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거장의 선택’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지막 은퇴작 요시노 겐자부로 책 이름 빌려와 타이틀로 찬사와 동시에 ‘난해하다’는 혹평은 왜? 어린시절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풀어내 ‘자신의 내면’ 솔직히 표현하려 했던 의도

애니메이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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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은퇴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한때 흥행 1위를 기록하는 등 국내 영화 팬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바람이 분다>(2013) 이후 10년 만에 완성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21세기에도 일일이 손으로 그리기를 고집하는 애니메이터 미야자키 하야오. 오랜 시간 우리에게 기쁨을 준 거장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의 은퇴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부터 은퇴를 선언했고 그 후 여러 번 번복해왔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이 작품이 ‘마지막 은퇴작’이 될 듯합니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한국판 포스터(왼쪽)와 미국판 포스터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한국판 포스터(왼쪽)와 미국판 포스터

오이디프스 콤플렉스 소년의 성장과 귀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포스터 외에는 어떤 광고도 하지 않는 마케팅 전략을 썼습니다. 그만큼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평가는 이례적일 만큼 극명하게 양분됩니다.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별로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에 빠진 소년이 어둠의 세계를 떠돌며, 죽은 엄마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성장하고, 그리하여 결국 죽은 엄마와 살아 있는 엄마(이모)를 구하고 생환하는 이야기 입니다. 스토리 면에서만 본다면 크게 어렵거나 난해한 영화가 아닙니다.

시대적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1년 째에 화재로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에 마히토는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의 친가로 이사합니다. 그곳을 지키는 것은 어머니의 여동생 나쓰코였고, 이미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마히토의 고독은 깊어집니다. 그의 방 옆에는 멋진 서재가 있었는데, 서재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공부만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조상의 방이었습니다.

서재 창에서 내려다보면 연못이 있는 정원이 보이고, 거기에 언제나 왜가리가 있습니다. 왜가리가 접근해 오면서 마히토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생깁니다. 마히토는 왜가리를 따라 연못 건너 이상한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죽은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만납니다. 그곳은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마히토의 조상이 구축한 세계입니다.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나무 블록으로 만든 성인데, 그 성이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나무 블록으로 만든 성이 무너지면 세계도 무너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세계는 새로운 관리자가 필요하며 새로운 관리자는 창조자의 피를 이어받은 마히토여야만 합니다. 선조는 마히토에게 그 세계를 이어받기를 종용하나, 마히토는 제의를 거절합니다. 무너져내리는 이상한 세계를 뒤로 하고 소년은 새엄마(이모)를 구출하여 현실세계로 돌아오죠. 어린 시절의 엄마는 마히토를 만나기 위해 자신에게 배당된 시간 속으로 빠져나갑니다.

엇갈리는 평가의 이유

살펴본 것처럼, 스토리만을 생각하면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죠. 그러면 왜 이 영화의 평가를 둘러싸고 이렇게 극명한 대비가 생겨난 것일까요?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평은 언제나 있었던 것이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라는 조금은 화내는 듯한 감상평이 나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어째서 그런 이례적인 평가가 나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의 하나는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와 제목이 일치하지 않고, 그래서 한 번에 와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요시노 겐자부로(吉野原三郎)가 1937년에 발표한 책으로, 내용은 전혀 인용하지 않고 제목만 영화에 빌려온 것입니다. 극 중 죽은 어머니가 남긴 이 책을 주인공이 서재에서 발견한다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제목에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만을 던져둔 채, 영화는 어떤 선명한 대답도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어떻게 살라는 말이지?’라는 질문이 남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애매하거나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영화가 되어 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가지는 관객과의 ‘거리’도 몰입을 방해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와 상당히 다른 부분입니다. 기존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는 스펙타클한 공중부양 장면이나 거대한 존재의 움직임 등을 최대한 화면 바깥쪽(관객과 가까운 곳)에 배치함으로써 관객들을 스크린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예를 들면 <마녀 배달부 키키>의 빗자루 비행, <센과 치히로>의 비대해진 가오나시가 온천장을 휩쓰는 장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거대한 성, 하울과 소피의 공중 댄스, <바람이 분다>의 여러 비행 장면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신이 날 만한 광경들이죠.

