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 농락한 세계 첫 ‘대학생 챔프’ 박찬희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멕시코 복싱영웅 칸토, 에스파다스 제압 화려한 개인기·변칙기술...첫 4차방어 성공 ‘국민가수’ 조용필과도 친하게 지내기도
천하장사 이준희도 부러워한 복싱영웅
수도권에 엄청난 물 폭탄이 쏟아져 난리가 났던 지난 8월 중순 한국 프로복싱의 8대 챔피언 박찬희를 만났다. 이번 주 <더 칼럼니스트> 주인공은 바로 박찬희다. 그를 주제로 칼럼을 쓸려고 하니, 수년 전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한 박찬희의 한영고 동기동창이자 이만기, 이봉걸과 80년대 민속씨름 트로이카를 형성한 천하장사 이준희 감독과 오찬하며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이 감독은 그 자리에서 “종목이 달랐지만 박찬희가 한영고에 재학 중일 때 그는 모든 재학생들에게 선망(羨望)의 대상이었다”면서 박찬희의 각종 대회 수상경력 등 복싱 이력을 줄줄 나열했다. 천하장사 이준희 역시 그를 선망했던 학생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에 필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1957년 3월 대구에서 태어난 박찬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올라와 선린중 3학년을 다니던 중 동신 체육관에서 복싱에 입관한다. 이때 비슷한 시기에 전남 화순에서 상경한 박인규와 함께 이한성 사범의 지도를 받으며 동문수학한다.
1973년 한영고에 진학한 박찬희는 그해 서울 신인과 전국 신인대회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54회 전국체전 서울시 선발전에서 문명안(천호상전)의 노련미에 말려 완패하는 좌절을 겪게 된다. 이때 박찬희는 링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첫 패배의 아픔을 달랬다. 문명안이란 선수는 그해 5월 이란(테헤란)에서 개최될 제3회 아시아 청소년복싱대회에 앞서 열린 대표 선발전에서 밴텀급의 박인규와 함께 우승을 차지한 베테랑이었다. 신인대회에 참가한 새내기 박찬희와는 노는 물이 확연히 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찬희는 긁지 않은 복권이었다.
박찬희를 꺾고 서울 대표에 선발된 문명안은 전국체전 본선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하며 기량을 마음껏 자랑했다. 반면 패배의 아픔을 성장통으로 달랜 박찬희는 절치부심, 이듬해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1974년 4월 박찬희는 테헤란 아시안게임 선발전에 출전, 결승에서 김치복 (육군)을 꺽고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돌풍을 일으켰다.
테헤란 아시안 게임 본선에서도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결승에서 박찬희는 이란 선수마저 꺾고 대망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기수(당시 성북고)에 이어 2번째 고교생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세간의 주목은 당연한 듯 했다.
하지만 이후 박찬희는 유옥균, 박인태, 강희용 등에 연거푸 패하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냉탕과 온탕을 경험한 박찬희는 한영고 졸업반인 1975년 제56회 전국체전 플라이급 결승에서 전북 대표 김완수를 판정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다음해에 동아대에 진학한 대학생 박찬희는 태국에서 열린 킹스컵 복싱대회 결승에서 1975년 아시아선수권 은메달리스트인 파야오 푼타라트(태국)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두며 대회 최우수복서에 선정된다. 탄력을 받은 그는 그해 7월 벌어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올림픽대회에 참가했으나, 라이트 플라이급 8강에서 쿠바의 헤르난데스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끝에 2대3 근소한 판정으로 패배를 당했다.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줬던 헤르난데스가 끝내 금메달을 획득했으니, 불운한 대진운이 한몫한 셈이었다. 그 대회에서 북한의 이병욱은 준결승전에서 태국의 푼타라트를 2회 RSC 로 잡고 결승에 진출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킹스컵대회에서 박찬희에게 완패한 태국의 푼타라트는 동메달을 따내 태국 올림픽 역사에서 전 종목 통틀어 최초의 메달리스트가 된다.
