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테크니션’ 허영모, 안타까웠던 한평생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빈민가 출신의 귀공자 외모 허영모 문성길과의 세차례 대결 ‘최고 흥행’ 화려한 실력에도 불운 이어져 ‘낙담’ 교직생활 꿈 이뤘지만, 55세에 별세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광선을 공격하는 허영모(왼쪽)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광선을 공격하는 허영모(왼쪽)

귀공자처럼 생긴 외모, 빼어난 권투실력

지난 3월 9일은 한국 아마복싱 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리던 허영모가 55세로 일기로 세상을 떠난지 4주년 되는 날이었다. 2019년 3월 그의 이른 죽음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필자가 친구인 허영모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이유가 있다. 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1988년 이후 수많은 언론사의 취재 요청에 단 한 차례도 접촉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나에겐 두 차례에 걸쳐 러브콜을 보내 자신의 고향인 순천에서 가슴에 묻어둔 과거사와 숨은 비화를 기탄없이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첫 만남은 2012년 5월 전남 순천의 고인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당시 고인은 자신의 선친이 개장수였다고 당당하게 말하면서 지면으로 밝히기 어려운 복잡다난한 가정사를 털어놓았다. 귀공자처럼 생긴 반듯한 외모와는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허영모는 1964년 7월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순천은 국내 프로복싱 최초의 세계 랭킹 6위에 오른 서정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남승룡 선생의 본향이다. 영모는 1978년 3월 순천의 이수중학교 2학년때 복싱에 입문한다. 복싱에 입문하기 전 그는 제비처럼 민첩하고 날렵한 동작으로 리시브(Receive)를 받아내던 배구선수였다. 그런 영모를 담장 너머로 유심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복싱의 매력에 심취해 복싱 교본을 탐독, 연구하면서 인근 공터에 새끼줄로 링을 만들어 복싱을 지도한 전직 이발사 출신 김상모 관장이었다. 순천 복싱의 선구자 김 관장은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허영모를 비롯 김창렬, 박성춘, 최종길, 최낙길, 성광배, 이해준, 조용준, 김대준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배출해 명장반열에 올랐던 지도자다.

필자와 영모는 1983년 4월 광주에서 개최된 대통령배 대회에서 첫 인연을 맺었다. 전북 대표로 라이트플라이급에 출전한 필자는 4강에서 오광수에 판정패하는 바람에 동메달에 그쳤다. 반면 영모는 결승에서 경남의 이율기에 판정승으로 이겨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차분한 성품에 예쁘장한 용모를 지닌 영모는 예의 바른 행동으로 복싱관계자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한 복서였다.

1995년 10월 마지막 날에 필자와 2번째 만남을 가진 허영모.
1995년 10월 마지막 날에 필자와 2번째 만남을 가진 허영모.

고인이 필자를 찾은 2번째 자리는 가수 이용의 노래처럼 2015년 ‘10월의 마지막 밤’에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술 한잔 대접하고 싶다’는 그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황급히 목적지로 향했다. 그와 새벽 3시까지 통음하면서 그의 한 맺힌 사연을 묵묵히 들었다.

빈민촌에서 태어난 허영모

그가 태어난 순천시 왕지동은 인근 달동네처럼 몇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빈민촌이었다. 영모가 처음 복싱에 입문했을 때 순천 맹호체육관에는 비슷한 또래에 이성칠이란 복서가 있었다 했다.

스펙이 뛰어난 이성칠과 스파링할 때마다 영모는 연신 두들겨 맞으면서 한뼘씩 성장했다. 중학교 졸업반인 1979년에는 전국대회 모스키토급(42Kg)을 석권했다. 담금질을 많이 당한 쇠붙이가 강철로 변모하듯 ‘메기효과’를 통해 진일보한 것이다. 1980년 영모는 순천 금당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은 등록금조차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해 허영모는 김명복 박사배와 전국체전(코크급) 결승에 진출, 김종옥과 최점환에 판정패해 준우승에 머문다. 2차례 뼈아픈 패배를 통해 영모는 패인을 연구, 분석하면서 더 한층 성숙한 복서로 거듭 태어났다. 1981년 5월 17일 그는 원주 치악체육관에서 벌어진 김명복 배 결승에서 숙적 최점환과 재대결해 2회에 한차례 다운을 빼앗는 등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우승과 함께 대회 최우수복서에 선정된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허영모 선수(왼쪽).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가운데 있는 분이 박형춘 대표팀 코치.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허영모 선수(왼쪽).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가운데 있는 분이 박형춘 대표팀 코치.

경쾌한 스탭, 속사포 스트레이트 ‘장기’

이후 경쾌한 스탭에서 속사포처럼 터지는 타점 높은 스트레이트로 제8회 김명복 박사배, 제60회 전국체전 제30회 학생 선수권 등 3관왕을 차지한 상비군 출신의 한정훈을 비롯, 88 서울 올림픽 금메달 김광선, 85년 월드컵 금메달 오광수등 역대급 복서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라이트플라이급을 평정한다,

그는 1981년 11월 라이트플라이급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몬트리올 월드컵 복싱대회에 처녀 출전했다. 그리고 발군의 기량으로 파죽의 3연승을 질주하며 결승에 올랐으나 불가리아의 무스타포프와 접전을 펼친 끝에 판정패했다. 하지만 소중한 은메달을 획득, 국제무대에서 화려한 신고식을 올린 것이었다. 1982년 고교 졸업반인 허영모는 그해 5월 뮌헨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 4강전에서 다시 무스타포프에 패배를 당한다. 전열을 추스린 영모는 두달 뒤에 개최된 아시아 선수권대회, 10월에 벌어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 아시아 무대를 평정했다. 이런 허영모를 현장에서 지켜본 박형춘 대표팀 코치는 “허영모는 발과 손 그리고 눈이 빠른 아마복싱에 특화된 천부적인 자질을 보유한 종합예술품”이라는 극찬을 내리기도 했다.

