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정치초년생 박지현을 위한 변명
[박정인의 언론비평] 최선을 다해 역사의 교훈을 말한 박지현 노회한 민주당 뱃지들이 이를 외면해 민주당은 ‘영혼 없는’ 젊은이를 대변하는가
우리 젊은이들이 마주하는 현실
소울리스좌. 최근 조회수 1천8백만회를 넘긴 유튜브 깜짝 스타 김한나씨에게 팬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눈빛에 영혼은 없어 보이고 에너지는 최소한만 쓰지만 맡은 일은 똑바로 해낸다는 뜻이다. 용인 에버랜드 아마존 익스프레스에서 안내를 담당하는 23살 여자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동영상을 보면 “다 젖습니다, 아마존 조로존존..존존존”하면서 리듬에 맞춰 안내 멘트를 쏟아내는데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온 몸에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멘트를 듣는 사람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끌림이 있어서 필자도 동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지금도 글을 쓰면서 두세 번을 반복해 들었다.)
소울리스좌 김한나씨는 에버랜드에서 근무한지 4년이 넘었지만 기간제 비정규직으로 3번 퇴사하고 3번 재입사했다. 기간제 법이 2년 이상 일한 기간제 노동자의 경우 무기계약직으로 본다고 규정하기 때문에 대부분 기업은 기간제 근로자들과 10개월 계약을 한다. 연장계약을 해도 20개월이다. 2년 넘게 계약을 유지해 정규직이나 마찬가지인 무기계약직이 되는 걸 피하려는 계산이다. 에버랜드에서는 이들 기간제 근로자를 ‘캐스트’라고 부른다.
소울리스좌처럼 홍보 대박을 가져다 준 직원도 퇴사와 재입사를 반복하는 불안한 취업상태를 피해가지 못한다. 이게 우리 젊은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눈에 힘을 주고 온 몸을 던져 일해봐야 돌아오는 과실은 초라하다 보니 요즘 표현대로 오랜 기간 ‘존버’하려면 에너지 절약형 소울리스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울리스 대신 파이터를 선택한 박지현
비슷한 또래 젊은이지만 영혼에 바짝 힘을 주고 에너지를 쏟아내며 파이터가 되는 길을 선택한 이가 있다. 지난 6월 2일 민주당 비대위원장직에서 물러난 26살 박지현이다.
96년 강원도 원주생, 한림대 언론방송융합미디어학과 졸업, 당초 꿈은 법률기자.
박지현은 ‘추적단불꽃’이란 이름으로 2019년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잠입 취재해 폭로하면서 세상에 존재감을 알렸다. 보복이 두려워 얼굴은 가렸지만 검찰 수사에 참고인으로 나서는 등 대중에게 사건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라는 제목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현실과 제안을 담은 책을 내기도 했다.
박지현은 민주당 권인숙 의원의 권유로 처음 가면을 벗고 정치권에 얼굴을 공개했지만, 배경에는 이재명 대선 후보가 있었다. 2020년 경기도 디지털 성범죄 대응 추진단에 영입한데 이어 올해 1월 대통령 선거 선대위에서 역할을 맡도록 주선한 당사자가 이재명 후보다. 3월13일 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맡게 된 경위도 같은 맥락이라고 알려져 있다.
여성, 지방대, 무직, 더구나 뒤를 돌봐줄 영향력 있는 부모님도 두지 못한 26살 박지현은 소울리스로 가기에 충분한 조건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파이터를 선택했고 지금까지 쉼 없이 난관을 향해 주먹을 뻗으며 살아왔다. 어린 나이에 자꾸 자리를 얻으니까 욕심이 생겨서 그랬을 거라는 의심도 부정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의 최선에 대한 대가는 지금까지 급부상 못지 않은 급추락의 연속이었다. 이재명 후보는 대선에서 떨어졌고, 비대위원장을 맡은 뒤에는 ‘내부총질이나 한다’거나 ‘역대급 패악질’이라는 욕을 먹었는가 하면, 급기야는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보수 정치인 전여옥은 선거에 진 민주당의 상황에 대해 “예상대로 아기복어가 다 뒤집어 쓰고 물러났다”고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기복어는 박지현에게 보수쪽에서 비아냥대듯 지어준 별명이다.
