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속의 목신(牧神)과 드뷔시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목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와 음악

지난 글에서 말러의 3번 교향곡에 대해 이 교향곡의 내러티브가 목신 ‘판’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했다. 목신(牧神)은 원래 전원에 사는 초목과 목동의 수호신이다. 영국 시인 존 밀턴도 대표작 <실낙원>에서 “만물의 판은 미의 여신들이나 계절의 여신들과 함께 춤추며 늘 봄을 이끈다”라고 노래한 바 있으니, 과연 대자연의 생명 활동을 이끄는 신으로 추앙받을 만하다.
신화 속의 ‘판’은 얼굴은 사람이지만 머리에 작은 뿔이 나있고,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반인반수의 악동(惡童) 무리인 사티로스와 동일시되곤 하기 때문에 그의 행실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문도 따른다. 디오니소스의 시종답게 주색(酒色)을 밝히고, 님프들과 어울려 춤추며 노는 것을 좋아하고, 또 예쁜 여자들만 보면 달려드는 통에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여자들을 보고 ‘패닉(panic)’이란 단어가 생겼다는 둥 말이다.
‘판’은 아폴론(태양, 음악, 궁술의 신)과 뮤즈(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총 9명의 여신들)에 이어 음악과도 연관이 깊다. 작은 하프 모양의 리라를 들고 있는 아폴론과 팬파이프를 들고 있는 판이 서로 음악 경쟁을 했다는 미술작품도 있다. 판이 팬파이프를 들고 다니게 된 사연은 이렇다.
판이 숲 속에서 님프들이 노는 장면을 훔쳐보던 중, 시링크스라는 님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를 차지하고자 달려든다. 그러나 그의 흉측한 모습에 놀란 시링크스는 달아나고, 연못가에 다다라 다른 님프들의 도움으로 갈대로 위장해버린다. 뒤따라온 판은 시링크스의 옷자락을 덥썩 잡았지만, 순간 손에 잡힌 것은 한줌의 갈대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서다가, 이 한숨이 갈대 속을 지나면서 빚어내는 가냘프고도 애끓는 소리를 들었다. 판은 그 아름다운 소리에 반하여 “그대와 나는 영원히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로 이야기를 나눌 것이오” 라고 속삭이며, 길이가 각기 다른 이 갈대를 밀랍으로 나란히 붙인 후에 이 악기를 ‘시링크스’라고 불렀다. 이 피리는 오늘날까지 시링크스 혹은 판의 피리 ‘팬파이프/팬플루트’라 불린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는 고대로부터 다양한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어온 판을 주인공으로 몽환적 분위기의 시 ‘목신의 오후(l’près-midi d’n faune)’를 지었다. 총 110행으로 이루어진 긴 시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 나른한 여름날 오후 시칠리아 해변 숲속 그늘에서 졸고 있던 목신 ‘판’은 아련한 꿈 속 같은 상태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목욕하는 요정들을 발견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분할 수 없지만, 저편의 가물거리는 자태에 마음이 끌려 샘가에서 보았던 한 쌍의 요정을 떠올린다. 목신은 어떤 힘에라도 이끌리듯 달려가 두 요정을 그대로 품에 안아 장미 넝쿨로 뛰어들어 헝클어진 그녀들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출 때, 몽롱한 관능적 희열이 온 몸에 퍼진다. 그러나 환상의 요정들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밀려오는 권태를 망연히 바라보며 목신은 에로틱한 몽상을 해보기도 하고 한낮의 작렬하는 태양을 향해 입을 벌려 넋을 잃기도 하고 갈증을 느끼며 모래 위로 쓰러진다. 그리고 목신은 또다시 오후의 고요함과 그윽한 풀냄새 속에서 잠들어버린다. ...”
드뷔시의 음악으로 재탄생한 판의 전설
당대 가장 프랑스다운 작곡가로 꼽히는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위의 시에서 받은 감흥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는 초기엔 쇼팽과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독일식 낭만주의의 과도한 감정표출과 전통음악 양식을 답습하는 것에 염증을 느끼게 되자 “음악을 고정된 형식에 끼워 맞춰서는 안 되며, 음악은 색채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며 자신만의 음악어법을 찾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상징주의 시인과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음악에 표현하게 된다. 명확한 선율이나 화성감보다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 안개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의 음악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종래의 장·단조와는 다른 교회선법, 5음계 등과 함께 반음계적 화음을 적극 활용하였고, 무엇보다 음색의 미묘한 변화에 중점을 두어 색채와 뉘앙스가 풍부해진 음악을 만들었다. 드뷔시 음악의 신비롭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현대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찬사까지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작풍은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Prélude à l’aprésmidi d’un faune)>에 본격적으로 구현되었다. 애초에는 이 시를 바탕으로 전주곡, 간주곡, 끝 곡 등 세 곡을 쓸 계획이었으나 전주곡만 완성하였다. 시인에게 이 곡을 들려주자 ‘미처 예상치 못한 경이로운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1894년 12월 22일 파리에서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의 상징적인 존재로 떠오르게 되었다.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는 빛에 의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대상의 색과 모습을 포착하여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인상파의 화풍과 드뷔시의 음악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드뷔시 자신은 인상주의 음악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음악은 회화의 인상주의를 음악으로 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가져다준 인상의 기억을 통해서 음악으로 변용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인상주의보다는 합리적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성, 환상, 분위기, 상상력의 창조적 작용 등을 중요하게 여긴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와 같은 상징주의에 더 가깝다고 여겼다.
상징주의 시와 만난 음악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작곡가의 독자적인 음악성향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첫 관현악 작품으로, 시의 분위기를 따라가는 자유로운 환상곡풍으로 되어있다. 플루트의 독주가 모호한 조성의 신비로운 선율을 들려주며 시작하고, 이어 오보와 클라리넷 같은 목관악기들이 주 선율을 이어 받아 새로운 선율로 변주해 간다. 이 때 꿈결인지 현실인지를 오가는 듯, 나른한 오후의 바람결인 양, 하프는 조용하게 아르페지오(분산화음)를 들려준다. 주선율은 몇 차례의 작은 클라이맥스를 거쳐 이윽고 전체 관현악이 최고조의 절정을 연주한 후에 다시 나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되돌아가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드뷔시의 작품 중에 판과 연관이 있는 <시링크스>라는 곡도 있다. 1913년 연극 <프시케>의 부수음악으로 만든 짧은 길이의 플루트 독주곡인데, 앞의 목신 전주곡에 나오는 플루트의 주선율을 확장한 듯 처음에는 신비로우면서도 적막한 느낌의 선율로 시작한다. 점차 플루트의 화려한 기교와 생기 있는 리듬이 더해지며 이국적인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짧지만 드뷔시 음악의 에센스가 잘 녹아있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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