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체급 석권의 김민기 대(對) 헤비급 지존 채성배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20여년 만에 모습을 공개한 채성배 8체급 석권 김민기 체육관에서 만나 두 선수 3차례 맞대결해 1승1패 1무 “세계대회 헤비급에서도 통한다” 보여줘
20여년 만에 얼굴 내민 채성배 선수
최근 한국 복싱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 헤비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후배 복서 채성배를 만나러 경기도 구리시로 향했다. 복싱과 인연을 끊고 지내는 채성배가 자신의 조카를 구리의 ‘김민기 복싱체육관’에 입관시키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는 채성배의 국가대표 시절 은사인 박형춘 전대표팀 코치를 모셨다.
1940년 보성 출신으로 ‘복싱계 페스탈로치’라 불리는 박 코치는 1982년 대표팀에 들어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까지 12년 동안 선수촌에서 최장수로 있으면서 자라나는 선수들을 지도한 분이다. 그는 1987년 대표팀에 합류한 19세의 새내기 채성배를 정성을 다해 지도하며 기본을 탄탄하게 구축시켰다. 필자가 채성배를 득달같이 찾아간 이유는 그가 은퇴한 지 20여년 되도록 한 번도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많은 이들로부터 궁금증을 낳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필자와 그의 만남에 가교 역할을 한 이는 구리시 인창동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김민기 관장이다.

8체급 석권의 전설 김민기
1971년 전남 해남 출신인 김민기 관장은 서울체고, 한국체대, 대전중구청을 거쳐 15년이란 긴 현역 생활을 하면서 8체급을 석권한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말이 8체급이지 상상이 가는가. 그는 아마복싱에서 45kg 코크급부터 시작해서 54kg 밴텀급, 57kg 페더급, 60kg 라이트급, 63.5kg 라이트웰터급, 75kg 미들급, 81kg 라이트해비급. 그리고 91kg이상 슈퍼헤비급까지 뛰며 펀치와 테크닉을 자랑했다.
이 두 사람은 현역시절 모두 세 차례 맞대결을 펼쳐 1승 1무 1패를 기록한 호적수이자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김민기는 서울체고 졸업반인 1989년 푸에르토리코에서 개최된 제5회 세계청소년 대회에 라이트웰터(LW)급 대표로 출전하는 등 고교 시절 7관왕을 달성했다. 한마디로 학원 스포츠를 평정한 복서였다. 1990년 한국체대에 진학한 그는 왼손잡이 복서라는 특징 때문에 일찌감치 ‘제2의 신준섭’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해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선발전에서 제2회 서울컵 대회 우승자인 김재경에 판정승을 거두고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본선 준결승전에서 미국의 토마스 티번과 맞대결해 5 대 0 판정승으로 결승에 진출한다. 하지만 결승에서 필리핀의 복병 사미즈에게 판정패했다. 이어 1993년 4월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중국 국제복싱대회에서 3연승(2KO)을 달리며 결승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쿠바의 쿰바 반테도와 접전 끝에 석패하고 만다.
김민기는 그해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태평양 국제복싱 대회에 준결승 전에서 러시아 선수와 맞대결에서 일방적인 페이스로 주도권을 잡고 맹공을 펼쳤지만 텃세에 밀려 또 판정패를 당했다. 이 때 분개한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신준섭 대표팀 코치가 링 위에 올라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때는 국제 대회에서도 심판 판정에 문제가 적지않았다. 동메달을 딴 김민기는 대회 종료후 이례적으로 대회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돼 아쉬움을 달랬다.

