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트럼으로 이루어진 세계”

[김석희의 “이분법 넘어” - in Betweenness] 많은 색깔의 세상, 왜 이분법으로만 볼까 일제때 김시명·사량 형제의 엇갈린 삶 다양한 색깔 그대로 바라볼 순 없을까

에스키모는 북극 지방중에서 러시아의 극동쪽 알레스카 일부분과 미국 알레스카, 캐나다, 그린란드에 사는 민족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중에 북부 알래스카, 캐나다 북부, 그린란드, 시베리아 극동에 사는 이들을 주로 이누이트라고 부른다.
에스키모는 북극 지방중에서 러시아의 극동쪽 알레스카 일부분과 미국 알레스카, 캐나다, 그린란드에 사는 민족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중에 북부 알래스카, 캐나다 북부, 그린란드, 시베리아 극동에 사는 이들을 주로 이누이트라고 부른다.
  • * in Betweenness : 자아-타자, 자국문화-타문화, 지배-피지배 등 이분법을 넘어서는 공간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은 코너명입니다

우리가 아는 색깔이란

북방의 이누이트(에스키모)는 50여 가지의 흰색을 구분할 줄 압니다. 얼음으로 집을 짓고 얼음을 헤치며 수렵을 하는 그들에게 눈이나 얼음의 얼어붙은 정도나 상태는 그대로 생존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그들의 세상이 ‘온통 하얗게’만 보이지만, 이누이트들에게는 그 하얀 얼음과 눈이 다양한 색으로 구분됩니다.

사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 쓰는 흰색 물감도 티타늄화이트, 징크화이트, 실버화이트, 퍼머넌트 화이트 등 10여 가지에 이르며 그 쓰임새도 조금씩 다릅니다.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 사진의 푸른 정도를 보고 그 사진 속의 바다가 어느 방향에 있는 바다인지 맞힐 수 있습니다.

나의 지인 중에는 철도 기관사가 있습니다. 그는 매연의 색깔만 보아도 그것이 정상 연소인지, 연료 과다인지, 연소실 내 오일 유입인지, 냉각수 혼입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냄새로도 구분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운 색깔이라는 것은 24색 색상환이나 크레파스의 이름 등을 통해서였습니다. 색이라는 건 스물네 가지가 전부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오색 무지개라고도 하고 일곱 빛깔 무지개라고도 한다는 모순에 이르러서야 색과 색 사이에 의식하지 못했던 다른 색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 시간에 프리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색이란 점과 점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담 중에는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도 있지요. 세상을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눕니다.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이분화되어 있고, 반일과 친일로 나뉘어 있습니다. 진보는 반일, 보수는 친일이라는 공식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많은 색을 구분할 줄 아는 우리가, 어째서 이분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친일과 반일 밖에 없을까

제 생각에 이분법은 전쟁의 논리가 아닌가 합니다. 살아남느냐 죽느냐, 아군이냐 적군이냐 하는 문제가 오래도록 우리의 정서에 DNA처럼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은 조심하는 질문이지만, 우리에겐 어릴 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받고 아주 난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택하기 어려운 것을 둘로 갈라서 세상에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대답을 강요하는 방식이 폭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김시명(1907~1950(?))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소설가 김사량의 형 정도로 기억되는 정도입니다. 김시명은 교토제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 시험에서 사법과 행정고시에 2관왕으로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강원도 홍천군수와 평창군수, 강릉군수를 거쳐서 황해도청 농상부장을 역임했고 나중에 조선총독부 마지막이자 조선인 최초의 전매국장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한국 전쟁 때 퇴각하던 북한군에게 연행되어 끌려가다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생인 김사량이 일본어를 통해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의 길을 선택했을 때 김시명은 총독부의 관료가 되는 길을 선택했고, 동생 김사량이 평양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형은 남쪽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사량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종군기자로 남하했다가 퇴각하는 길에 사망했어요. 비슷한 시기에 김시명은 퇴각하는 북한군에 연행되어 가던 중 처형된 것이죠.

도쿄제국대학 독문과 대학원 시절의 김사량.
도쿄제국대학 독문과 대학원 시절의 김사량.

김시명의 송덕비에 담긴 소사(小史)

김시명은 친일행적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1937년의 신문 기사를 보면, 홍천군 두촌면의 주민들이 그를 위해 송덕비를 세웠다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 송덕비가 지금도 강원도 두촌면 면사무소 마당에 남아 있습니다. 약 10년 전에 제가 확인했을 당시 그를 기억하는 노인들이 살아계셨습니다. 송덕비 아래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 송덕비의 주인공인 김시명 군수는 평양 출신으로 1933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1935년 6월 홍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조금 건너뛰겠습니다) 김시명 군수의 송덕비가 존치되고 있는 것은 그가 친일 인사라는 점보다 면민 일동이 뜻을 모아 송덕비를 세웠던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김시명 군수는 재임시 국유림 3,700여 정보를 총독부와 도 당국의 양해를 구하여 우리 면에 불하하였고, 자은리에서 채광 중인 소림광업소주에게 8,500원을 기부토록 설득하여 화전민 7,000여 명이 끼니를 연명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등 우리 면 주민들에게는 은인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후세에 전하고 그 공적을 널리 기리기 위하여 면민 일동은 1937년에 송덕비를 세운 것이다.”

한국은행 통계에 의하면 이 시기 쌀 한 되는 약 2전이었습니다. 쌀 한 가마니가 50되 정도이니, 쌀 한 가마니에 1원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8,500원을 쌀로 바꾼다면 8500 가마니. 쌀 한 가마니가 80kg 정도이니, 킬로그램으로 환산하면 68만kg. 약 7000명에게 나눠주었다니 1인당 약 90kg에 해당하는 쌀이 배당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풀뿌리 캐어 먹고 피 죽을 끓여 먹으며 연명하던 시절, 상당한 지원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이지만, 당시 홍천군 두촌면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고맙게 여겼고, 최근까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김시명 군수의 송덕비 안내문.
김시명 군수의 송덕비 안내문.

총독부 관료로 출발한 군수 김시명도 식민정책의 대민집행관 기능과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역할, 그리고 조선인을 포섭하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시명은 자신이 가진 직위를 최대한 이용하여 화전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가난한 산민들에게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의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일이었을 거예요.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의 송덕비가 남아 있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50가지보다 많은 색깔 아닐까

당대의 주목받는 수재였던 두 형제가 살았던 방식만큼이나 다른 죽음을 맞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확실히 김시명에게는 식민지를 유지시킨 데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보통의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입신양명의 야망이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식민지인으로서의 갈등과 애환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 시기를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습니다. 조선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태어나 식민지인으로 자라 식민지 총독부의 관리가 된 젊은이들이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일, 조선의 해방이 요원하던 시기에 입신출세를 꿈꾸는 청년들이 총독부의 관리가 된 것은 오히려 평범한 범주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물론 모든 친일 행위에 면죄부를 주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고 했던 사르트르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여전히 친일청산, 과거청산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청산에 앞서서 당시의 삶과 실존을 친일과 항일로 이분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풍부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누이트가 50여 가지의 흰색을 구분하듯이 말입니다.

글쓴이

김석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

김석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 태어나보니 강원도 평창군 미탄이었다. 서른둘에 처음 국제선을 타고 일본에 갔다. 오사카대학에서 언어문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번역가, '어쩌다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유튜브 계정 <문학팔레트>를 운영한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