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의 전쟁, 한동훈의 타협

[박정인의 정치평론] 김종필, 유승민을 연상시킨 한동훈 책까지 출판되며 인기 상한가 누려 칼만 휘두른 韓, 정치는 타협의 마술인데 대통령과 어떤 타협할지가 ‘최대 승부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이 지난 29일 오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실에서 이재명 대표를 예방하고 인사를 나눴다. 사진=연합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이 지난 29일 오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실에서 이재명 대표를 예방하고 인사를 나눴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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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도 ‘신언서판’ 화려했다

5.16 군사 쿠데타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JP (김종필)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단연 ‘스타일리쉬한’ 엘리트였다. 서울대를 나오고 육사 8기로 임관한 뒤 미 육군 보병학교에서 연수한 학력이 그랬다. 여기에 유려한 언변과 잘 생긴 외모까지 신언서판이 따로 없었다.

JP는 명실상부한 쿠데타의 기획자였다. 그가 계획하고 그가 추진한 대로 쿠데타는 진행됐다. 집권 이후에도 중앙정보부 창설을 비롯한 굵직한 국가개조 플랜을 도맡았다. 심지어 야당을 설득 회유하는 일마저도 그의 몫이었다.

1962년 전권대사 자격으로 한일협정에 나선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사진= 연합뉴스
1962년 전권대사 자격으로 한일협정에 나선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사진= 연합뉴스

박정희 정부 초기 JP의 권유로 중앙정보부 창설에 참여했던 고(故) 양순직 전 한국자유연맹총재는 그 시절의 JP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설득력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야당의 중진들도 그와 30분 정도 대화하고 나면 그의 논리와 생각에 설득되었다.” (신동아 2002.05)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윤석열 정부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내고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한동훈의 이미지가 JP와 중첩되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다. 심지어 고교 동창인 배우 이정재와의 식사자리가 화제가 되는 것마저 예술인, 연예인과 교류를 즐겼던 JP의 느낌을 닮았다.

유승민은 겸손했고 상냥했다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비례대표 초선 의원인 유승민에게 대표 비서실장을 맡겼을 때 당 안팎에서는 의아해 하는 시선이 많았다. 이회창 계로 정치에 입문했고 쓴소리 잘하는 경제학자 출신이 박근혜와 어떤 인연일까 궁금해했다. 원조 TK 출신이라는 것 말고는 접점이 없었다. 박근혜 대세론에 기대서 한 자리 해보겠다고 몰려든 수많은 구세대 보수 정객들과는 달랐다.

유승민은 비서실장을 맡은 지 1년이 채 못 돼 대구 동을 재선거에 떠밀리 듯 출마했다. 상대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측근 중 측근인 이강철 청와대 수석. 아무리 TK라도 지역발전을 생각하면 민주당 정권실세에게 마음이 기울기 마련이다. 선거 시작 전 여론조사에서 이강철은 유승민에게 더블 스코어로 앞섰다.

하지만 결과는 유승민의 승리. 박근혜는 이번에도 ‘선거의 여왕’ 타이틀을 지켜냈다. 이 시절 유승민은 기존 보수와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위스컨신대 박사 경력에 말이 신선하고 생각의 폭이 넓다고 받아들여졌다. 때로는 자신감이 넘치면서 때로는 겸손하고 상냥했다.

한동훈의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등판은 유승민의 대구동을 출마를 연상하게 한다. 위기의 당을 구하는 잔다르크 역할이다. 지역구 후보와 당의 리더라는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당이 풍전등화 앞에 놓여 있다는 점과 최측근이 구원투수로 나섰다는 점이 일치한다.

'73년생 한동훈' 책표지.
‘73년생 한동훈’ 책표지.

<73년생 한동훈>이 말하는 한동훈

한동훈에 대한 보수 진영의 관심은 압도적이다. 비대위원장 임명을 예상이라도 한 듯 최근 그를 소재 삼은 책이 출간돼 화제를 모았다. <73년생 한동훈>. 부제가 ‘보수정치의 복원과 대한민국의 미래’다. 제목에는 이름이, 띠지에는 얼굴이 큼지막하게 인쇄돼 마치 보수정치의 복원과 나라의 미래를 한동훈이 다 짊어진 것 같다.

