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의 권유 ③ 동서 문화의 교차로 스페인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아랍문명의 악기 기타, 스페인에서 꽃피다
클래식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잘 되어가느냐며 진도를 물으면 ‘이제 로망스 정도는 친다’는 말을 듣곤 한다. 스페인 민요를 기타용으로 편곡한 ‘로망스’는 오래전 프랑스 영화 <금지된 장난>부터 시작하여 국내 드라마 <가을동화>에까지 삽입되면서 정말 많은 이에게 친근한 선율이 되었다. 이렇게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기타 곡으로 <알람브라궁전의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곡 역시 영화(킬링 필드)에 사용되어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런데 몇 년 전 방영한 국내 TV드라마는 그 제목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가져다 썼다. (Alhambra는 ‘알람브라’가 정확한 표기이므로 이후 ‘알람브라’로 표기)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곡명 그대로를 드라마 제목으로 썼을까, 음악과의 연결고리가 궁금했다.
이 드라마는 증강현실게임을 소재로 하고, 남자 주인공은 IT업계의 게임개발자다. 그가 그라나다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게임을 접하며 ‘(이 게임으로 인해) 그라나다는 1년 후에 알람브라 궁전보다 더 유명한 마법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리고 증강현실 게임 속에는 아랍복장을 한 묘령의 여인이 등장하여 타레가의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을 연주한다. 나름 맥락 있는 제목이었다.
스페인은 과거 이베리아 반도가 동서 문명의 교차로였다는 점에서 다른 유럽지역에서는 볼 수없는 독특한 문화 지형을 갖고 있다. 8세기 초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반도를 수백 년간 지배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 곳곳에 남아있고, 이후 가톨릭 문화에 흡수되거나 공존하면서 빚어낸 다채로움이 여행자를 유혹한다. 그 중에서도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고도(古都) 그라나다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로 꼽히는 ‘알람브라 궁전’이 있다. 그라나다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지에 자리한 이 궁은 마지막 이슬람 왕조 시기인 14세기에 완공되었다. 세 개의 건축물(본채 격인 나스르 궁, 분수 정원이 있는 여름 궁 헤네라리페, 카를로스 5세 궁)과 세 개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곳곳에 아랍 건축의 백미를 보여주는 정교한 장식과 현대적 감각의 세라믹 문양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기타리스트 타레가((Francesco Tarrega, 1852~1909년)는 클래식 기타의 트레몰로 주법을 개발한 연주가 겸 작곡가이다. 어린 시절에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 각막에 손상을 입은 뒤 평생 온전한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지냈지만, 클래식 기타계에서 현대 기타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기타음악에 끼친 영향이 큰 인물이다. 1896년 그라나다를 여행하던 타레가는 폐허가 되어버린 이 옛 궁전을 돌아보면서 과거 무슬림 왕국의 영화로웠던 시절을 떠올리고 그 서글픈 감상을 신비로우면서도 애잔한 곡조에 담아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을 작곡하였다.
처연한 아름다움의 선율 ‘아란후에스 협주곡’
기타는 원래 아라비아 지역의 발현악기(손으로 현을 뜯어 소리를 내는 악기)에서 출발하여 유럽으로 전해졌다. 이후 개량과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형태와 기능을 갖게 되었는데, 특히 오랜 기간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겪었던 스페인에서 기타음악이 크게 발전했다. 근대로 오면 타레가, 세고비아, 예페스 등의 스페인 음악가들이 현대적 연주기법을 발전시키며 클래식 기타음악의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런 기타 강국 스페인의 전통은 20세기 중엽 한 맹인 음악가에 의해서 다시 한 번 큰 꽃을 피워낸다.

로드리고(Joaquín Rodrigo, 1901~1999년)는 비교적 우리 시대와 근접한 시대를 산 음악가인데, 그의 기타협주곡 ‘아란후에스 Aranjuez’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유명 작품과 비견될 만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의 멜로디는 전 세계적으로 영화와 광고 등에서 매우 많이 사용되었기에 그 제목은 모르더라도 한번은 들어봤을 터, 대표적으로 쓰인 예는 TV ‘주말의 명화’ 시그널 뮤직이었을 것 같다.
로드리고는 1901년 발렌시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세살 때 디프테리아 감염의 후유증으로 실명(失明)하고 말았는데, 아들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부모는 그를 저명한 음악가에게 보내어 교육을 받게 했다. 20대 때에는 파리로 유학을 가서 에콜 노르말에서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그의 기타협주곡에 붙은 제목 ‘아란후에스’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진, 18세기 부르봉 왕가의 여름궁전의 이름이다. 이 궁전 역시 고원의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스페인 굴지의 유명한 정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1938년 로드리고는 이 곳 별궁을 방문했을 때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기타협주곡을 작곡했다. 사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기에 그곳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접하진 못했지만, 그 주변에서 느낀 분위기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풍부한 감수성을 담아낸 이 작품을 쓴 것이다. 전체 3악장으로 되어 있는 이 기타협주곡에서 빠른 템포의 1악장과 3악장은 스페인 무곡의 리듬을 사용하여 활기와 흥겨움이 느껴지고, 잉글리시호른의 애수 띤 주요 선율이 나타나는 2악장은 아란후에스 궁의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기타는 오케스트라와 협주하기에는 음량이 작다는 문제가 있어서 주로 소품 연주에 쓰였던 악기였으나, 로드리고의 이 협주곡으로 인해 기타가 협주악기의 하나로 탄탄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아란후에스’ 이후 로드리고는 스페인의 유명 기타리스트들을 위하여 몇 곡의 협주곡을 더 쓰게 된다. 거장 세고비아를 위해서는 <어느 신사를 위한 환상곡>(1954)을, 프레스티-라고야 듀오를 위해 <마드리갈 협주곡>(1966)을, 로메로스 일가로 구성된 기타 4중주단인 로스 로메로스를 위해 넉 대의 기타를 위한 <안달루시아 협주곡>(1967)을, 페페 로메로를 위해 <축제 협주곡>(1982)을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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