고 수많은 위인전이 출판되었다.

대한제국에서 유행한 초기의 영웅담론은 일본 메이지 시기의 유행을 그대로 답습했는데, 스펜서 식의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물질적 경쟁의 세계관 속에 시대가 만든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잔다르크,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글래드스톤, 워싱턴, 피터 대제, 넬슨 제독, 카부르, 웰링턴 장군 등의 서양 정치가, 군인, 혁명가들의 생애가 대한제국에서 출판되었고 대한제국기의 많은 잡지와 학회지들은 위인전기를 고정적으로 연재했다.

그러나 1905년 청나라 량치차오의 저작들이 수용되면서, 영웅담론의 형태가 변화되기 시작한다. 량치차오는 당시의 청을 국제사회에서 약자의 입장으로 설정했고, 사회진화론적 결정론을 부정하면서 시대가 만드는 영웅이 아닌 시대를 만드는 영웅을 그려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진정한 영웅은 더이상 소수의 ‘유명 영웅’이 아니라, 다수의 ‘무명 영웅’ 쪽으로 기울게 된다. 이미 서양을 따라잡고 유명 영웅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에선 소수의 유명 영웅이 강조되었지만, 사회진화론의 결정론 속에서 ‘유명 영웅’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청과 조선에서는 ‘무명 영웅’의 노력이 강조되었다.

근대초 동아시아의 영웅론 수용을 연구한 이헌미는 당시 유행했던 영웅론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근대초 동아시아의 영웅론에서 영웅 개념은 사회진화론과 내셔널리즘의 영향 하에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근대적 주체의 새로운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론은 사회변혁을 주도할 대안 세력의 출현을 논한 정치 담론이자, 지배의 대상으로 수동적 존재에 머물러 있던 일반 인민에게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주인의식과 참여정신을 불어넣으려는 계몽의 기획이었다.”

무명 영웅들의 입신출세주의

최남선의 영웅론 또한 이런 시대적 조류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최남선이 <소년>을 통해 발표한 초기의 위인전기는 대부분 일본 영웅전기의 형식이었고, 이 속에서 무명의 영웅들은 유명의 영웅을 돕는 조력자에 불과했다. 망국의 시대에 최남선과 <소년>의 영웅은 ‘위인’으로 범주가 조정되어갔고, 잡지 <청춘>에 이르러 영웅신화의 핵심적인 요소인 고귀한 신분과 뛰어난 재능 등은 탈색되고, ‘수신’을 위한 ‘노력’의 가치가 절대화되기 시작한다. 이는 국가 독립을 위한 절대적인 가치가 유명 영웅의 탄생이 아닌, 무명 영웅’들’의 끊임 없는 노력으로 변모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변화였다.

‘독립자존’의 ‘국민정신’을 배양하기 위해 기획되었던 <소년>과 <청춘>의 노력론에서 ‘자기’란 생존경쟁의 단위가 아니라 ‘민족적’ 맥락에서의 자기였다. 이 시기 최남선이 조선의 민중들에게 노력을 강조한 궁극적인 목표는 “국가, 국민, 혹은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의 산물”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회적 맥락을 상실한 ‘노력’만을 강조하는 현실 속의 어른이 ‘꼰대’로 추락하듯이, 최남선의 노력론은 국가 독립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되자마자 개인 입신출세의 방편으로 추락해버렸다.

일본에서 영웅론과 위인전의 유행이 개인의 입신출세의 방편으로 전락해 ‘속물 교양주의’로 전락해간 것처럼, 최남선과 그의 동료들이 위인전을 통해 강조했던 무명 영웅들의 노력론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상황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맥락에서 벗어나자마자,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일본의 ‘다이쇼 교양주의’에서 건너온 식민지 조선의 속물 교양주의는, 이후 경성제국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식민지 엘리트 청년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나간다. 영웅과 위인을 통해 민족을 개조하려던 최남선의 의도는, 국가의 소실과 함께 식민지 청년들에게 “출세와 교양, 그 뜨거운 열망”으로만 남게 되었다.

<속물 교양의 탄생>을 쓴 박숙자는 현대 한국에까지 이어지는 이런 ‘속물 교양주의’의 기원을 식민지 시기 이광수, 최남선 같은 문인들이 축조한 “서구식 교양의 갈급하고 표피적인 수용”으로 잡는다. 식민지 조선에서 ‘세계문학’은 곧 서구문명과 같은 말이었고, 이 시기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던 각종 위인전과 ‘세계문학전집’이야말로 이후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대량으로 배출된 지식인들의 속물 교양주의의 기원이 되는 셈이다.

박숙자는 현대 한국의 속물교양주의의 기원을 식민지 시기의 '서양문학전집의 출판'으로 잡는다.
박숙자는 현대 한국의 속물교양주의의 기원을 식민지 시기의 ‘서양문학전집의 출판’으로 잡는다.

유명 영웅이 아니라 무명 영웅들의 노력을 통해 독립을 이루려 했던 최남선의 소박한 희망은, 이를 이루기 위해 그가 선택했던 영웅론과 위인전이라는 플랫폼이 품고 있던 속물적인 속성 덕분에 입신출세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일본이 조선에 최초의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세우고 의대와 법대를 중심으로 조선의 엘리트들이 탄생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속물 교양주의는 점점 더 강한 엘리트주의로 변질되어간다.