책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저자 심규진 스페인 IE대학 비즈니스 스쿨 조교수는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 출신이다. 한동훈 찬양과 보수집권의 당위성 설파에 주저함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의 논리는 그다지 치밀하진 않다. 막연한 인상과 편향되고 기대섞인 전망을 300쪽 넘게 나열했고, 어법이 안 맞는 문장도 눈에 띠었다. 하지만 책이 팔리는 부수는 내용이 실한지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연말연시 모임에서 건강과 자녀와 재태크 얘기 다음으로 <73년생 한동훈>이 등장할 정도의 관심이면 된다.

저자는 한동훈의 매력을 “쿨하고 세련된 능력주의”로 표현한다. 기성 정치권의 지역주의, 파벌주의, 586 기득권, 부정부패, 논리없이 수사(修辭)만 가득한 화법 같은 것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5.16의 JP나 정치 초년 시절 유승민과 비슷한 이미지다.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능력주의에 대한 분석에 있다. 저자는 한동훈의 능력주의와 같은 흐름에 이재명의 능력주의를 배치한다. 이재명도 스스로 쌓은 실력으로 기존 정치질서를 깨려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 요소를 갖췄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재명의 능력주의를 “싸구려 능력주의”라고 폄하한다.

한동훈의 능력주의가 쿨하고 세련된 이유가 “촌스러운 짠내와, 동정과 눈물을 요구하는 신파가 없는 점’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노무현, 이명박, 이재명식의 자수성가 스토리가 없고 “유복한 환경에서 반듯한 매너를 체화한 듯 보이는 배경”이 돋보인다는 뜻이다. 여야 진영을 떠나 이런 식의 가치관은 곤란하다.

방패를 버리고 창을 들다

어쨌든 보수진영 내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관심을 받으며 등판한 한동훈의 초반 성적은 괜찮아 보인다. 취임 일성이 불출마 선언인 점부터가 그렇다. 모르는 사람은 “그래도 리더가 험지 출마 선언하고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야 뒤에서 따라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원외 비대위원장은 당이 선거에서 지면 그 날로 짐 싸서 떠나야 한다. 정치 기반이 없는 한동훈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자기가 총선을 지휘하면서 출마하지 않겠다는 건 그나마 비좁은 퇴로를 스스로 불사르겠다는 뜻이다. 이기는 것만이 살 길이다. ‘사즉생(死即生)’을 선택한 만큼 후보 공천의 잣대를 더욱 엄격하게 다룰 수 있게 됐다.

불출마 선언에 더해 초반 성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된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은 취임 입장 발표의 톤과 색깔이다. 집권 여당보다는 야당의 비대위원장 취임 연설에 가까웠다. 시작부터 “중대범죄자인 이재명 대표와 개딸 전체주의 세력, 그리고 운동권 특권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겠다는 투지를 불태웠다. 집권 여당의 고전적인 무기인 ‘방패’를 버리고 ‘창’을 들겠다는 선언이다.

보수 진영을 향해 ‘지금이 한가하게 성을 지킬 때가 아니라 성 밖에서 공격해 들어가야 할 처지’라는 경고다. 다른 한편으로는 총선이 ‘정의의 전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는 의도다. 야당 대표를 중대범죄자로 규정한 만큼 총선은 여와 야의 경쟁이 아니라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돼 버렸다. 더구나 아무리 야당 대표의 지지자라도 유권자들을 ‘전체주의 세력’으로 몰아세운 건 관례를 여러 단계 깬 공격이다.

말이 간결하고 지향점이 분명하면 공감도가 높아진다. 진보 진영 인사들의 이른바 ‘사이다 발언’에 비교되던 보수 인사들의 논점 흐린 발언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타겟 잘 잡은 것처럼 보이는 전략

또다른 성공요인은 타겟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이들을 겨냥한 맞춤형 전략을 내세운 점이다.

첫째, “건전한 경쟁을 보장하겠다.” 조국사태로 드러난 진보귀족의 이중성을 겨냥한 전략이다.

둘째, “모든 특권을 배제하겠다.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사람만 공천하겠다.” 이재명 대표와 586을 겨냥한 약속이다.

