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세상에서 자신을 지켰던 여자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서’] 올리비아 뉴먼 감독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습지에서 자란 소녀, 살인 누명을 쓰게 되는데 유죄 인정하라는 ‘타협’을 끝까지 거부하고...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스틸컷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스틸컷

강자가 약자를 몰아내는 편가르기

염원하던 대로 우리 대표팀이 포르투갈에게 승리를 거두고 월드컵 16강에 진출하자, 바깥 세상이 순식간에 훈훈해졌고 모두 한마음이 된 듯한 환상에 빠지게 했다. 편 가르기가 극성인 세상에서 한순간이라도 한마음이 될 수 있었으니 긍정적인 환상이다.

인간들이 어떤 형태로든 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편 가르기도 시작된다. 영화나 소설은 편가르기 속 다수가 아닌 소수자, 강자가 아닌 약자의 서사를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델리아 오언스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지난 11월 2일에 개봉한 올리비아 뉴먼 감독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약자가 지닌 고요하면서도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델리아 오언스가 지은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델리아 오언스는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 온 생태학자이고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첫 소설인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발표했다. 언뜻 보면 흔한 러브스토리처럼 보이는 이 책은 예상외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영화 주인공 캐릭터인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 분)와 원작자의 삶은 정서적으로 맞닿아 있다. 야생동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고독한 작업이다. 야생동물과의 관계는 일방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와는 다르다. 그런데도 생존이라는 면에서 자연의 세계와 인간 사회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 적용하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주인공 카야가 사는 습지대는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다. 습지는 일반 사회와 분리된 공간이다. 습지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천시받는다. 과거에 무법자나 도망자 같은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야에게 습지는 생명과 빛의 공간이다. 그 안에는 희귀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카야에게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을 준다.

습지 안에 있는 늪은 그 성격이 다르다. 늪은 죽음과 어둠의 공간이다. 습지와 늪은 각각 인간 삶의 희망과 절망을 비유하는 듯하다. 늪에 빠질 위험도 있었지만 카야는 습지의 생명력을 딛고 살아간다.

불우한 성장과정...습지에서 배우는 생존방식

카야는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하지만 혼자가 됐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머니가 집을 떠났고, 그 다음에는 형제자매들이 한 명씩 집을 떠난다. 떠난다는 것은 그들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까지 떠남으로써 카야는 습지에 혼자 사는 아이가 된다. 그러나 카야에게는 습지라는 보물 같은 공간이 있다. 그녀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공간이다. 카야는 습지에 사는 생물들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려 기록하는 작업을 한다.

살 길이 막막한 어린 아이 카야는 홍합을 캐서 팔아 겨우 연명한다. 마을 사람들은 카야를 이름 대신 습지 소녀라고 부르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카야를 돕는 사람은 흑인인 상점 주인 부부와 마을 청년 테이트뿐이다. 테이트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카야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도서관에서 생물과 과학 서적을 빌려다 주었다. 카야의 풍부한 과학 지식은 그 덕이다.

테이트는 유일하게 이 신비로운 소녀 카야의 능력과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었다. 습지 생물을 그린 카야의 그림을 출판사에 보내보라는 조언을 한다. 하지만 진학을 위해 마을을 떠나는 테이트로 인해 카야는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받게 된다. 곧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테이트는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스틸컷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스틸컷

살인 용의자로 몰리지만...자연의 방식을 고수하며

그 후에 또 다른 청년 체이스가 그녀에게 접근한다. 카야는 테이트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체이스의 접근을 경계했지만, 다정하게 굴면서 결혼까지 약속하는 체이스에게 결국 마음을 열고 만다. 하지만 테이트와는 달리 체이스는 행실이 좋지 않은 바람둥이였고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카야는 절망한다. 게다가 체이스는 결혼 후에도 카야에게 집착하고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어느 날 체이스가 늪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카야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가 된다. 카야는 이미 출판사와 계약해 거액의 계약금과 인세를 받는 유능한 작가가 되었고 삶이 윤택해진 상태였다.

그런 카야가 과연 체이스를 살해한 범인일까. 재판이 열리고 영화의 후반부는 법정 드라마 형태로 바뀌면서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유죄를 인정하고 감형을 받자는 변호사의 설득에도 카야는 강력하게 무죄를 주장한다. 패소할 경우 종신형이나 사형을 받게 되지만 카야는 결코 자신의 자세를 굽히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괄시받고 버림받아 왔던 여성으로서 타협은 용납이 안 된다.

카야는 자연 세계의 법칙을 잘 알고 있는 여성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의 세계는 폭력적이다. 잔인하게 먹고 먹히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하지만 자연에 선악의 기준은 존재할 수 없다. 자연에는 생존만이 있을 뿐이다. 자연과 한 몸이 되면서 성장한 카야는 생존을 위한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다. 생존을 위해 하는 일에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소신이고 카야는 소신을 밀고 나갈 만큼의 힘이 있는 여성이다.

바깥 세상은 자신과 타인 간에 입장과 이익이 마찰을 일으키며 늘 시끄럽다. 가장 약한 자를 소외시키면서 쾌감을 느끼거나, 집단의 동질감을 형성하고 뭉치는 데 약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어떤 집단에 소속돼 무리를 형성하는 것이 사는 데 유리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소신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은 홀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스스로 평가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평가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이뤄지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정립되어 간다.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스틸컷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스틸컷

약자로 몰린 사람들의 가치를 읽을 수 있나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어린 여주인공 카야는 일반적인 인간들의 생존 전략일 수 있는 타협을 거부한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지를 지켜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특별한 사람이다. 가장 약한 사람이 때론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녀에게는 자연이 스승이었고, 지독하게 고독했던 성장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존 전략을 터득하고 있었다.

카야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테이트였음을 뒤늦게 깨닫고 죽기 전까지 평생을 함께 한다. 나이가 든 카야가 숨을 거둔 뒤, 테이트는 카야가 숨겨 왔던 비밀을 알게 되지만 그녀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녀는 자연의 일부로 살아왔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자연의 법칙을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가재는 노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가재의 노래소리가 들린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소리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그녀만이 그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그런 그녀의 세계를 인정해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닐까.

사회 공동체에서 꺼리는 사람의 가치를 알아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줄 수 있는 용기가 당신에게는 있는가.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이 사회에서 가능한 일일까.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자신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와 약자를 향한 선입관이 얼마나 무용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깨우쳐준다.

글쓴이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영화심리상담사인 이화정은 영상번역작가로 일하면서 약 700편의 영화와 TV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다. 그 후 영화이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통합예술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와 심리에 관한 방송, <꿈꾸는 씨네 카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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