그렇게 교양주의는 입신출세주의와 강하게 일체화되었고, 해방 이후 현재의 한국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이제 현실을 넘어 대학의 총체적 위기와 연결되어 우리 삶으로 들어온 지금, 과학 대신 위인전을 선택했던 최남선과 식민지 시기 문인들의 노력이 결국 도달한 결과는 허탈할 정도로 그들의 의도와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슬픈 혁명, 다시 조선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영웅과 더불어 ‘혁명’이라는 개념 또한 마찬가지의 비극적 결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1895년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는 혁명이란 단어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서양의 사정에 가장 밝았던 유길준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몰랐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서유견문>에 일부러 혁명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지 않은 것이다. 1895년까지 유길준은 조선의 왕정을 그대로 답습한 입헌군주제로 온건한 개혁을 추구하려던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1896년 <만국약사>에 처음으로 ‘프랑스혁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기원 1774년 루이16세 때에 국력이 피폐하고 국채가 파다하니라. 누세로 횡포가 심하여 평민을 침노하매 화란이 끊이지 않으며 또한 근세에 홍유의 저술이 세계에 전파하여 민지점진하니 즉 자주 자유 하는 권리라 군주전제의 하에 굴함과 귀족이 억제함을 싫어하더라. 이때에 미국이 영국을 반대하여 독립함을 꾀하거늘 불란서가 미국을 도와 해외에서 싸우다가 영미 화의된 후에 귀국하니라. 인민이 더욱 민권의 설을 제창하여 사방에 봉기하매 그 화려한 경성이 졸지에 변하야 수라장이 되고 루이16세는 단두대상의 이슬과 같이 사라지며 권위를 자랑하던 귀족 승려는 도살당하고 각 당이 서로 싸워 조야에 인육을 쌓으매 그 잔인함이 역대에 있었던 적이 없으니 불란서혁명이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육’과 ‘잔인함’ 등의 단어로 알 수 있듯이, <만국약사>에 실린 혁명이라는 단어의 어감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이후 1898년 갑오내각이 붕괴하던 시기 출판된 <아국약사>에선 혁명이란 단어가 ‘민란’으로 대체된다. 여전히 조선의 정치인 대다수는 황제 중심의 입헌군주제를 혁명의 최종적 형태로 선호했고, 서양문헌의 번역에 이런 점이 반영된 것이다.

1898년 말 독립협회가 해체되고, 개혁세력은 왕조를 통한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인식변화는 1899년을 기점으로 한 여러 단행본과 신문 지면에서 ‘혁명’이라는 단어의 증가로 나타난다. 급진개혁파의 핵심인물이었던 박영효는 활빈당 운동을 펼치면서 필리핀의 혁명파와 밀접하게 교류했고, 쑨원의 중국 혁명을 모방한 탕무혁명을 선전해나갔다.

이헌미의 말처럼, ”대한제국기 혁명 개념은 조선 왕조가 드러낸 일련의 무능력과 정치적 위기에 대한 비판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으며, “‘혁명’의 문제는 보수파와 개혁파 모두의 관심사이자 온건파와 급진파를 가르는 전선이 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를 돌파할 전략적 이념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조선의 상황은 스스로 혁명이 불가능한 국권상실의 식민지였고,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독립을 위한 폭력 투쟁은 역사 진보의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논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 기사가 매일 조선에 보도되는 가운데, 1909년 안중군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고, 해외 무장독립투쟁 단체들은 ‘한국혁명군’, ‘조선혁명당’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을 실체적으로 개념화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한국적 혁명 프로그램이 탄생했지만, “대한제국에는 혁명이 없었”고, 다만 “혁명의 언어는 면면히 살아남아 역사적 의미의 층위를 더해가며 그 자체로 또 다른 혁명적 현실을 추동”한 셈이다.

무능한 조선왕조의 유산 속에서 조선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혁명과 영웅이라는 개념은 현실에서 실현될 가능성을 상실한 채, 상황에 맞게 변용되었다. 왕정을 청산하고 민본의 공화국을 세우는 혁명의 개념은 왕정에 집착하던 개혁파 엘리트 정치인들로부터 외면받은 동시에, 훗날 무장독립투쟁 단체들에 의해 폭력 투쟁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수용되었다. 또한 영웅이라는 개념은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이끄는 위인의 개념으로 범주가 조정되었다가 이마저도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무명의 영웅들로 재범주화되었고, 이들 무명 영웅들의 노력을 강조하는 ‘자조론’ 쯤으로 수용되었다. 그리고 그 자조론의 논리야말로 국가를 잃은 상황에서 불특정 다수의 민중에게 노력을 강요하면서, 결국 입신출세주의와 교양주의의 기원으로 타락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과학기술의 수용이 불가능했던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은 혁명과 영웅 등의 개념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문인들에 의해 주도된 이런 사상적 계몽운동은 조선을 구하기엔 무력할 뿐이었다. 한국에 영웅론이 수용된 과정을 연구한 이헌미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영웅 없는 영웅론의 수용을 “슬프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무력한 상황 속에서, 최남선과 식민지의 문학적 지식인들은 다시 ‘조선’을 발견하고자 결심한다. ‘조선학운동’은 그렇게 탄생했다.

“한 정치 사회에 영웅이라는 말이 정치적 개념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위기의 징후이다. ‘영웅’이라는 말은 대개 구원이 강렬하게 희구되는 위기 상황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주체가 영웅의 이미지를 쓰고 나타난다는 데에서 근대 초 한국의 실존적 정황이 단적으로 포착된다.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기 직전 한국의 정치담론에서 느껴지는 이 종교적 심성, 뜨거운 애국심에의 호소는 위험하다기보다 슬프다. 그 종교적 심성은 그것을 실체화시켜줄 어떤 정치 주체와도 강력하게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족도, 국민도 거기엔 없었다. 영웅은 오지 않았다.”- 이헌미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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