연설을 들어 보면 국민의힘이 상대할 적은 민주당 전체가 아니라 이재명 대표와 586 운동권으로 좁혀져 있다. 비명계를 굳이 적에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소모전을 피하고 중도층의 좌향좌 결집을 막으려는 의도가 읽힌다. 이 점은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 이재명 대표와 문재인 전 대통령 양측을 적으로 삼아 전선을 확대시킨 실수에서 배운 것 아닌가 싶다.

한동훈의 전략은 민주당에게 부담이다. 김건희 특검법을 앞세워 파상공세를 펴려는데 방어 대신 역공에 나서겠다니 전선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를 기대했는데 “당신들은 더 하잖아”가 나온 셈이다.

물론 한동훈의 국민의힘이 대세를 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거구도는 여전히 민주당에게 유리하다. 대통령 부인이 ‘디올 백’을 거리낌 없이 받은 게 동영상으로 찍혔는데 함정 취재에 당했다고 면죄부를 줄 유권자는 흔치 않다. 경제는 총선까지 내리막 길이 예상된다. 대통령 지지율은 조금 나아졌다고 해봐야 30% 후반에서 40% 초반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준석은 결국 당을 나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

한동훈의 최대 약점은 ‘타협’이다

악조건 속에서 한동훈이 당을 총선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쿨하고 세련된 능력주의’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필이면 그 무엇이 평생 검사출신, 심지어 엘리트 특수부 검사출신 비대위원장에게 기대하기 가장 어려운 조건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바로 ‘타협’이다.

선거를 앞두고 모든 당은 쇄신을 외친다. 젊은 피를 수혈하고, 당을 새롭게 정비하고, 국민의 뜻과 거리가 있는 인물은 과감히 쳐내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결국 선거가 끝날 때까지 당 지도부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타협이다. 득표력을 가진 개인, 세력과 끊임없이 타협해야 한다. 말로는 쇄신을 외치면서 부패한 인물을 공천해야 할 때가 있고, 젊은 피를 강조하면서 5선 원로에게 꽃길을 열어줘야 할 때도 있다.

한동훈도 타협을 피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한동훈에게 타협이란 스스로를 겨누는 ‘비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쿨하고 세련되게’ 주장했던 모든 것들에 반하는 타협을 할 때 그의 리더십과 인기는 무너질 수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 것이다. 한동훈에게 우호적인 언론도 한동훈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다 말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발견되면 곧바로 비판할 게 분명하다.

‘권력자의 최측근’ 계보에서 한동훈의 대선배인 JP는 타협을 택했다. 권력의 2인자가 됐지만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조여드는 권력의 압박에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목숨 걸고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이 타협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의 유신과 타협했고, 신군부와 타협했고, YS, DJ와 타협했다. 타협했다 쫓겨 나기를 반복하면서도 다시 타협한 덕에 평생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누렸다.

또다른 ‘권력자의 최측근’ 유승민은 대통령과의 타협에 약했다. 집권당 원내대표로 정부 정책을 정면 비판하다가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자 낙인이 찍혀 정치 방랑객이 됐다. 탄핵 이후 바른정당을 거쳐 당에 다시 복귀하고서도 여전히 배신자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에서 신념을 지키려고 타협하지 않는 대가는 혹독하다.

타협한 JP가 옳았을까. 타협하지 않은 유승민이 옳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정치에서 타협의 무게가 무겁다는 건 분명하다. 선거전의 사령관은 심지어 전장 곳곳에서 적과도 타협해야 한다.

타협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장 어려운 타협이 자기 사람을 총선에 더 많이 내보내려는 ‘1인자’ 대통령과의 타협이다. 타협을 거부할 수도 없고, 무조건 뜻을 받들 수도 없다. 진박 감별사 논란까지 벌어졌던 20대 총선이 그 사례다. 지나치게 대통령의 뜻을 받들었던 공천이 새누리당 참패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 부분이 한동훈에게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포인트일 것이다.

한동훈은 평생 싸워서 이겼다. 검사 시절 피의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 지경으로 수사를 해서 ‘조선제일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는 야당 의원들과의 논쟁에서 번번이 이겨 명성을 얻었다. 당의 비대위원장이 되고 나서도 적을 분명히 규정했다. 다음 순서는 공천이다. 친구와도 타협할 것 같지 않은 한동훈의 공천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글쓴이

박정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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