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돌아온, 첫 올림픽 금메달 신준섭의 인생유전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한국 복싱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 따내 복싱 입문초엔 얻어맞기만 하던 2진급 지옥훈련과 체력단련후 세계적 선수로 20년 미 생활 끝...체육행정 맡아
지난 3월 모친상을 당한 필자에게 귀한 손님이 빈소를 찾아왔다. 주인공은 한국복싱 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신준섭 전북 체육회 사무처장이었다. 그 자리에는 신준섭과 함께 1983년 4월 대통령배 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한 강영한도 동석했다. 당시 그 대회에서 전북 팀은 3개의 메달을 획득했었다. 미들급에서 신준섭이 금메달, 라이트 미들급에서 강영한이 동메달, 그리고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필자가 동메달을 획득해 종합 4위를 기록했다.

남원 출신 ‘지리산 사나이’ 신준섭
신준섭은 1962년 6월 17일 전북 남원시 대산면 길곡리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역사적으로 보면 남원은 고려말인 1380년 8월 최무선이 화약을 사용해 왜구를 소탕시킨 진포해전에서 살아남은 왜구 잔당들이 지리산 근처 운봉에 집결, 약탈을 일삼자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잔당들을 궤멸시킨 황산대첩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그의 복싱 입문은 남원농고 2학년 때인 1980년 4월. 천부적으로 주력이 좋았고 축구를 비롯해 구기 종목에도 능했지만, 완성도가 떨어졌던 신인 시절에는 김의진, 최우진, 조주연, 소배원 등 전북을 대표하는 중량급 선수의 스파링 파트너에 불과했다. 스파링 때마다 무수히 난타를 당하는 바람에 맷집도 약해져 2진급 복서로 전락한 상태가 됐다.
그렇지만 북싱 입문 4개월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8월 전주 종합체육관에서 제61회 전국체전 선발전이 열렸고 새내기 신준섭은 라이트 헤비급으로 출전한다. 상대는 복싱경력 3년 차인 전북체고 김공근. 경기장엔 소속 체육관에서 아무도 오지 않아 친동생이 홀로 세컨을 볼 정도로 신준섭의 1회전 탈락은 기정사실인 듯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신준섭은 극적인 판정승을 거두게 된다. 당시 탁형권 심판부장의 엄격한 판정 덕분이었다. 이 경기에서 패했다면 신준섭의 복싱 역사도 더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회와 좌절이 반복된 복싱 인생
이어 승승장구, 장래가 보장되는 듯했다. 그해 전국체전 본선에서 전북 대표로 출전한 신준섭은 동메달을 획득하고 이어 대학진학을 앞둔 1981년, 신준섭은 김명복 박사배와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학생선수권 대회에서는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러자 원광대학교가 입학을 원한다는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전국체전이 끝나고 교내 체육대회에서 축구 경기를 하다가 그만 오른쪽 다리가 골절되는 전치 6주의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갓 피어난 복싱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
당시 신준섭은 이리여고 맞은 편의 익산 복싱체육관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체육관 건너편에 골목길 안 허름한 자취방에서 남동생 신문섭 군과 함께 기숙했다. 어느 날 우연히 필자가 그의 자취방을 방문했는데, 깜짝 놀랐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신준섭은 자취방에서 큰 호박을 구해 두손으로 호박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원광대에 입학했지만, 좌절은 이어졌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이남의, 조용래의 두터운 벽을 넘지 못했다. 특히 2진으로 출전한 제5회 핀란드 국제대회에서 신준섭은 준결승전에서 소련의 킬리모프에게 KO패를 당했다. 이 때 김승연 당시 대한복싱협회 회장(현 한화그룹 회장)은 2진 선수들을 귀국시키지 않고 한 달 간 유럽 전지훈련을 시켰다. 덴마크, 스웨덴 등 5개국을 돌면서 3차례에 걸쳐 스파링을 했지만 그는 피지컬이 우월한 유럽 선수들에게 얻어터지며 연달아 RSC패를 당했다.
보다 못한 신준섭의 스승이자 국제심판으로 참관한 조석인 대한복싱협회 전무는 그를 향해 “너는 선수 되기는 글렀다. 만일 네 녀석이 선수가 된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란 독설을 뱉었다. 수년 전 고인이 된 전북 복싱의 대부 조석인 전무는 승부욕이 강한 열정적인 지도자였다. 자존심이 상한 신준섭은 ‘스승의 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실증해 보이겠다’고 외치면서 비장한 각오로 훈련을 재개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남원에서 바라보이는 지리산이 거의 훈련무대였다. 혹독한 산악훈련을 거치며 스승의 고언을 곱씹었고 나약해진 자신을 추스렸다.
