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누구와 연대해야 하는가
‘세계시민주의’ 의식은 비현실적...공허할 뿐 ‘하나의 국민’ 정체성에 국민국가내 연대해야 한국, 정체성 정치로 분열...이민 확대는 위험 ‘대한 사람’끼리 사회연대...다음에 ‘국제 연대’
“모든 사회적 종이 그렇듯이, 같은 사회집단에 사는 대형 유인원 개체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의존하며, 따라서 그들은 서로를 돕고 돌보는 게 이치에 맞다.” - 마이클 토마셀로, ‘도덕의 기원’
사회연대는 사회 구성원이 서로를 위해 책임을 공유하는 일입니다. 사회 구성원은 서로 의존하고 있고, 누군가의 불행은 곧 사회 전체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은 서로의 불행에 함께 대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 구성원’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요?
사실 ‘사회’는 굉장히 모호한 표현입니다. 사회라는 단어는 작게는 가족과 친구 관계부터, 크게는 국가나 전세계까지 모든 인간 집단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실제로 사회학자들도 사회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의 역사를 볼 때 ‘사회’라는 단어는 확인 내지는 정의 가능한 어떠한 구체적 속성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 기이한 역설이다.” - 앤서니 엘리엇, ‘사회론’
이런 ‘사회’ 개념의 모호함 때문에 철저한 개인주의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사회’, 그리고 ‘사회적’이라는 말을 독성 언어라고 경멸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사용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혼동만 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합의된 전문용어 몇 개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단어는 어느 정도 모호합니다. 하이에크가 강조하는 자유 역시 시대와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로 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가 모호한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매 순간 단어의 의미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정의하려 하면,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수학 용어나 다른 추상적 용어를 제외하면, 모든 정의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정의 자체가 붕괴하고 만다.” - 마크 모펫, ‘인간 무리’
“우리의 일상언어에 존재하는 많은 불명확성과 부정확성도 많은 경우 결점이 아닐 수 있다. 높은 수준의 명확성과 정확성은 많은 경우 너무 소모적일 뿐만 아니라 융통성의 여지를 없애기 때문이다.” - 이병덕, ‘표상의 언어에서 추론의 언어로’
‘국민국가’로 경계를 정해야하는 까닭
일반적으로 사회학자들은 사회를 연구할 때 그 경계선을 국민국가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다수 인간이 국민국가라는 영역 안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제도를 갖고 있기에 사회를 관찰하고 연구할 때 국민국가라는 단위가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회학계에서는 ‘방법론적 국민주의(Nationalism)’라고 부릅니다.
곤충을 연구하는 진화생물학자 마크 모펫은 저서 ‘인간 무리’에서 ‘사회’를 “모든 구성원이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정체성에 의해 명확한 소속감을 갖게 되는 특정 종류의 집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곤충부터 인간까지 집단을 형성하고 사는 동물들을 관찰했을 때, ‘정체성’을 공유하는 무리끼리 하나의 집단, 즉 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정기적으로 접촉하든 그렇지 않든, 서로 도울 의지가 있든 없든 정체성에 의해 단결된다.” - 마크 모펫, ‘인간 무리’
인간 집단중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가장 큰 집단은 바로 국민국가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며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른 인간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국가보다 큰 집단이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결속하는 데에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최근에 유럽연합이 수많은 유럽 국민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영국은 기어코 유럽연합에서 탈퇴했고, 그 선례를 따르려는 정당들이 이탈리아나 폴란드 등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디.
로마나 중국 같은 고대의 제국들은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민족들을 포섭하거나 억압해서 하나의 거대 사회를 만들어냈지만, 제국이 해체되면 신민들은 원래 갖고 있던 민족 정체성과 영역으로 흩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제가 이야기하는 ‘사회’란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의미합니다. 당연히 그 구성원은 국민(Nation)입니다. 다시 말해 제가 이야기하는 사회연대는 국민이 서로의 자유롭고 의미있는 삶을 위해 일정한 책임을 공유하는 일, 즉 ‘국민 연대’입니다.

‘사돈의 팔촌’은 ‘남이 아니’라는 정체성
사회연대는 곧 국민 연대입니다. 그런데, 모든 국민국가가 똑같은 수준으로 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덴마크와 프랑스 국민은 GDP의 30% 정도를 사회복지에 사용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은 겨우 12%를 지출합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선거제도, 외교 · 안보 상황, 정치인의 활약 등 수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하나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입니다.
