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신의(信義) 저버릴 수 없었던 오장균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18년간 48전 최장기록 세운 오장균 매니저 요구 거절 끝에 타이틀 실패로 어려운 상황에도 ‘사나이의 신의’ 빛나
지난 주말 필자는 40년 지기로 국내 챔피언 세 차례, 동양챔피언 두 차례를 지낸 전 WBC 밴텀급 3위 오장균을 취재하러 충남 조치원으로 향했다. 오장균을 만나 인근인 세종시에서 강경덕 관장이 운영하는 복싱체육관에 들러 함께 담소를 나눴다. 강 관장의 선친인 강창수 전 조치원체육관 관장은 오장균을 발탁, 조련시킨 평생의 스승이었다.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산 2개까지 팔아가면서 선수양성에 매진했다. 오장균을 비롯 민영천, 김정환, 오석교등 굵직한 대형선수들을 잇달아 배출한 그는 지난 2007년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평생 복싱 외길을 걸은 올곧은 복싱인이었다. 강경덕 관장은 선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2대에 걸쳐 복싱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103회 전국체전 고등부 60Kg급에서 세종시 대표로 선발된 유망주 이영웅 선수를 비롯, 현재 70여명의 관원들을 조련하고 있다.

유망주를 서울로 떠나보낸 스승
1962년 3월 26일생인 오장균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복싱사상 최초로 메달을 따낸 한수안 선수가 태어난 충북 청원군 출신이다. 세광고에 재학 중이던 1981년 6월 강창수 관장이 운영하는 조치원체육관에 입관, 그해 10월 이동춘과의 프로 데뷔전에서 4회 판정패를 당한 채 복싱인생을 시작한다. 1963년생 경북 성주 출신의 이동춘은 훗날 1985년 3월 WBA 주니어 밴텀급 챔피언 카오사이 갤럭시(태국)와 타이틀전을 벌이는 등 통산 47전 38승(21KO) 1무 8패를 기록한 강자였다. 3차전에서도 오장균은 박성순에게 4회 판정패를 당하며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한다.
‘링의 대학교수’라 불리던 WBC 플라이급 챔피언 미구엘 칸토도 프로에서 1차전과 3차전을 연달아 패배한 후 이를 디딤돌 삼아 세계정상까지 올랐듯 오장균도 두 차례 패배라는 쓴 보약을 들이킨 후 8연승을 질주한다. 그러나 1983년 9월 양홍규과의 시합을 시작으로 박윤호, 장태일과 치른 3연전에서 2무 1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자 스승인 강창수 관장은 결단을 내린다. 필자가 소속되어 있던 서울의 88체육관(관장 김철호)으로 오장균을 유학 보낸 것. 넓고 큰 물에서 원대한 꿈을 펼치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이때 필자는 오장균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15전 9승(2KO) 3무 2패의 평범한 성적을 기록중이던 그는 1984년 5월 천정우를 8회 판정으로, 9월에는 김기창을 역시 판정으로 잡으며 기염을 토한다. 김기창은 174㎝의 장신에 날카로운 스트레이트를 보유한 복서로 1986년 5월 태국에서 벌어진 동양 주니어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츄바타나를 9회 KO로 잡고 정상에 등극하게 될 복서였다. 88체육관 소속으로 4연승을 달린 오장균은 1985년 3월 수원에서 한국 주니어 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당시 챔피언은 5전 5승 (4KO)을 기록한 방승현이었다.
방승현은 1984년 11월 장태일을 판정으로 꺾고 주니어 밴텀급 국내 정상에 올랐는데, 오장균이 그의 1차 방어전 상대로 나선 것이다. 방승현은 서울체고 재학시절인 1980년 제5회 김명복 박사배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안영수, 이해정과 함께 금메달을 획득한 기본기가 탄탄한 정상급 복서였다. 이 대결에서 오장균은 방승현의 연타를 연체동물처럼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하는 절묘한 능력을 발휘하며 판정승을 거둔다. 오장균이 치른 48전의 경기중 단연 백미(白眉)인 경기였다.
막역한 직계후배가 라이벌로
그해 5월 세계랭킹전을 준비하던 중, 오장균은 잠시 복싱을 접고 고향인 조치원으로 낙향했다. 담당 트레이너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태극약품 체육관으로 말을 갈아탄 오장균은 1987년 3월 박영덕을 5회 KO로 잡고 한국밴텀급 챔피언에 오른다. 이어 1989년 7월 오장균은 조치원체육관에서 동고동락한 후배 복서 민영천과 라이벌전을 펼친다. 조치원 출생의 민영천은 1986년 전국체전 준결승에서 훗날 WBC 밴텀급 챔피언에 오르는 서울 대표 변정일에게 판정패를 당하자 그해 11월 프로로 전향했고 그해 전국 신인왕전에서 최우수복서에 선정된 유망주였다. 상승세의 민영천은 다음해인 1988년 3월 WBC 플라이급 챔피언을 지낸 프랑크 세데뇨, 9월에는 WBA 밴텀급 챔피언을 지낸 루이시토 에스피노사를 각각 판정으로 잡으며 13연승(8KO)을 기록중이었다.
두 복서는 조치원체육관의 강창수 관장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복서였다. 어렵던 시절 체육관에서 라면에 계란을 푼 짝퉁 삼계탕을 나눠 먹던 친한 친구였다. 이 대결에서 오장균은 민영천에게 첫 회부터 녹다운을 당하며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태세를 정비한 4회 이후 안정된 경기운영으로 경기주도권을 잡아 초반 실점을 만회한 끝애 판정승을 거둔다. 필자가 6년 전 취재차 두 복서를 찾아 조치원을 방문해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는데, 안타깝게도 민영천은 3년전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30세에 세계타이틀전에 나섰지만
WBC 밴텀급 3위에 오르며 33전 26승(13KO) 4패 3무를 기록중이던 오장균은 1989년 9월 일본에 원정, WBA 밴텀급 5위였던 18전 17승(11KO) 1패의 하다나카 기요시와 세계랭킹전을 벌인다.
1967년생인 하다나카는 1987년 프로에 데뷔, 5연속 1회 KO행진을 펼치며 주목을 받은 복서였다. 15연승 (10KO)을 기록중이던 하다나카는 1988년 9월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길베르토 로만(멕시코)에 도전했으나 실패했지만 오장균과의 대결이후인 1991년 2월 35전 31승 (21KO) 4패를 기록중이던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페드로 데시마(아르헨티나)에 8회 KO승 하며 세계정상에 오르게 되는 복서다. 이 대결에서 오장균은 하다나카를 2차례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텃세에 밀려 무승부에 만족해야 했다.
돌고돌아 1992년 7월 30일 30세를 넘긴 오장균에게 드디어 세계타이틀전 기회가 찾아온다. 상대는 WBC 밴텀급 챔피언이자 31승(17KO) 10패를 기록한 멕시코의 빅토르 라바날레스. 그러나 그는 이 경기에서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력을 펼쳐 도전에 실패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경기를 치르기전 오장균은 수개월 전부터 스폰서도 없이 훈련하고 있었다. 그나마 적은 돈이지만 매월 일정액을 지원해주던 선배가 있었는데, 다보볼링장을 운영하던 A씨 였다. 당시 오장균은 보증금 2백만원에 월세 10만원짜기 단칸 지하방에 신혼 살림을 차리고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힘든 시절이었기에 A선배의 도움은 큰 힘이 되었고, 오장균은 그를 위해 1992년 2월 세계 타이틀 전초전인 레오노라(필리핀)와의 대결 때부터 ‘다보볼링장’ 글자가 새겨진 트렁크와 가운을 입고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그의 매니저는 세계 타이틀전에서 ‘익수제약’ 글자가 새겨진 트렁크와 가운을 입고 출전할 것을 요구했다. 예전 시합에서는 그 회사 트렁크와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A선배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그 소중한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다. 오장균은 절대로 그럴수 없다고 맞섰고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한 오장균과 매니저는 결국 시합날까지 냉전상태를 유지했다. 오장균은 홀로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치면서 훈련하고 이따금 신당동에 있는 중앙체육관, 숭인동에 있는 와룡체육관에서 ‘동냥 스파링’을 하면서 결전을 준비했다. 신혼의 부족한 생활비는 주말마다 공사판에 나가 막일을 하며 벌충했다. 1992년 7월 30일 미국 잉글우드에서 벌어진 WBC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오장균은 예상대로 한차례 다운을 당하는등 시종일관 수세에 몰린 끝에 챔피언 라바날레스에 완패를 당했다. 이로써 한국 복서의 미국원정 19연패의 주인공이 됐다.

