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평양랭면 입니다
[박기찬의 말랑고소한 북한 이야기] ‘평양랭면’ 1인칭 관점으로 다시보는 2018년
제비꽃과 개미, 주인공은 누구?
보라색의 조그만 제비꽃은 매우 특별한 영양물질을 만들어서 씨앗에 묻힌다. ‘엘라이오솜’이라고 불리는 이 노란색 젤리는 고지방 고단백에 비타민도 들어있는 영양제다. 개미는 씨앗을 개미굴로 가져가서 그 영양물질을 애벌레들에게 먹이고, 씨앗은 밖에 버리게 된다.
그렇게 하여 제비꽃은 그 씨앗과 함께 멀리 멀리 퍼져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개미일까, 제비꽃일까. 아니면 제비꽃 씨앗 그 자체일까.
뜨거웠던 2018년의 주인공은?
2018년에 남북 정상회담이 3번, 북미 정상회담이 1번 열렸다. 전 세계 언론이 한반도를 집중적으로 비춘 건 물론이고 온 국민의 눈과 귀는 판문점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쏠렸다.
어느 정도였을까? 뮤지컬을 기획 운영하는 필자의 후배는 그해 봄에 투자한 공연이 폭망하여 수 억원을 날렸다고 하소연했다. 당시에는 어떤 이벤트도 시민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었다고 한다. 2018년 봄에 있었던 남북, 북미, 두 정상회담은 모든 이슈와 관심을 한꺼번에 빨아들이는 전대미문의 ‘블랙홀’이었던 것이다.
4년 전인 2018년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세 명의 지도자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였을까? 두 명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 역사 속의 인물이 되었다.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계속 영향력을 발휘할 ‘문화적’ 아이콘으로서, ‘평양랭면’이 진짜 주인공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평양랭면’의 1인칭 관점에서 뜨거웠던 2018년을 재구성해 보았다.
내 이름은 ‘평양랭면’입니다
저는 ‘평양랭면’입니다. 남쪽 사람들은 나를 평양냉면이라고도 부르지만, 좀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 ‘평양랭면’이라고 할게요. 저는 오랜 세월 한반도에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만, 2018년은 정말 특별한 해였어요.
그 해부터는 온 나라에 나를 만들어 파는 식당들이 수없이 새로 만들어졌고, 이제는 가정식으로 간편하게 포장 배달하는 사업까지 번창하고 있더라구요.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는지 2018년 일들을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백지영과 레드벨벳, 그리고 나를 둘러싼 논쟁
2018년에 들어와서, 나 ‘평양랭면’을 가장 먼저 화제거리로 만든 것은 4월1일 평양을 방문한 ‘봄이 온다’ 남측예술단이었죠.
“서울 평양냉면 맛이 아니야. 맛이 좀 기품이 있어.” 가수 백지영은 흰색 턱스크에 커다란 색안경을 낀 채 저를 맛보고는 브라보 박수를 쳤어요. 한그릇을 다 먹고 나서 말했죠. “평양냉면이 공연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대 이상이에요.”
가장 많은 관심을 끌었던 걸그룹 ‘레드벨벳’은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동평양대극장에서 ‘빨간맛’을 공연했죠. 다음날에는 옥류관에서 평양랭면을 먹었구요. 그런데 전혀 뜻밖의 논란이 펴졌답니다. 확실히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옥류관의 ‘평양랭면’이 나올 때, 식초와 겨자, 그리고 다대기 양념이 쇠젓가락과 함께 나왔는데...
이것이 남한의 소위 ‘평양냉면원리주의자’ 또는 ‘평냉힙스터’라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고 합니다. 이미 남한에서 견고하게 형성되어 온 평양냉면 매니아들은 나름의 원조 내지 본토의 맛을 고집한다고 해요. 순수한 국물 맛을 위하여 양념을 넣지 않는 건 물론이고 쇠젓가락을 쓰지 않는가 하면 평양랭면을 먹는 순서조차 철저히 지켜 왔다고 하네요. 결국 레드벨벳이 먹은 옥류관의 나를 보고 큰 충격을 먹은 거죠.
2002년에 평양을 방문해 공연했던 가수 최진희는 “16년 전에 비해서 양념이 좀 강하지만 그래도 맛있다”고 평가했어요. 결국 모든 음식은 세월이 흐르면 맛도 따라 변한다는 평범한 얘기로 이 논란도 점차 수습되지 않았을까요? 오랜 기간 서로 방문조차 못한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안타까운 해프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4월 27일은 정말 역사적인 날...
2018년 4월 27일. 그날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일이 벌어졌어요. 물론 저 ‘평양랭면’에게도 4월 27일은 역사에 큰 획을 긋는 하루였지요. 역사상 최초의 사건들이 있었지요. 어떤 이들은 북한 최고지도자로서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 분계선을 넘어 간 것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겠지요.