물론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국경을 넘어서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빈곤은 우리에게 마약 문제와 테러 문제로 이어질 수 있고, 유럽의 경제 위기는 국제 경제의 침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기후 위기, 글로벌 대기업의 조세 회피, 신종 전염병 확산과 같은 문제는 모든 국민국가가 함께 책임을 공유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국제 사안입니다.
국경을 완벽히 봉쇄하고 모든 재화를 국내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같은 행성에서 사는 한 한 국가는 다른 국가에게 어떤 영역에서든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국민 연대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국민’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같은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작은 정체성으로 분열된 사회를 봉합하고 연대를 강화하는 데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커다란 대가족의 일원이라고 느끼면서 서로에 대해 높은 신뢰를 갖고 있으면, 소외되고 약한 동료 구성원을 돕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훨씬 더 기꺼이 지지한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우리는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회를 구성합니다. 하지만 같은 정체성이 언제나 우선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정체성이 약해지면 사회는 언제든 분열될 수 있습니다.
연대는 일종의 ‘협력’입니다. 서로 책임을 나누는 일은 같은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치는 또다른 방식입니다. 사회 전체 단위로 꾸준히 협력하기 위해서는 서로 같은 편이라고 느끼고 상대가 나를 어떤 식으로든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신뢰가 없다면 지속적인 협력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서로 신뢰하는 만큼 많은 자원과 의무를 나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연대는 ‘사회적 신뢰’를 먹고 자랍니다.
“신뢰 수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상대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정도가 크다. 그런 나라일수록 부의 재분배가 이뤄질 가능성이 더 높다.” - 에릭 우슬러너, ‘신뢰의 힘’
최근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요 국가들은 ‘작은 정체성 정치’ 탓에 심각하게 분열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젠더, 성적 지향, 지역, 종교, 세대, 계급에 따라 작은 정체성으로 나뉘었습니다. 작은 정체성에 소속감을 느끼며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과 갈등하고 있습니다.
‘정체성 정치’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정체성 정치는 사회적 약자들이 단결해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에 필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정체성 정치는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큽니다. 작은 정체성 정치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가진 것을 나눌 수도 없고, 타인을 위한 의무를 짊어질 수도 없습니다.
스웨덴이 두텁게 연대할 수 있었던 이유
스웨덴이나 덴마크, 프랑스처럼 성공적으로 연대한 사회들은 ‘하나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해 왔고, 그런 국민 정체성에 호소해서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계급 이익에 호소하기 보다는, 하나의 국민이라는 감정에 호소해서 거대한 복지국가를 건설했습니다.
1889년에 창당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계급 갈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용적인 스웨덴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중산층과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보다는 국민 전체의 이익을 앞세웠습니다. 스웨덴 복지국가를 가리키는 말인 ‘국민의 집’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강력한 복지국가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이들 국가가 가진 확고한 국민 정체성 감각이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국민의 집’이란 개념에는 분파적인 계급정치에서 탈피해 민족 통합에 책임을 지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나아간다는 스웨덴 사민당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국민의 집 개념은 유기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서 사회 평화, 경제 통합, 민족중흥을 강조한다.” - 옌뉘 안데르손, ‘경제성장과 사회보장 사이에서’

스웨덴과 다르게 하나의 국민 정체성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미국은 두텁게 연대하지 못했습니다. 미국도 하나의 사회인 만큼 모든 구성원이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인종에 따라서 서로를 이방인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인종 갈등 탓에 많은 미국인이 사회연대를 ‘부유한 백인이 가난한 소수인종을 일방적으로 부양하는’ 불공정한 국가 개입으로 여깁니다. 실제로 경제학자들은 인종 갈등이 사회연대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통계로 입증했습니다.

“인종 분할지수가 10% 미만인 17개국의 경우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중은 평균 12.87%이다. 이 나라들 중에서 가장 낮은 사회복지지출 수준(코스타리카 3.72%)조차 민족적 다양성이 높은 나라들의 평균적인 사회복지지출 수준의 1.5배나 된다.” - 알베르토 알레시나, ‘복지국가의 정치학’
“원칙적으로 인종 분할의 차이로 미국과 유럽의 사회복지지출의 차이중 거의 3분의 2를 설명할 수 있다. (...) 이러한 국제 비교는 인종 분할이 사회복지지출을 감소시키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 둘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 알베르토 알레시나, ‘복지국가의 정치학’
이처럼 같은 사회 구성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두텁게 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돈의 팔촌이면 ‘남이 아니다’는 감각, 즉 단단한 ‘국민 정체성’이 없으면 두터운 사회연대도 불가능합니다.