다시 기회는 찾아왔다. 1983년 2월 신준섭은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4월에 태국에서 개최된 킹스컵 대회에서 신준섭은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또 소련의 킬리모프에게 RSC패를 당하며 은메달을 따는데 그쳤다. 그러나 세계적인 강자들과 호각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다음달인 5월에는 일본 동경에서 열린 세계 아마복싱챔피언 도전전에서 세계랭킹 1위인 쿠바의 베르나르도 코마스에 판정패를 당했다. 역시 소련과 쿠바 복싱의 벽은 높고도 두터웠다. 1983년 10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3회 월드컵 국제대회에서는 미들급에 쿠바와 소련 팀이 출전하지 않았다. 이 대회에서 신준섭은 특유의 빠른 발로 주도권을 잡아 준결승에서 유고의 레제피를, 결승에선 홈 링의 크루치아니를 각각 판정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1984년 LA 올림픽 우승을 향한 예비고사를 통과한 셈이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엔 1984년 2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를 석권했다. 복싱 월드컵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대회였지만 결승전에서 소련의 바실렌코를 꺾고 국제대회 2관왕을 달성하며 올림픽 메달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드디어 올림픽 무대, 복싱 최초의 금메달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의 USA 투데이는 각 국의 메달 수확을 전망했는데, 한국은 금메달 3개를 예상했다. 그런데 그 중 1개는 복싱의 신준섭이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광선, 허영모, 문성길 등 경량급 3체급에 기대를 걸었던 한국측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해 개최된 LA 올림픽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와는 반대로 소련 주도 하에 동구권 국가들과 북한, 쿠바 등 14개국이 참가를 보이콧한 대회했다. 그럼에도 사상 최다인 140개국이 참가했다. 1932년에도 개최됐던 적이 있던 LA 올림픽은 복싱에서 황을수가 한국인으로 처음으로 참가한, 우리와 인연이 깊은 올림픽이었다. 정확히는 마라톤의 권태하, 김은배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일본 대표로 출전했던 올림픽이었다.
신준섭은 그 대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 대표팀 코칭 스탭이었던 박형춘 선생은 필자와 대화에서 “신준섭은 주말에 외박도 없이 선수촌에서 홀로 훈련했고 평일에도 훈련이 끝나면 선수촌 옥상에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트레이닝에 몰입한 독종이었다”고 회고했다. 박형준 선생은 로버트 R 도시와 대표팀 코칭 스탭을 맡아 그의 금메달 획득을 이끌었던 분이다.
드디어 올림픽. 신준섭은 1회전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우간다의 복병 패트릭 리탄다를 잡는 등 4연승을 질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8월 12일 미들급 결승전에 나섰다. 상대는 미국의 버질 힐. 그는 8강전에서 유고의 다미르 스카로에 힘겨운 승리를 거두고 올라온 복서였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접전 끝에 신준섭은 끝내 3대2 극적인 판정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따낸다. 한국 복싱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혹독한 담금질 끝에 명검(名劍)이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미국 생활 20여년, 고향으로 돌아온 신준섭
그의 승전은 경량급에만 치우쳤던 한국복싱이 중량급 중흥의 돌파구를 마련한 쾌거이기도 했다. 금메달을 획득하자 링이 좁다며 환호하며 펄펄 뛰던 신준섭은 경기장 복도를 나올 때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의 눈 앞에는 해머를 어깨에 걸친 채 철길에 앉아 쉬고 계시는 철도 공무원인 부친 신병일 씨, 집 앞 채소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는 모친 이명순씨의 얼굴들이 어른거렸기 때문일 터였다.
귀국한 신준섭은 정주영 대한체육회장에게 받은 격려금 3천만 원중 5백만 원을 떼어 남원복싱 체육관발전기금으로 써달라며 KBS 남원 방송국에 기탁했다. 이런 미담은 올림픽 금메달과 체육훈장 청룡상보다 더 값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86년 5월 신준섭은 미 네바다주 리노에서 개최된 제4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는데, 16강전에서 대회 우승자인 동독의 헨리 마스케 2대 3으로 분패했다. 아쉽게도 불멸의 기록인 그랜드 슬램(월드컵, 올림픽, 세계선수권 우승)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그해 10월 신준섭은 서울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후 1991년 10월 원광대 강사가 됐고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과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때 국가대표 코칭 스탭으로 참관하기도 했던 그는 결혼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그리고 20년 세월동안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런데 지난 2018년 2월 그는 막내딸과 함께 귀국해 필자의 체육관을 찾아왔다. 그해 12월 공개채용을 통해 남원시청 감독으로 부임했고, 2021년 9월에는 전라북도 체육회 사무처장으로 발령받아 본업을 다하고 있다. 강철처럼 강하고 생고무처럼 질긴 투혼으로, 높고 험한 올림픽 담장을 무너뜨린 자랑스런 신준섭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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