더 재밌는 건, 저 ‘평양랭면’이 남북 분계선을 넘어서 배달된 역사상 최초의 음식이 됐다는 겁니다. 옥류관 최고 요리사들이 제면기를 직접 북측 통일각에 가지고 와서 면을 뽑고 평양랭면을 만든 다음에, 직접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의 만찬장으로 배달했어요. 사람들은 역시 우리는 ‘배달의 민족’이라며 웃었답니다.

누구도 예상 못한 ‘평양랭면’ 애드립
문재인, 김정은 두 정상이 정상회담에 앞서 전세계로 생중계되는 첫 발언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소위 ‘빵 터지는 한마디’가 나왔습니다. 저 ‘평양랭면’과 관련된 김정은 위원장의 애드립이었죠. “어렵사리 평양에서부터 평양랭면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통령께서 편한 마음으로 멀리서 온...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
순식간의 일이었지요.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 이 한마디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전세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빵 날려 버린 거지요. 이날 서울의 냉면집은 냉면을 먹으려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후로도 나 ‘평양랭면’의 인기는 계속 고공행진을 거듭하게 됐어요.
BBC, 불붙은 ‘평양랭면’ 소식을 전했다
BBC는 그날 “코리안 정상이 냉면 열풍에 불을 질렀다”는 제목의 뉴스를 전세계에 타전했어요. 헤드라인 아래 굵은 글씨로 이렇게 요약했더군요. “김정은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건너 간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열풍을 일으킨 것은 평양랭면에 던진 애드립 한마디였다.”
BBC는 겉보기에 외교적으로 중요한 발언이 전혀 아니었지만,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는 남한 사회를 들썩이게 하고 평양랭면에 대한 열풍에 불을 질렀다고 했어요. 그날 냉면집을 찾은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을 생생하게 보도하면서, SNS에서도 단어 ‘평양랭면’이 ‘남북정상회담’ 보다 더 많이 퍼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CNN, 뉴스룸에 ‘평양랭면’집을 차렸다
외신들도 4월 27일의 한반도 사건을 다루면서, 나 ‘평양랭면’을 출연료 한푼 없이 잘 써먹었지요. 미국 애틀란타에 본사를 둔 CNN은 뉴스룸에 아예 랭면집을 차렸더군요.
남한의 1980년대 팝스타 이지연이 직접 스튜디오에서 ‘평양랭면’을 만들어 두 앵커에게 먹이면서, 그들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Pyongyang Naengmyun”을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외치게 했죠. 물론 남북의 평화와 이산가족의 만남을 기원하면서요.
상품광고를 한들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축구선수 차범근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지요. “그날 나도 유명 냉면집을 갔었는데 기다리다 결국은 못 먹고 돌아 왔어요. 3주 뒤에야 1시간을 기다려서 평양냉면을 먹었습니다.”
그해 9월 19일 제3차 남북정상회담의 오찬이 평양 옥류관에서 있었는데, 리설주 여사는 저와 관련된 이 사건을 이렇게 다시 정리했어요. “판문점 회담 덕분에 평양에서도 (평양랭면이)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외국 손님들이 다 ‘랭면 랭면’ 소리하면서 랭면 달라고 한단 말입니다. (중략) 상품 광고를 한들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국민일보 2018. 9. 19.)

남녀노소, 대기업부터 냉면집 까지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뒤로 남한에서 나 ‘평양랭면’의 인기는 계속 되고 있답니다. 여자와 남자, 어르신과 젊은이,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크고 작은 냉면집 까지 저의 인기는 퍼져나가고 있어요.
이제는 식당이 아니라 큰 마트에 가보면 거기에서도 포장된 저를 발견해요. 대기업인 CJ제일제당, 풀무원, 오뚜기 등은 집에서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가정간편식(HMR) 평양랭면을 만들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더군요.
파스타도 울고 갈 ‘평화의 아이콘’
이탈리아에도 저와 비슷한 친구가 있다고 해요. 파스타라고 불리죠. 뭐,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라고도 하던데, 이런 이유라고 해요. 로마제국 이후로 1400년 간이나 중소도시로 분열되었던 이탈리아 반도가 드디어 통일이 되었답니다. 그 후에 이탈리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정체성이 바로 ‘파스타 먹는 같은 민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 ‘평양랭면’은 파스타 보다 더 힘이 세다고 봐요. 파스타는 통일 후에 그들을 모아줄 문화적 매개였다면, ‘평양랭면’은 통일 전부터 시작해서 통일 후까지 한반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죠. 저 ‘평양랭면’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빛나는 문화 아이콘이 될 거에요.
무더위가 다가왔습니다. 평화의 아이콘인 저 ‘평양랭면’을 맛있게 드시면서, 결코 헛되지만은 않았던 뜨거웠던 2018년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세요. 미래는 결국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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