“타집단과 서로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느끼는 이기적인 집단들로 분열된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한정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제로섬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이미 ‘분열의 골’ 깊은 한국
우리나라는 이미 화약고입니다. ‘하나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들에게 밀려나고 있습니다. 인종 갈등은 없지만, 극심한 젠더, 세대, 지역 갈등 탓에 사돈의 팔촌을 가까운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믿음 탓에 사회연대가 상호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집단에게 불공정한 특혜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습니다.

여러 정당들이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특정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만 공략하며 다른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을 향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이민과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만약 젠더, 세대, 지역 갈등에 인종 갈등까지 더해진다면, 우리나라의 빈약한 사회연대는 순식간에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정체성, 다양한 언어, 다양한 문화는 자유롭고 혁신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경계하고 죽이는 사회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을 더 아끼는 ‘내집단 편향’을 갖고 있는데, 모든 사회 구성원이 ‘내집단 편향’을 완전히 극복할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민 규제를 강화하고 난민을 내쫓자는 뜻이 아닙니다. 장기적인 이익을 생각해서라도 국경은 어느정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국민 정체성 감각이 약할 때 이민자와 난민까지 들이닥친다면 사회 갈등은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언어와 문화를 관대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은 매우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돼 있지만 그런 다양성이 창의성과 회복력 대신에 폭력과 갈등을 낳고 있다. 케냐의 다양성은 여러 민족 집단들 간의 분열을 심화하고 정치 부패를 양산한다.” - 프랜시스 후쿠야먀,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정치학’
“사회 통합은 그 속도가 느리고 통합 대상 규모가 작을 때 보다 쉽게 이뤄진다. 이는 유입 인구를 더 줄여야 한다는 주장의 합리적 근거가 된다.” - 데이비드 굿하트,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먼저 ‘대한 사람’끼리 연대해야
우리는 모든 사람의 안녕을 동등하게 책임질 수 없습니다. 책임에는 차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의 생계를 돕는 것만큼 옆집 사람의 생계를 돕지 않고, 친구의 생일선물을 챙기는 것만큼 직장 동료의 생일선물을 챙기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얼마나 가까운가에 비례해서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집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나의 형제라면, 어느 누구도 형제가 아니다. 나의 감정과 자원은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차등을 둘 수밖에 없다.” - 데이비드 굿하트, ‘엘리트에게 버림받은 사람들’
국민은 하나의 큰 가족이 되어 서로 많은 책임을 공유할 수 있지만, 인류 전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인류 전체에 소속감을 느끼고, 인류 전체의 복지를 위해 헌신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국민을 초월하려는 ‘세계시민주의’는 이상이지 현실이 아닙니다.
국제 연대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생존을 위한 계산적인 외교 활동일 뿐입니다. 실제로 국민을 위한 복지제도를 운영할 때 보다 더 많은 예산을 해외 원조에 투여한 사례는 없습니다. 국민과 외국인은 서로 책임의 무게가 다릅니다. 우리 국민을 아끼듯이 모든 외국인을 동등하게 아끼라는 요구는 무리합니다.
“그 어떤 국가도 자신의 관할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무제한의 의무를 떠맡을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국가가 그렇게 하려고 시도할 경우 더 나은 세상이 될지도 불투명하다. 많은 나라가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도덕적 의무를 느끼는 것은 타당하고 이민자를 환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무에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높은 비용을 수반될 가능성이 있으며 각 사회는 그런 의무를 다른 중요 사안들과 비교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든 외계인 방어를 위해서든 인간 사회들이 서로 의지할 때라 해도, 차이점의 무게감이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전세계 사람들이 인류 전체와 하나로 연결된 느낌을 가질 것이라는 범세계주의 관념은 하나의 몽상에 불과하다.” - 마크 모펫, ‘인간 무리’
따라서 우선 ‘대한 사람’은 ‘대한 사람’과 연대해야 합니다. 젠더, 세대, 출신 지역이라는 작은 정체성들을 ‘하나의 국민’이라는 더 큰 정체성으로 통합해야 합니다. 여러 이해관계를 조정해서 국민 전체의 이익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국제 연대는 그 다음입니다.
“개인주의적이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국민을 우선해야 한다는 정서는 없애야 할 편견이라기보다는 소중한 자산이다.” - 데이비드 굿하트,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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