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라 호야도 꺾을 뻔...’복싱계 히딩크’ 김승미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복싱대표팀 국제대회 종합우승 4회 ‘신화’ 제자 홍성식, 오스카 델라 호야 잡을 뻔도 “유능한 지도자 나와서 복싱 부활시켜야”
한 세대가 넘는 세월을 복싱 현장에 몸담은 필자가 지난날을 회상해보면, 링 위에서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이 지도자의 지휘능력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장면이 많았다. 인탠지블 파워(intangible power)가 바로 그것이다. 직역하면 ‘보이지 않는 힘’이다. 경기는 링 위에서 선수가 하지만, 세컨의 파워나 팀웍, 심지어 라커룸 분위기 등에 의해 박빙(薄氷) 경기에서 균형이 깨졌다. 마치 쇠붙이가 자기력이 센 자석(磁石)으로 기울 듯 승패에 중요한 변수(變數)가 된 것이다. 이번 <더 칼럼니스트>의 칼럼 주인공은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복싱 대표팀 감독 등으로 재임하던 3년간 아시아 복싱 무대를 평정, ‘한국 복싱계 히딩크’라 불리는 김승미 감독이다.

외국어 실력 뛰어난 복싱지도자
1945년 전남 고흥 태생의 김승미는 1965년 5월 제16회 학생선수권대회 미들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때 주목을 받았던 선수출신이다. 이듬해 명지대학교에 입학한 김승미는 정밀기계(精密機械)라 불릴 정도로 섬세한 복싱을 구사해 라이트플라이급 김충배, 헤비급 김상만, 라이트급 신춘교 등과 함께 명지대학교가 전국선수권 3연패를 달성하는데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올림픽에 출전할 기회도 잠시 왔다. 1968년에는 멕시코 올림픽 선발전에 미들급으로 출전, 우승을 차지하며 꿈에 부풀었지만, 한국복싱협회가 웰터급까지만 올림픽 출전을 허용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대학 졸업 후 1970년 해군에 입대, 세계군인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냈던 김승미는 은퇴후 명지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재원답게 1982년까지 고려여행사에 근무했다. 이 시절 해외 여러나라를 출장 다니면서 터득한 능숙한 외국어 실력은 훗날 그의 지도자 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1982년 3월 대한복싱협회 회장에 취임한 김승연 한화회장의 추천으로 네팔국가대표 감독에 오르게 된 김승미 감독은 기초용구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환경으로 처음에는고생을 많이 했다. 네팔 정부로부터 월 50달러밖에 못받는 조건에서도, 자신의 사비를 써가며 헌신적인 지도를 펼쳐 1984년 5월 킹스컵대회에서 네팔 복싱사상 최초로 국제대회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어 그해 9월 벌어진 서남아시아컵(SAF) 대회에서도 대표팀이 두 체급에서 금메달을 석권하자, ‘네팔복싱의 대부’란 명성을 얻게 된다.
이듬해 귀국한 김승미는 꿈나무 대표팀감독을 맡아 1988년 3월 열린 제1회 서울컵 대회에 팀을 이끌고 출전했다. 자신의 선수중 대표 2진인 오영호가 1985년 월드컵 금메달 오광수를 결승에서 판정으로 잡는 이변을 일으키며 우승을 차지했고, 밴텀급에선 서정수가 난적 변정일을 꺾고 결승에 진출, 허영모를 잡고 결승에 오른 러시아의 아르테미 에프를 판정으로 제압해 두 체급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런 성과에는 선수들의 약점 보완보다는 선수들의 장점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특유의 지도력이 뒷받침됐다.