과연 박지현은 실패한 것일까? 철없이 좌충우돌하다가 선거 패배의 원인제공자가 된 것일까? 지방대 언론관련 학과 출신 여자가 B급 언론사 인턴기자나 중소기업 비정규직 직원을 전전하면서 ‘소울리스’하게 살아가는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온 것일까? 무엇보다, 민주당은 박지현 때문에 뭘 손해 본 걸까?
박지현은 과연 무엇을 잘못했나
우선 박지현에게 날아가 꽂힌 민주당 안팎의 비난들 가운데 가장 흔한 것부터 짚어 보자.
‘어리고 정치초년생이라 말실수가 잦고 횡설수설한다’는 게 1번이었다. 하지만 이 비난은 모순이다. 이재명이든 누구든 박지현을 거대 야당 대표나 다름없는 자리에 앉힐 때는 ‘어리고 정치초년생’이라는 사실을 장점으로 꼽았을 것이다. 40대 후반의 남자 검사가 n번방 사건을 파헤쳤다면 당 비대위원장을 맡기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나이 어리고 정치 때도 안 묻은 청년을 혁신의 얼굴로 내세워 보자는 계산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신선함 때문에 비대위원장 자리에 올려놓고는 지나치게 신선해서 날것 냄새가 너무 난다고 흔들어대는 게 바로 모순이다. 노련한 당대표들도 횡설수설이나 말실수는 흔히 한다. 역대 최악의 말실수 참사 가운데 하나가 2004년 총선 때 터져 나왔었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노인들은 (투표하지 말고) 집에서 쉬셔도 되고…”라고 했다가 호된 역풍을 맞고 비례대표 후보에서 물러났을 때 그는 어린 정치초년생이 아니었다. 박지현의 발언들은 적어도 노인들 투표장에 나오지 말라는 말과 비견될 수준은 아니었다고 본다.
박지현을 감싸기 위해 뜬금없이 소환된 정동영 전 의장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리고 이제부터는 개별 이슈에 대한 박지현의 발언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어린 정치초년생 비대위원장 박지현에게 안티가 생기기 시작한 단초는 안희정 상가에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근조화환이었다. 박지현은 문 대통령과 민주당 정치인들이 화환을 보낸 걸 두고 “피해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한 민주당 의원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희정 잘못한 것 당연하지만 평생 동지 부친상에 화환도 못 보낸다는 게 말이 돼? 애가 (박지현이) 아직 철이 없으니 인간관계의 도리도 모르는 거잖아.”
물론 정치적 동지나 오랜 친구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부친상에 화한도 보내지 말라는 논리는 과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만약 박지현의 발언 없이 안희정씨 상가에 화환과 문상이 이어졌다는 사실만 알려졌다면 어땠을까? 박지현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유권자들 상당수가 민주당 아직 정신 못 차렸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나마 박지현의 발언이 균형을 맞춰줬다는 게 맞아 보인다.
박지현이 조국 전 법무장관 부부에게 다시 한번 대국민사과를 요구하면서 안티 박지현 전선은 확대됐다. 친 조국 세력은 박지현을 못된 아이 수준으로 규정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적어도 박지현의 사과요구는 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 첫 내각 후보자들의 인사검증에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게 한 방패가 됐다고 본다. (공격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조국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면서 한동훈이나 정호영을 공격했다면 내로남불의 전형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박지현은 이어 ‘586 용퇴론’을 들고 나와 논란에 불을 붙였다. 당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박지현의 발언을 ‘내부총질’이라고 격하게 비판하는 의견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586 용퇴론이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586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문재인 정부 시작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꾸준히 나온 단골 메뉴였다. 가장 최근에는 올초 대선국면에서 송영길 전 대표가 “586 기득권이 광야로 나설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막내딸이 말하면 내부총질인가
송영길 전 대표가 말할 때는 침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이 왜 같은 얘기를 한 박지현에게는 집단 괴롭힘 수준의 공격을 퍼부었는지 의아하다. 집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아버지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훈계이고 막내 딸이 하면 내부총질일까? 잘 모르겠다.