귀국한 오장균은 그때 받은 파이트머니 7백만원을 임신한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고, 아내는 고깃국 한번 남편에게 제대로 끓여주지 못한 살림살이를 한탄하며 눈물을 쏟았다. 그때 태어난 첫 아이가 조치원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011년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장남 철진 군이다. 타이틀전을 끝으로 잠정은퇴를 선언한 오장균이 2년여가 훌쩍 지난 1994년 8월 전매니저와의 해약서를 들고 불쑥 필자를 찾아왔다. 재기의 페달을 밟은 오장균이 1994년 11월 필리핀의 셀소 고조와 대결에서 1회 KO승을 거둘 때, 필자가 그의 트레이닝을 담당했다. 그런 인연 때문에 오장균은 해마다 5월 15일 스승의날만 되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필자가 기억하는 오장균은 가식도, 꾸밈도 없는 그런 복서다.

18년의 선수생활, 48전의 최장 기록을 남기며
오장균은 1995년 9월 필리핀의 제시 마카를 꺾고 동양 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하기도 했다. 오르내리는 성적을 반복하다 1999년 9월 오쿠시(일본) 전을 끝으로 길고 긴 18년의 현역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복서는 은퇴해서 기록을 남긴다. 3차례에 걸친 국내 챔피언과 2차례에 걸친 동양 챔피언을 지내며 통산 48전 35승(14KO) 9패 4무를 기록한 오장균의 18년 현역복서 생활은 한국프로복싱 최장기록으로 남았다.
18년이란 세월은 프로야구 김응룡 감독이 해태에서 지휘봉을 잡은 기간, 박정희 전대통령의 통치 기간,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강진 귀양살이 기간이기도 했다. 그만큼 길고 긴 세월이다. 오장균은 현재 용역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그의 조치원체육관 선배이자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복싱협회의 양희천 회장은 복싱 볼모지 세종시에 오장균처럼 풍부한 경험과 연륜을 지닌 복싱인이 꼭 필요하다면서, 그가 향후 세종시 복싱발전에 한 축을 담당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혼이 맑아 솔직한 인생을 살아온 오장균 챔프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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