프로 전향...11전만에 세계 타이틀 도전
박찬희는 1977년 2월 킹스컵대회에 출전, 편파판정의 희생양이 되면서 메달권에서 탈락하자 그해 7월 전격적으로 프로로 전향했다. 그리고 1979년 3월 18일 22살의 박찬희는 11전 만에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다. 당시 31살의 나이로 68전 63승(15KO) 3패 2무를 기록중이던 WBC 플라이급 챔피언 미구엘 칸토의 15차방어전 도전자로 낙점된 것이다.
미구엘 칸토가 누구던가. 그는 한마디로 링위의 대학교수라는 별명이 붙은 선수였다. 1948년 1월 멕시코 유카탄반도 지역에서 태어난 칸토는 14차 방어전 중 9차례를 원정 방어로 치러낸 최고 기량의 선수였다. 흔히 당시 우스개소리로 하던 말로, 브라질의 사내아이는 축구공을 가지고 태어나고, 멕시코 사내아이는 복싱글러브를 끼고 태어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칸토가 태어난 멕시코는 당시 복싱 최강국이었다.

1975년 1월 오쿠마 쇼지(일본)를 꺾고 세계 정상에 오른 칸토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명복서였다. 이런 역대급 복서인 ‘링의 대학교수’ 칸토를 상대로 대학생 복서가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예상과 결과는 너무 달랐다.
박찬희는 신들린 듯한 특유의 변칙복싱으로 상대의 맥(脈)을 찌르고 흐름을 꿰는 전술로 압박한 끝에 ‘링의 대학교수’ 칸토에 완승했다. 마침내 대한민국 제8대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는 성대한 대관식(戴冠式)을 치른다. 당시 대학생 세계챔프는 선망 그 자체였다. 박찬희는 대학 재학중 세계정상에 오른 세계최초의 복서였다. 이 기록은 1979년 <기네스북>에까지 등재될 정도였다.
한국 첫 4차방어 성공 챔피언으로
승리는 계속됐다. 1979년 12월 16일 전WBA 플라이급 챔피언을 지낸 ‘무쇠 팔, 무쇠 다리, 로켓 주먹’으로 무장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던 구티 에스파다스(멕시코)를 상대로 롱런의 최대 고비인 3차 지명방어전을 펼친다. 41전 33승(24KO) 5패 3무를 기록한 에스파다스는 KO율 62%를 자랑하는 하드 펀처였다. 자신의 세계 타이틀 방어기록인 4차전까지 전부 KO로 장식한 복서였다.
그와의 타이틀전이 벌어졌던 12월 16일, 그날은 역사적으로 뜻깊은 날이기도 했다. 바로 1598년 12월 16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대승한 후 순국(殉國)한 날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서거, 12 ·12사태로 사회는 극도로 어수선했다. 타이틀전은 또 1970년대의 마지막 세계타이틀전이기도 했다. 필자는 당시 중계방송을 보면서 경기 진행에 앞서 짧은 시간이나마 나라를 지켜준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도와 묵념시간이 있기를 바랐다. 나라의 앞날도 불투명했던 그 시기. 짧은 순간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다.
다행히 이 경기에서 박찬희는 전광석화처럼 터진 날카로운 좌우 연타로 에스파다스를 2회 2분 44초만에 링 바닥에 눞히고 롱런의 최대 암초(暗礁)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이때까지 그를 지도한 부산 동아대 손영찬 복싱 감독은 박찬희에게 졸업 후 동아대교수직을 보장해 줄테니 동아대 대학원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박찬희는 대신 손영찬 감독과 결별하고 상경, 강준호 선생의 조련을 받으며 4차방어전을 준비한다. 이 제안을 박 선수가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세계프로챔피언 출신 대학교수가 됐을까? 이 내용은 훗날 손영찬 감독과 필자가 대화하는 자리가 있을때 알게 된 사실이다.
서울로 올라온 박찬희는 1980년 2월 필리핀의 아로살을 상대로 4차방어전을 벌여 판정승을 거두면서, 한국복서론 최초로 마(魔)의 4차 방어에 성공한다. 당시 4차 방어 성공은 종전 김성준 선수가 3차방어에 성공한 기록을 넘는 최다방어 기록이었다. 얼마 후 박찬희는 공중파 방송 MC 이택림이 진행하는 방송프로에 가수 조용필과 동반 출연할 정도로 국내 최고의 인기선수가 됐다.
