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의 권유② 그랜드투어 행운 누린 음악가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멘델스존의 여행음악

해외여행의 유행이 시작될 즈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신용카드 회사 광고문구가 꽤나 도발적이었다. 이때부터였을까, 딱히 일에 매여 있던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약간의 여유가 생길라치면 무작정 떠나고 보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졌다. 심지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여행자의 삶을 택한 이들의 소식도 들려온다. 떠나고 싶은 자 누구라도 떠날 수 있다지만, 항공여행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감히 꿈꾸기 어려웠던, 일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호사가 해외여행이었다.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 귀족 계층에서는 자식들에게 그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선구적인 문화와 견문을 넓히는 일명 ‘그랜드투어’를 권장했다. 귀족계층의 필수적인 교육과정으로까지 성행하였던 이 여행은 짧게는 3, 4개월에서 길게는 수년까지 걸렸고, 여행 전반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가정교사(튜터)를 대동하였으니 대단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저서 <이탈리아 기행>을 남긴 것도 이 그랜드투어의 산물이다.
부르주아 출신의 천재음악가 멘델스존
초기 낭만파 음악의 대가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6, 독일)은 음악가로서는 드물게 그랜드투어를 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펠릭스(Felix)’는 ‘행운, 행운아’를 의미하는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처럼 많은 행운을 안고 태어난 멘델스존은 그에 대한 소개에서 으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한’이란 표현이 빠지지 않는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금융업과 직물제조업으로 큰 부를 쌓은 유대계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지성과 교양까지 겸비한 사람들이었고, 당연히 자식 교육에도 열성을 쏟았다. 네 남매의 장남 펠릭스와 누나 파니(Fanny)는 음악 뿐 아니라, 역사, 라틴어와 그리스어, 과학, 문학, 미술 등 다방면에 걸친 교육을 받았는데, 남매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여러 방면에서 탁월함을 보였으니, 18세기의 신동 모차르트 남매(볼프강과 난네를)가 부럽지 않았다.
멘델스존이 세 살 무렵 부모는 베를린으로 이주해 성공적으로 베를린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저택은 명망가들을 초대해 음악과 지식을 교류하는 장이 되었다. 아홉 살 때부터 청중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멘델스존이 음악에 천재성을 보이자 가족들은 숙고 끝에 음악가의 길을 가도록 결정하였다. 부모가 만들어준 오케스트라로 자신의 창작품을 실험할 수 있었으니 10대 시절부터 제대로 된 작품을 써가며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열여섯 살 때에 이미 네 개의 오페라와 협주곡, 관현악곡, 칸타타, 피아노곡, 실내악을 작곡했고, 이듬해에 극음악 <한 여름 밤의 꿈>을 썼는데, 열일곱 살의 청년이 쓴 것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음악의 내용과 작법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쾌활한 성격과 단정한 용모, 세련된 매너,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이 젊은 음악가는 참한 아내를 만나 결혼생활도 순탄했다. 다만 부유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탓에 매사에 조심스럽고 보수적이었다. “새로운 것을 섣불리 칭찬하면 안 돼. 그게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고 명성을 얻을 때까지는 말이야. 그 전에는 하나의 취향에 불과한 거니까.” 그의 성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인데, 그 자신도 너무 앞서가거나 과장된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전적 규범 안에 낭만적 감성을 담아내다
그의 음악은 고전적 규범을 잘 지키는 선에서 낭만적인 감성을 담아낸 것으로 우아하면서도 활기 있는 작품들이 많다. 또한 빈틈없는 작곡 솜씨로 동료음악가들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슈만은 그의 음악에 대해 ‘완벽 그 자체’라며, “나는 멘델스존이 우리시대 ‘최초’의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진정한 이 대가에게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한다”라는 말로 그의 비범함을 칭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비평가들로부터는 예쁘지만 평범한 음악, 또는 그의 굴곡 없는 인생사에 빗대어 음악 역시 무난하고 평범하다는 식의 평가를 받았다. 멘델스존의 ‘남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배경과 순탄했던 삶’이 19세기가 만들어 낸 낭만적 예술가의 초상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부잣집 도련님도 스무 살 무렵 그랜드투어를 떠나게 되었다. 1829년 4월에 시작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를 향한 3년간의 여정이었고, 그 때 마주한 경이로운 이국의 풍광과 새롭고 다양한 경험들은 고스란히 악보로 옮겨졌다. ‘스코틀랜드’라는 부제가 붙은 교향곡 3번과 연주회용 서곡 <헤브리디스>, ‘이탈리아’라는 부제의 교향곡 4번등이 이 여행을 통해 탄생된 작품들이다. 이후에도 그는 여행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유럽 각지를 여행했고, 특히 영국을 좋아하여 아홉 번이나 그곳을 방문하게 된다.