부적절한 발언이나 성비리 의혹이 제기된 최강욱, 박완주 의원 징계 문제와 관련해 박지현에게 쏟아진 비난들은 더욱 황당했다. 선거 한복판에 소속 국회의원의 언행으로 여성 유권자들이 등을 돌릴 위험이 생겼으면 철저히 조사해서 빠르게 조치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지고 있는 선거인데! 박지현은 그래서 빠르고 단호한 조치를 언급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놓고 2030 여성들인 이른바 ‘개딸’들이 박지현에게 돌을 던졌다는 소식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지현을 향한 공격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검수완박 속도조절론 논란이었다. 박지현은 4월 초부터 검수완박 입법에 대해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검수완박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지방선거에 지고 신뢰를 잃지 않을까 걱정된다”거나, “과연 우리 국민의 최대 관심사가 검찰 문제인지 자문해 봐야한다”면서 당의 입법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었다.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게 문제였다.
당이 한 귀로 흘려버린 박지현의 주장은 예언이 됐다. 검수완박은 결과적으로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중대 원인에 꼽혔다. 위장탈당이라는 헌정사에 유례가 없는 꼼수까지 동원해 몰아부친 입법이 선거에 악재가 될 줄을 아무도 몰랐을 리가 없다. 박지현만 선견지명이 있었던 게 아니라 박지현만 입을 열었을 뿐이다. (몇몇 의원들이 한마디 했다가 꼬리를 내리기는 했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당이길 바랬을 뿐!
민주당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입법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역풍을 맞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2004년 총선에서 노인폄하발언의 후폭풍을 헤치고 가까스로 과반 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가 등등해졌다.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을 비롯해 당의 오랜 염원이던 4대 개혁입법 추진에 올인했다. 하지만 민생을 외면한 입법 드라이브는 지지율 급락이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민생은 어떤 개혁과 혁신보다 우선한다는 걸 선거의 역사가 입증한다. 역사의 교훈을 어린 박지현이 말하는데 민주당의 노련한 뱃지들이 외면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박지현이 싫은 사람들은 심지어 5.18 행사에서 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외우지 못한 듯 악보를 본 것을 두고도 비난을 퍼부었다. 이건 질 낮은 인신공격이다. 정치인이 가사를 다 못 외운다고 비난 받을 노래가 있다면 애국가 1절 뿐일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무리 소중한 노래라 하더라도 애국가 급은 아니다. 더구나 박지현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자주, 흔히, 열성적으로 불러왔던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
박지현은 지방선거의 패색이 짙어가던 5월24일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팬덤정당 대신 대중정당으로 탈바꿈 하고, 약속을 지키는 정당. 우리 편 잘못에 더 엄격한 정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선언은 곧바로 윤호중 공동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당 지도부로부터 퇴짜를 맞았고, 자신을 발탁한 이재명 후보측의 팬덤으로부터는 뭇매를 맞아야 했다. 며칠을 버티던 박지현이 결국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거 결과를 대충 예측할 수 있었던 이가 필자 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 박지현의 꿈은 소박했다. 당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행동하기를 바랬을 뿐이었다. 국민 눈높이는 박지현이 꾸며낸 것도 아니었다. 검수완박 속도조절이나 586 퇴진 같은 현안에 대한 여론조사를 통해 다 알려져 있었다. 사실을 말하는 박지현에게 당이 ‘그 입 다물라’고 호통쳤을 뿐이다.
박지현을 이 지경으로 만든 모습을 보면서 자기 당 청년대표의 꿈도 챙겨주지 못하는 정당이 소울리스한 삶에 지친 청년들의 미래를 어떻게 일궈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민주당의 가장 큰 잘못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살아남으려면 영혼 없이 대세에 따라야 한다’는 깨달음을 남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가장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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