3년 선후배간 3차례 맞대결
채성배와의 첫 맞대결은 그가 복싱계 명장 한정훈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대전중구청 소속이던 1995년 7월 벌어진 제25회 대통령배 4강전에서 이뤄졌다. 여기서는 6 대6 무승부를 기록했다(유효타수에서 채성배는 29대 24로 우세했지만). 이어 1997년 78회 전국체전 슈퍼헤비급으로 출전한 김민기는 준결승에서 채성배와 2번째 격돌을 벌였는데 이번에는 판정승을 거뒀다. 결승전에서도 김민기는 88서울올림픽 헤비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던 백현만을 4회 RSC승으로 제압했다.
다음해인 1998년 전국체전이 제주도에서 열렸다. 김민기는 8강전에서 채성배와 3번째 맞대결을 펼친다. 이번엔 만 30세의 노익장을 과시한 채성배가 김민기를 판정으로 잡고 1승 1패 1무의 균형을 맞춘다. 프로야구에서 8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최동원과 선동렬이 3차례 맞대결 1승 1무 1패를 기록했듯이 이들도 3차례 맞대결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성적표를 기록했다.
당시의 시합에 대해 김민기는 “채성배 선배가 어깨부상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패했다”며 자신은 채성배 선배와 견줄만한 수준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두 선수 사이좋게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세계대회 첫 헤비급 메달을 따다
김민기와 맞대결을 했던 채성배는 1968년 12월 16일 전남 보성 출신이다. 보성은 임진왜란 때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머물렀고 결국 해전을 승리로 이끈 호국의 성지이자 이순신 장군의 처가(妻家)가 있던 곳이다. 채성배의 생일도 12월 16일로, 이순신 장군이 1598년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날과 같다.
채성배는 1984년 보성농고 1학년때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을 지낸 신우식 체육교사의 지도로 복싱을 시작했다. 당시 180㎝가 넘는 거구의 채성배는 복싱 입문 1년 만에 제35회 학생선수권대회 출전 헤비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년뒤 졸업반 당시엔 제67회 전국체전, 제9회 김명복배 88후보 선발전에서 거푸 우승을 차지하면서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음해 호남대학교에 진학하는 데, 그 해는 ‘공포의 87학번’이라 불리는, 채성배를 비롯 이재혁, 박성춘, 김석호, 양석진, 조동범, 홍성식, 박종심, 김장섭, 박기봉, 이훈 등 한국 복싱사상 최고의 유망주들이 대거 출현한 해였다. 채성배는 그해 국가대표로 발탁돼 10월 핀란드 국제대회에 처음 출전했다.
1988년은 채성배로서는 서울올림픽에서 최고점을 찍은 해였지만 한국 아마복싱은 김승연 협회장의 퇴임과 맞물려면서 세대교체의 진통을 겪었던 해였다. 이때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인물이 김승미 감독이다.

채성배는 1888년 12월 안정현에 2회 RSC승을 거두고 세대교체의 핵심전력으로 급부상했다. 1969년 나주 출신의 안정현은, 이번 항조우 아시안게임의 영웅이자 셔틀콕 여제 안세영의 부친이다. 1989년에 193㎝의 신장으로 탈아시아급 피지컬을 보유했던 채성배가 선수촌에 입촌하자, 김 감독은 전통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는 그에게 허리와 무릎을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면서 바위처럼 묵직한 웨이스트 피봇(Waist pivot) 카운터 펀치로 반격하는 스타일로 재무장시켰다. 김 감독의 새로운 지도를 흡수한 채성배는 아시안게임 금메달 민병용, 올림픽 대표 정승원과의 스파링을 통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 자신감을 얻은 채성배는 1989년 북경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파키스탄의 압바스를 1회 KO승을 거두면서 국제무대에서 첫 금메달을 수확하기도 했다.
쿠바의 전설 펠릭스 사본을 만나다
그는 이어 각종 국내 선발전에서 마종효, 안정현, 이광중, 이종걸, 박성준 등 강적들을 차례로 잡아내면서 박준호, 고영삼, 진명돌, 강기호 등 동료 복서들과 ‘호남대 독수리 5형제’를 형성했다. 1990년 제2회 서울컵 대회와 북경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채성배는 1991년 11월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제6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 8강전에서 독일의 강타자 베르트 토이체트를 23 대 16으로 꺾고 복싱사상 최초로 헤비급 무대에서 동메달을 확보하기도 했다. 비록 결승 진출 길목에서 만난 네덜란드의 반데 리즈에 패했지만, 그의 입상은 미들급 이상의 중량급에서도 통할 수 있는 실력을 과시한 쾌거 중에 쾌거였다. 당시 헤비급 우승은 쿠바의 펠릭스 사본이 차지했다.

채성배는 그 유명한 전설, 펠릭스 사본과도 대결한 적이 있다. 1992년 3월 미국 템퍼에서 개최된 아마복싱 세계도전자대회에서 세계선수권 6연패 위업을 달성한 ‘아마복싱의 타이슨’이라 불리는 극강의 펠릭스 사본을 만났다. 하지만 1회에 세컨에서 타올을 던지는 바람에 경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심기일전해 제3회 서울컵 대회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바로셀로나 올림픽의 예비고사를 통과했다. 김승미 감독은 올림픽 본선 결승전에서 다시 펠릭스 사본을 만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1회전에서 만난 상대가 예전에 호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패한 적이 있는 네덜란드의 반데 리즈였다. 이 대결에서 채성배는 14대 13의 근소한 차이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사본과의 복수전은 없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난 채성배는 1998년 전국체전 금메달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그 다음해에 기업체의 부장으로 근무하다가 수년 전부터 구리시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 같은 시대 라이벌이자 3년 후배인 김민기는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후배양성에 여념이 없다. 지나간 세월은 말이 없고, 추억만 애잔하게 남았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중년에 접어든 두 노병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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