약점 보완보다는 장점 더 키우는 지도력
김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링 난동 사건으로 물러난 김성은 대표팀 감독의 뒤를 이어 전격적으로 대표팀 사령탑을 맡는다. 당시 대표팀은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오광수, 김광선, 문성길, 김기택, 김동길, 이해정, 박시헌, 송경섭, 신준섭, 민병용 등 주력들이 퇴진하는 바람에 전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그는 꿈나무 복서를 주축으로 팀을 재구성해 1989년 2월 제12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 네 체급에 대표팀 선수를 내보냈고, 이중 세 체급을 석권하며 다시 한번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라이트플라이급 양석진이 대회 최우수복서에 선정됐고 플라이급의 이창환과 밴텀급의 조인주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다음해 12월 벌어진 제14회 북경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12체급 전 체급에 선수를 출전시켰고 이중 9체급에서 결승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일궜다. 라이트플라이급 조동범, 플라이급 한광현, 밴텀급 황경섭, 페더급 이훈, 라이트미들급 유창현, 미들급 정동환, 라이트헤비급 박세종, 헤비급 채성배 등 8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거뒀다.
이 대회에서 조동범은 세계선수권 동메달을 획득한 세계랭킹 8위인 북한의 김덕남을 제압, 역대 남북대결에서 11승 9패를 기록하는 수훈을 세웠다. 김 감독은 “조동범의 남북한대결 승리가 지도자 생활중 가장 드라마틱한 경기였다”고 회고한다. 1990년 6월 제2회 서울컵 대회에서는 라이트플라이급 양석진, 플라이급 이창환, 밴텀급 박덕규, 라이트급 홍성식 등 출전선수들이 4체급을 석권,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대회에서 박덕규가 최우수복서에, 김승미 감독은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다.

특히 플라이급의 이창환은 준결승에서 ‘동양의 진주’라 불리던 태국의 세계적인 복서 비차이 카드포를 판정으로 제압, 세계적 클라스(class) 복서임을 보였다. 카드포는 북한의 최철수(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를 판정으로 꺾은 복서였다. 이창환은 훗날 필자에게 “김승미 감독은 기량이 열세인 상황에서도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 경기를 반전(反轉)시키는 지도력을 지닌 분”이라고 회고했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때도 대표팀 코칭 스탭으로 합류한 김 감독은 양석진, 이창환외에도 이재권(라이트급), 채성배(헤비급), 백현만(슈퍼헤비급) 등이 5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내는데 지도력을 발휘했다. 특히 양석진은 결승에서 태국의 차차이 사사쿨을 판정으로 잡고 우승을 차지했다. 사사쿨은 프로로 전향, 러시아의 유리 아르바차 코프를 꺾고 WBC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하여 ‘태국의 복싱영웅’이 된 선수다.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 감독의 쾌속 행진은 1991년도에도 멈추질 않았다. 그해 5월 러시아 알마아타에서 개최된 인터컵 국제대회에서도 12체급의 선수들을 조련, 출전시켰다. 플라이급 한광형, 밴텀급 염종길, 페더급 성기현, 라이트급 김경일, 라이트미들급 경정구, 라이트헤비급 고요다, 헤비급 채성배등 7명의 대표선수들이 결승에 올랐고, 이중 염종길, 고요다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러시아를 포함 동구권이 대거 참여한 수준 높은 국제대회였지만 9체급에서 금은동 메달을 쓸어담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의 조련실력을 입증한 김 감독은 그해 7월 태국에서 개최된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도 7체급을 우승시켰고, 1992년 제3회 서울컵 대회에서도 홍성식, 최기수, 이승배, 채성배 등이 4체급에서 우승, 2연패를 달성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태릉선수촌 복싱장에 지나가는 개들도 금메달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강렬한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배구 시간차 공격처럼, 복싱에서도 속임수 전술을
이런 성과를 창출한 이면에는 김감독의 지략이 있었다. 당시 아마추어 복싱 채점 방식이 컴퓨터 채점으로 바뀌자 그는 전략을 대폭 수정, 배구경기의 시간차 공격을 응용했다. 이를테면 배구경기에서 무분별한 연타(連打)공격보다는 공격수 한명이 공격할 것처럼 점프해 상대 블로커를 속인 뒤, 다른 공격수가 따라 점프하면서 공격을 가해 득점을 올리는 시간차공격 말이다. 이를 복싱에 접목시켜, 속임수(페인팅 모션)를쓴 후 카운터 펀치, 즉 받아치기 펀치를 구사하는 전술을 개발했다. 이같은 득점전략이 주효하면서 풍성한 수확으로 결실을 맺었다. 아시아선수권 2연패를 포함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한 조동범은 이런 김승미 감독에 대해 “석탄을 금강석(金剛石)으로, 발발이를 불독으로 변모시키는 연금술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시아 최강을 구축한 김 감독에게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은 자신의 지도자 경력에 화룡점정(畵龍點睛)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히든카드는 페더급의 박덕규와 라이트급 홍성식이었다. 박덕규는 1991년 호주 세계선수권에서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 쿠바의 아놀드 메사를 판정으로 잡고 결승에 올랐으나 불가리아의 키르코프 에 패해 은메달에 머물렀던 복서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올림픽 8강에서 박덕규는 그대회 우승자인 독일의 인드레아스 테브스에게 발목이 잡혀 메달권 진입에 실패했다. 히든 카드 한장이 날아갔다.