조용필은 이미 ‘국민가수’ 반열에 올라와 있었다. 1970년 통영 출신의 가수 김해일이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곡을 남기고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호텔 화재로 사망했고, 그 노래도 함께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작곡가 황선우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노래 이름을 바꿔 달았고 개작(改作)까지 해 1975년 조용필의 앨범에 수록했다. 조용필이 발표하자 때마침 불어닥친 80만 재일동포 모국방문과 맞물려 그 곡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대히트를 쳤다.

이런 이력이 있는 톱가수 조용필은 박찬희의 청동상처럼 균형 잡힌 몸매에서 뿜어내는 연타에 매료돼 박찬희의 팬이 됐다. 가끔 망중한을 이용, 그의 경기를 참관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박찬희와 교류를 하게 된다. 이후 서로의 자택을 오가면서 두터운 친분을 쌓은 조용필은 박찬희에게 “앞으로 5차 방어의 벽을 넘어 15차 방어라는 대업에 성공해주길 당부”하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아직도 잊지못할 이름 ‘오쿠마 쇼지’
방송에 출연한 두달 뒤인 4월 멕시코의 모랄레스를 상대로 5차 방어에 성공한 박찬희는 ‘멕시칸 복서 킬러’란 닉네임까지 얻었다. 복싱 최강국 멕시코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박찬희는 한물간 노장 복서 오쿠마 쇼지를 상대로 ‘운명’의 6차 방어전을 벌인다.
1951년생으로 당시 29세였던 오쿠마 쇼지는 1974년 10월 베툴리오 곤잘레스를 꺾고 WBC 플라이급 정상에 올랐지만 1975년 1월 1차방어전에서 미구엘 칸토에게 나가떨어졌다. 야인으로 전락한 후 알폰소 로페즈(파나마), 미구엘 칸토(멕시코), 곤잘레스(베네주엘라)가 보유했던 세계타이틀에 5차례에 걸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특히 곤잘레스에게 당한 12회 KO패는 상당히 충격적인 패배여서 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오쿠마가 다시 타이틀을 노렸지만, 미구엘 칸토, 에스파다스 등 최강의 경쟁자들을 잇따라 꺾은 박찬희는 오쿠마와의 대결을 쉬어가는 방어전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23살의 젊은 태양(太陽) 같았던 박찬희는 29살의 저무는 석양(夕陽) 오쿠마에게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를 펼쳤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바닥까지 드러난 스테미너로 9회 53초 만에 KO패하며 세계 타이틀 벨트를 내주게 된다. 사실상 그 경기로 박찬희 복싱인생이 마침표를 찍었다.

1979년 3월 타이틀을 획득하고 1980년 5월 타이틀을 상실할 때까지 1년 2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무려 7차례의 세계 타이틀전을 강행한 무리수가 롱런 가도에 제동을 걸었다는 자성론(自省論)도 당시엔 나왔다. 특히 1980년 4월 13일 치러진 5차 방어전에서 15회전 혈투를 치른 후 불과 35일만인 5월 18일에 오쿠마와 6차 방어전을 치른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6차례의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면서 박찬희는 1980년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금액인 1억2천만원이라는 파이트머니를 받았다. 1980년 당시 강남 대치동 34평 은마아파트의 분양가가 2천만원 정도하던 시절이었다. 또 프로야구가 태동하기 직전인 1981년 실업야구 최고 연봉자인 김봉연(한국화장품)의 연봉이 480만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박찬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은퇴 후 박찬희는 대학교수가 아닌, 체육관 운영 일을 하다 접고, 이후 복싱 TV해설을 했다. 틈틈이 공군사관학교에 객원교수로 출강하면서 복싱 저변을 넓히는 활동을 하다가 최근에는 영등포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후배들에게 재능기부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박찬희는 1970년대 플라이급 세계 복싱을 주름잡았던 멕시코의 쌍두마차인 미구엘 칸토와 에스파다스를 제압했다는 업적 하나만으로도 국내 프로복싱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레전드 복서라 할 것이다. 남은 여생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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