한국체대에 진학한 1983년 4월 플라이급으로 체급을 올린 허영모는 제9회 킹스컵(태국) 국제복싱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해 10월 로마에서 벌어진 월드컵 국제 복싱대회 결승에서 쿠바의 페드로 레에스와 격돌했는데,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판정패를 당한다. 이때 허영모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링 바닥에 주저앉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했다.

불운은 이어졌다. 1984년 LA 올림픽 대회에 출전한 허영모는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LA로 출발하기 일주일전 박대호와 벌인 마지막 스파링에서 오른손에 골절상을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출국 3일 전에는 페더급에 선발된 박형옥과 맥주 한잔을 마셨는데, 그만 독감으로 전이(轉移)됐다. 미국으로 가는 기내에서 담요를 뒤집어쓸 정도로 독감이 심했던 그는 결국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면서 올림픽 8강에서 터키 선수에게 판정패했다. 올림픽 메달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두번째 대결에서 문성길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는 허영모(오른쪽).
두번째 대결에서 문성길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는 허영모(오른쪽).

천하무적 문성길과의 3차례 대결

귀국한 영모는 밴텀급으로 체급을 올려 1984년 12월 국가대표 선발전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 체급에는 천하무적 문성길이 견고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와의 첫 대결에서 처음에는 허영모의 페이스대로 경기가 진행됐다. 그러나 2회에 채용석 주심에 의해 파울을 당한 끝에 결국 2대 3 판정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2번째 대결은 1985년 7월 서울 월드컵 선발전 결승전에서 이뤄졌다. 이날 경기가 벌어진 문화체육관에는 입장권 예매 문의가 쏟아졌다. 당일 오전 10시에 현장판매로 이뤄진다고 알렸지만 한 장에 1500원하던 일반석 티켓 1500장과 3000원인 특석 200장이 금세 다 나가버렸다. 아마추어 복싱사상 최초로 암표상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MBC 방송국은 이례적으로 7백만원의 중계료를 지불하면서 실황중계를 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모은 대결이었다.

이 경기는 사실 허영모의 1회 RSC승을 선언해도 무방한 경기였다. 초반 ‘패스트(fast) 스타터’인 허영모가 ‘슬로(slow) 스타터’인 문성길을 상대로 2차례 다운을 빼앗고 경기 중반 회심의 어퍼컷을 명중시켰지만 조석인 주심이 이를 묵인하고, 경기를 속행시켰다. 만일 주심이 정상적으로 문성길의 다운을 인정했다면 규정에 의해 허영모의 1회 RSC승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체력이 우세한 문성길은 막판에 전세를 역전시키면서 2차전도 3대2 판정으로 승리를 차지했다.

후에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한 조석인 심판위원에게 이날 경기의 판정을 이유를 물었다. 그는 “문성길이 고교 시절(목포 덕인고) 자신의 제자인 최주영(익산 남성고)에게 2차례나 석연찮게 패해 일종의 보상심리도 작용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리고 3회에 클린치를 남발하는 영모에게는 파울을 주려고 하자 영모가 불쑥 “선생님, 한 번만 봐주세요”라고 말하면서 애원하는듯한 모습을 보여 차마 벌점을 줄 수 없었던 상황도 전했다.

이들의 3차전은 1986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겸 아시안게임 선발전 경기였다. 태릉선수촌에서 벌어진 3차전은 문성길의 군말 없는 판정승이었다. 문성길은 그해 12월 프로행을 선언했다. 이에 허영모는 의욕을 상실하고만다.

선배 신준섭(왼쪽)과 함께 사진을 남긴 허영모.
선배 신준섭(왼쪽)과 함께 사진을 남긴 허영모.

또다른 꿈 ‘교직생활’...55년의 짦은 삶

그는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제1회 서울컵 대회에서 소련의 아르테미 에프에게 판정패를 당하며 동메달을 따는데 그쳤다. 금메달은 당시 김승미 사단의 황태자라 불리던 서정수였다. 그는 소련의 아르테미 에프 선수를 꺾고 우승을 차지, 세대교체의 기수가 됐다. 결국 올림픽선발전에서 서정수, 변정일과 물고 물리는 3파전을 펼친 끝에 허영모는 출전이 좌절된다.

선수 생활을 접은 허영모는 1989년 여도중학교에 공채로 들어가 교편을 잡았다. 선수 생활 때 받은 각종 트로피와 메달을 폐기처분하고 복싱과 인연도 완전히 끊었다. 그리고 1990년 자신의 모교 순천금당고에서 음악을 전공한 김자경 교사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2005년 아내와 사별했다. 2남 1녀를 둔 허영모는 2018년 10월 위암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 지난 2019년 3월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소천하기 몇 달 전 필자에게 전화가 왔다. 신준섭 선배가 찾아와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하면서. 그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유언은 ‘짧은 생, 잘 살고 간다’란 한마디였다고 한다. 저 세상에서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우리 친구 영모.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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