'하울의 움직이는 성' 영화 포스터.
‘하울의 움직이는 성’ 영화 포스터.

그런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일단 관객을 함께 공중 부양시키는 듯한 압도적이고 실감 나는 장면이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도입부의 화재 장면과 마히토의 조상이 만든 세상이 무너지는 장면 정도는 손가락에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 장면들은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그중에서도 공들인 장면으로 보이는(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도입부 화재 장면조차 몰입을 용납하지 않고 조기에 단절되어 버립니다.

이 영화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데 사람들의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고, 소년 마히토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불타는 건너편을 보고는 다급히 옷을 입고(바지 입는 장면은 정말 실감나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손으로 그려서 이걸 표현하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람들을 헤치며 병원 쪽으로 달려갑니다. 마히토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다음 순간 영화제목이 스크린에 떠오릅니다. 이 화재 장면은 그렇게 이야기 밖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바로 조용한 농촌이 공간적 배경이 되는데 유독 롱 샷이 많습니다. 가능한 한 관객과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관객과의 거리, 왜 필요했을까?

나는 이 영화가 그간의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를 정리하는 영화, 책으로 말하자면 ‘종장의 결론부’ 같다고 느꼈습니다. 종장을 쓰면서, 후배들에게 이후의 세계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주인공 마히토는 어린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입니다. 아버지가 비행기 부속품 만드는 공장을 했던 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전까지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대부분은 명랑한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배치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가지를 내면에 안고 있으면서 그것을 감추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소년의 어머니와의 관계 같은 것. 분명히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입니다. 이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문제지만, 그런 어둠도 잘 소화한 소년이 결국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치명적’이라 말할 것까지는 없지만, 중요한 부분을 감추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 자각은 있습니다. 나는 그 부분을 영화 속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습니다. 소녀가 가지고 있는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은 몰라도 상관없으니까요. 내가 봐서 좋아 보이는 여성상을 모으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는 거죠. 소년으로 말한다면 원령공주의 아시타카 정도가 있지만, 아시타카는 역시 껍데기인 것입니다.……그러니까 아시타카는 그의 어린 시절이나 양친과의 관계가 전혀 없이 단절되어 있죠.”(『지브리 The Art』 작품설명 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음속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마음에 있었는 것을 영화에 반영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면서 ‘자신은 이대로 중요한 것을 표현하지 못한 채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을 표현했습니다.

한편, 그는 “그냥 자기 회고담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면서 “어떻게 이 덫으로부터 주인공을 빼낼 것인가, 그리고 빼내어 데리고 나온 이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그리는 것이 우리의 테마, 아니 과제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마지막 작품에서 거리를 필요로 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이 드러내지 않았던 자신’을 바라보고 말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니까요.

관객들은 거장에게서 인생과 예술의 정수를 담은 한 마디를 원했을지 모르지만, 정작 그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엄청나게 커다란 메시지를 남기려는 욕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감추었던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이제까지 구축해 온 세계가 안정되고 단단한 난공불락의 성이 아니라, 나무 블록으로 쌓은 성처럼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것임을 표현함으로써 자기자신에 대한 진실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향해 찌꺼기처럼 남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바람이 분다>에서 얼핏 얼핏 고개를 들었던 의문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째서 전쟁 중의 일본을 아름답게 추억하는가? 영화의 배경이 전쟁기인 영화로서는 너무 평화롭고 아름답지 않은가? 하는 것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입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된다든가, 꼭 전쟁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든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평화도 하나가 아니듯, 전쟁 역시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른 체험을 하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주인공 소년 마히토처럼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죠. 전쟁기에도 작은 평화와 성장이 존재하고, 그런 것을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반전(反戰)’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할지라도 그 시절이 전쟁과는 무관한, 아름다운 시절로 추억된다는 것은 반전인사로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를 생각할 때, 조금 의아하거나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가진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무 블록으로 쌓은 성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흔들리는 모든 내면을 고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겸허히 돌아보는 모습. 그래서 더 인상적인 퇴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정말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감독님, 이번이 정말 마지막인가요?!

글쓴이

김석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

김석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 태어나보니 강원도 평창군 미탄이었다. 서른둘에 처음 국제선을 타고 일본에 갔다. 오사카대학에서 언어문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번역가, '어쩌다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유튜브 계정 <문학팔레트>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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