오스카 델라 호야 “사실상 패배한 경기였다”
나머지 히든 카드인 홍성식은 사실상 결승전으로 평가받았던 16강전에서 세계선수권 준우승자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인 러시아의 그리고리안을 꺾고 준결승에 오른다. 그가 만난 선수는 그 유명한 오스카 델라 호야(미국)였다. 훗날 프로에서 5체급을 석권하게 되는 그와 올림픽에서 만난 것이다. 홍성식은 2회까지 파울로 감점을 당해 4대 8로 뒤지고 있었다. 적토마라 불릴 정도로 체력이 좋은 홍성식은 3회가 되자 필사적으로 ‘오스카 델라 호야’에 맞섰다. 여러 차례 유효타를 성공시키며 파울까지 얻는 등 전세를 뒤집는 듯했지만 한 뼘 부족했다. 10대 11이라는 간발의 차이로 패하며 동메달에 머물렀다. 오스카 델라 호야는 후에 자서전에서 그날의 경기는 내용상 패한 경기라고 적어놓았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 복싱대표팀은 미들급에서 이승배가 쿠바의 헤르난데스에 1대 14로 패했지만 홍성식과 함께 값진 동메달 2개를 획득하며 대회를 마쳤다. 김 감독은 필자에게 “당시 밴텀급의 신수영 선수가 본선에 참가하지 못해 안타까웠다”며 “라이트웰터급에 출전한 김재경도 순발력이 좋은 복서였지만 컴퓨터 채점에 유리한 장신의 왼손 복서 김민기가 출전했다면 홍성식, 이승배와 왼손잡이 트로이카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1989년과 1991년 아시아선수권대회 2연패, 1990년·1992년 서울컵 2연패를 달성하는 등 모두 4차례 국제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우승 제조기’라 불렸던 김승미 감독. 국가대표 감독직은 그에게 잘 어울렸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나는 운장...유능함 검증된 지도자 나오길”
이런 공로로 그는 1989년 대한체육회장 공로상, 1990년 대통령 훈장 기린장, 1992년 대통령 훈장 백마장을 수여받았다. 또 1994년 ‘서울정도 600년’ 자랑스런 서울시민 600인에 뽑혀 ‘타임 캡슐’에 이름이 들어가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는 필자에게 “나 자신은 좋은 선수들을 만나 여러 차례 종합우승을 차지한 ‘운장(運將)’”이라 말하면서 “대표팀 감독은 유명한 감독보다, 유능함이 검증된 감독을 최우선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대표팀 감독을 떠나면서 한국 아마추어복싱도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난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복싱대표팀은 노메달을 기록했고 이어 지난해 7월 열린 도쿄 올림픽에서 단 한 체급도 선발되지 않았다. 올림픽 지역예선전에서 전원 탈락했던 것이다. 지금 최악의 침체기를 맞이한 상황이다. 한국 복싱의 부활을위해 제2의 김승미 감독 탄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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