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당신들은 편안합니까?”

[김석희의 “이분법 넘어” - in Betweenness] 이민자등 늘어나는 소수자...포용의 딜레마 우리가 포용할까, 서로가 수렴할까 진정한 포용 위한 우리의 인식은

한국에 시집온 동남아 출신 며느리의 한국 적응 생활을 다룬 EBS의 '다문화 고부열전'의 한장면. 사진=EBS 캡쳐
한국에 시집온 동남아 출신 며느리의 한국 적응 생활을 다룬 EBS의 '다문화 고부열전'의 한장면. 사진=EBS 캡쳐

포용? 동등의 가치를 지향하나요

‘포용’은 범세계적 가치입니다. UN이 제시한 17가지 사회적 가치에도 포함되는 개념이죠. 문화에도 포용이란 개념이 존재합니다. 다른 문화를 배타적으로 밀어내지 않고 공존한다는 뜻이겠지요. 한국사회에서 ‘포용’이라는 단어는 ‘남을 너그럽게 감싸 주거나 받아들임’으로 정의되며 ‘감쌈’, ‘덮어줌’이라는 말과 바꾸어 쓸 수 있다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포용’이라는 단어의 이면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쉽습니다. ‘포용’은 받아들이는 자의 용량이 더 크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포용하는 자와 포용되는 자의 관계는 동등해지기 어렵습니다. 포용하는 자(또는 집단)는 ‘너그러움’을 베풀고 포용되는 자(또는 집단)는 그에 대해 언제까지나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정서가 흔하게 동반됩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누군가를 ‘받아들임’은 그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포용’은 어느 한쪽이 그릇이 되어 어느 한쪽을 담는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포용된 자는 어디까지나 포용하는 공동체에 담기는 대상이므로 끊임없이 그 공동체에 동화되기를 요구받거나 스스로 동화되고자 애쓰기도 합니다. 이즈음에서 포용된 자는 타자로 자리매김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포용’이라는 가치는 태생적으로 타자성을 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외부에서 온 이들, 우리는 어떻게 대하나요

한국 사회가 ‘포용’해야 할 대상이 국가사회의 ‘내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 이주, 취업 이주, 난민 이주 등 국가사회의 ‘외부’와 관련이 있죠. ‘외부’로부터 온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취지에서 방송되는 많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여행이 힘들어지자 중단된 EBS <다문화 고부열전>이나 현재 방영 중인 KBS <이웃집 찰스> 등이 대표적인 것 같습니다.

<다문화 고부열전>은 외국인 이주여성의 한국시집살이 적응기를 소재로 하죠. <이웃집 찰스>는 아마도 <다문화 고부열전>을 대체하여 해외 여행 중심이었던 구성을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의 일상을 다루는 쪽으로 보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문화 고부열전>은 주로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여성과 러시아 여성 등 결혼으로 인한 이주여성이, <이제 만나러 갑니다>는 ‘새터민’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굳이 ‘적응’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이들 이주민 출연자 대부분이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지 않고 한국 사람처럼 살아가기를 강요당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탈북인들이 출연해서 남과 북의 서로 다른 생활상, 대한민국 적응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가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고정패널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2021년까지는 탈북자들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출연자는 대부분 한국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했거나 서울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선정되어 한국사회가 북한주민을 ‘포용’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만적입니다. 첫째, 자본주의 사회의 성공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사실상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탈북 정착민의 존재를 덮어버리며, 둘째, 그들에게 불편할 것이 당연했을 서울말이 그들의 내면에 있는 북한말을 덮어버리게 하고, 그 사실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입니다.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한 장면.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한 장면.

한국은 당신의 과거를 지우라 하지 않나요?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언어 반응은 개인의 내부가 아니라 사회적 상황 전체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이주여성의 자녀교육이 모어(문자 그대로 어머니의 말)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국어로만 이루어지는 과정이나 탈북정착민들이 서울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 과정 모두 엄연히 한국사회의 요청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새로이 얻은 ‘한국어’를 가지고 자신의 모체이며 기원인 북한 사회를 철저히 파헤쳐 비판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형태의 자아비판처럼 보였습니다. 북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인도적인 측면에서 당연할 수 있지만, 그 비판이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지금 자신의 과거 정체성을 끊어냈음을 증명하는 용도로 소비된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슬픔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한편 국내 거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형태의 프로그램 MBC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는 조금 다른 시선을 보여줍니다. 백인 중심의 서양인이 주로 등장하고 ‘외국인이 직접 현지인처럼 먹고, 놀고, 즐겨보는 생생하고 신기한 한국 즐기기’를 컨셉으로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제1회 출연자는 jtbc <비정상회담>으로 유명해진 이탈리아인 알베르토의 고향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메이징’하고 ‘뷰티풀’한 한국을 발견합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암모니아를 넣어서 만든 음식 같은’ 홍어를 먹죠. 이 부분에는 시청자인 한국인들의 웃음이 상정되어 있습니다.

MBC 프로그램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한 장면
MBC 프로그램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한 장면

<대한 외국인>은 퀴즈 대결형식으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외국인’들이 등장합니다. <다문화 고부열전>이 ‘우위’ 항으로서의 우리(시어머니의 나라)가 ‘열위’ 항으로서의 그녀들(며느리의 나라)을 찾아가 이해를 베푸는 입장에 섬으로써 ‘그녀들’을 대상화시킨다면,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는 우위 항인 서구인들이 찾아와 한국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여기에서 한국 사회의 인정욕구와 갈망이 포착됩니다. 이에 더하여 <대한 외국인>은 ‘이제는 그들이 우리를 공부하는 시대’라는 우월감을 양산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공동체, 포용 대신 ‘수렴’을 지향해야

시청률을 통해 유지되는 미디어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나 마이너리티의 일상을 방송의 고정 테마로 다루기는 힘들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한국 미디어가 결혼이주 여성이나 탈북 여성처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테마로 다룬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세계화와 지역주의가 공존하는 글로컬리즘의 시대에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21세기 인류가 지향할 바이며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우리 사회도 정책적으로나 인식적으로나 많이 성숙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설령 정책적으로 차별이나 배제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사회적 인식 속에서 타자화되는 존재들, 즉 사회적 약자들은 결코 편안하게 ‘포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포용은 평등을 향해 수렴해가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중단되거나 개편된 프로그램이 엔데믹 시점에서 어떻게 변화해 갈지 궁금합니다.

글쓴이

김석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

김석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 태어나보니 강원도 평창군 미탄이었다. 서른둘에 처음 국제선을 타고 일본에 갔다. 오사카대학에서 언어문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번역가, '어쩌다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유튜브 계정 <문학팔레트>를 운영한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