첫 여행지인 런던에 도착한 뒤, 그 곳의 음악계 인사들과 두루 교류를 갖고 큰 환대를 받았다. 7월에는 북쪽의 스코틀랜드까지 돌아보는 여정에 올랐다. 스코틀랜드 지방의 색다른 분위기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여행은 하일랜드를 거쳐 헤브리디스 군도까지 이어졌다. 짐마차를 갈아타고 걷거나 배를 타는 등 녹녹치 않은 여정이었다. 그의 일행은 뱃멀미와 비바람에 시달리며 마침내 헤브리디스 군도의 스테퍼 섬에 도착하여 근처 ‘핑갈의 동굴’로 향했다. 그리고 거대한 오르간의 내부처럼 파도소리가 울리는 신비한 동굴에 압도되었다.
“바다가 끊임없이 그곳에서 부서지고 있다. ... 장엄함과 웅대함 그리고 광활함, 그것은 가장 훌륭한 대성당을 능가한다.” 앞서 그곳을 다녀간 시인 키츠의 감동 그대로를 일행도 느꼈으리라. 청년음악가는 그 자리에서 떠오른 음악적 영감을 스케치했고, 그 악보를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동봉했다. “헤브리디스가 얼마나 엄청난 감동을 주었는지, 조금이나마 공유하기 위하여 그곳에서 떠오른 악상을 보냅니다.” 연주회용 서곡 <헤브리디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남국의 화창함과 활기를 전하는 교향곡
멘델스존의 여행담은 1833년 완성한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에도 생생하게 담겨있다. 북쪽 출신들이라면 이탈리아에서 무엇보다도 화창한 날씨를 반겼을 것 같다. 화사함과 생기발랄함으로 가득찬 1악장은 빠르게 시작하는 첫 소절부터 눈부신 남국의 햇빛을 연상시킨다. 시종 가볍게 날아오르듯 경쾌한 음악이다. 2악장은 조금 느린 행진곡 풍의 음악으로 엄숙한 종교의식이나 순례자의 행진곡과 같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선율을 차분하게 들려주고, 3악장은 경쾌한 리듬을 입힌 우아한 춤곡으로 되어있다. 멘델스존의 음악치고는 꽤 박진감이 넘치는 마지막 악장은 살타렐로(Saltarello)이다. 살타렐로는 나폴리 지방의 빠른 춤곡으로, 공중으로 빠르게 도약하면서 추는 춤이다. 앞부분의 빠른 패시지는 사람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추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 교향곡은 네 개 악장의 흐름과 전 악장에 걸쳐 리듬의 특성이 강조된 점 등에 비추어 볼때, ‘리듬의 신격화’라고 불리는 베토벤의 교향곡 7번과 유사점이 많다.
멘델스존은 생전에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교육자, 여행자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1835년 라이프치히로 이주해 게반트하우스의 음악감독 직을 맡아 공연의 품질을 높였다.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같은 지난 시대 대가들을 비롯하여 슈베르트, 쇼팽, 리스트 등 초기 낭만파 음악까지 공연의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넓혀갔다. 또한 잊혀져있던 옛 음악 - 특히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손질하여 다시 무대에 올림으로서 ‘바흐 재발견’의 바람을 일으킨 것도 그의 큰 공적 중 하나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창설하여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다. 그런데 이렇게 동분서주하며 한창인 나이에, 이 부잣집 도련님에게 너무 과부하가 걸린 것일까.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847년 11월 서른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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