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국에서 조카를 잃고 돌아왔습니다
[김수영의 미국속 한인 이야기] 이태원 참사로 사랑하는 조카를 잃고 자랑스런 조국에서 어떻게 이런일이 ‘헛된 삶’ 생각에 트라우마 앓는 중 유가족 이용말고 애도에 최선 다해주길
자랑스러운 내 조국을 다시 찾아
필자는 지인들에게서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는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으며 살아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외치는 나의 한마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아무리 힘든 순간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살아갈 이유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할 이유를 찾아낸다. 나는 자체발전기를 돌리듯 스스로 기운을 찾아가는 스타일이다.
25년 미국 이민 생활을 불꽃처럼 활활 태우던 나는 2년전 부친이 돌아가시자, 인생이 너무 짧고 허무하다는 느낌에 휩싸여 일보다는 즐겁게 노는 데 중점을 두기로 결심했다. 그런 마음으로 이번 9월에 한국을 방문했다.
나의 부친은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시작 직전에 돌아가셨다. 장례식 이후 모처럼 찾은 ‘내 조국’ 대한민국은 짧은 2년동안에도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입이 쩍 벌어졌다. 눈부시게 발전한 내 나라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그 어느 잘난 나라의 국민이 와도 대한민국의 선진적이며 잘 정돈되고 세련된 모습에 기가 죽으리라 자신했다. ‘하하하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 한국인들.’ 한국전쟁으로 완전 밑바닥부터 시작해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보며 나는 ‘자랑스러움’에 만취한 채 방문일정을 보냈다.
싼 옷이지만 품질이 좋고, 들르는 식당의 음식들은 왜 그렇게 맛있고 공간은 깨끗한 지. 위장 내시경, 대장 내시경 등 모든 의료진찰도 일사천리로 되고, 지하철 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너무나 편리했다. ‘아, 빨리 은퇴하고 돌아와서 구석 구석 좋은 것만 즐기면서 살아야겠다’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했다.
한국 방문 동안 서울을 거점으로 삼아 싱가폴도 갔고 제주도, 양양, 춘천 등도 다녔다. 돈도 많이 썼고 가족들, 조카들 용돈도 두둑히 챙겨주며 보람있는 시간을 보냈다. 요즘 달러·원 환율까지 좋아서 ‘이번 기회에 끝내주게 놀다가리라’ 마음먹었고, 미국 귀국을 10월초에서 10월 30일로 늦추기까지 했다. 난 이번 한국 여행이 많은 추억을 가슴에 채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날 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더 열심히 일하고, 또 우리 나라로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10월29일 사랑하는 조카를 잃다
그런데 그 10월 29일, 출국 하루앞으로 다가온 그날, 나는 서울의 식구들과 송별회 겸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밤 10시 30분경 내 집안의 장녀인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남동생이 받은 전화 저편에서 날카롭게 울부짓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아들 OO가 숨을 안 쉰다고 누군가 전화를 했어”
나의 남동생과 여동생 그리고 제부와 나의 엄마 모두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던 그 순간부터 우리 가족의 악몽은 시작됐다. 와인을 한잔 마신 나의 제부와 나는 엄마와 함께 집을 지켰고, 여동생과 남동생이 택시를 타고 큰언니에게로 달려갔다.
도중에 여동생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수영 언니, 언니 기도 하나님이 잘 들어주신다며. 언니 우리 OO 위해서 기도 좀 해줘”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수영 언니, 지금 구글로 검색 좀 해봐. 무슨 이태원 호텔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압사했대!”라고 상황을 전해왔다.
급히 TV를 켜지만 다행히 사망자 수는 없다는 보도였다. 그런데 공중파 TV에선 볼 수 없었던 사망자 시신이 유튜브 영상에는 길거리에 쭉 누워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치 마네킹 인형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영상들이 유튜브에서 계속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공중파TV에서는 뉴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도 한결같이 사망자는 없고 부상자 수십 명이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언니는 놀란 가슴에 옷, 양발도 제대로 챙겨 입지도 않은 채 추운 밤거리를 미친 사람처럼 다녔다. 길거리에 누워있는 시신들 얼굴 하나 하나씩 확인하며 아들의 시신을 찾느라 헤맸다. 아들의 시신을 찾아 헤맸을 그때 언니의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집에 있던 나는 “조카는 살짝 다쳐서 어느 병원에서 쉬고 있을 거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애써 안도해보려고 했지만, 불길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발견된 조카...마약검사 흔적?
그런데 새벽 2시경 동대문구 어디 장례식장이라는 데서 내 조카 OO가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왜 재수없게 장례식장에서 전화가? 왜 장례식장이야?” 우리 식구들 모두 울부짖었다.
동대문구에 있는 작은 장례식장에는 21살인 나의 조카가 차가운 스테인레스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다른 남의 집 귀한 자식 두 명의 시신도 바닥에 있었다.
언니가 놀랄까봐 제부가 먼저 들어가 시신을 확인하고 말을 전했다. “조카가 눈도 못감고 죽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항문쪽 팬티는 찢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마 의사가 마약 검사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조카 OO는 21살의 나이로 간호학과를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공부하면서도 싱글맘으로 고생하는 엄마를 돕는다고 주 6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밤낮으로 열심히 살았다. 불과 1주일전이던 10월 23일 남동생 생일 파티에서는 내 앞에서 “오늘 삼촌 생일이기도 하고, 수영 이모가 미국 돌아가시기 전에 뵈려고 일당 엄청 높은 아르바이트 포기하고 왔어요”하며 빙그레 웃던 아이였다. 집안 식구들 모두 기특해서 이모, 삼촌, 할머니 너나 할 것 없이 용돈을 모아서 두둑하게 챙겨줬다.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지 누구도 짐작 못했다.
언니는 아들의 시신 앞에서 실신했고, 나이든 엄마의 통곡 소리와 다른 시신의 유가족들 통곡 소리가 장례식장에서 섞이고 울리면서 나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나는 통성 기도를 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차가와진 조카의 시신 곳곳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비비면서 ‘우리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한 거 알지? 아가. 우리 OO아.’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나도, 언니도, 동생들 모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집안 식구들 모두 장례식과 미사 준비를 하려면 정신을 차리고 뭐라도 일을 잡고 해야 했다. 3일간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같은학교의 많은 친구들이 장례식장에서 와 눈물을 흘리고 애도해주었다. 3일내내 같이 밤을 새어준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 조카랑 사망한 또 한명과 같이 이태원 현장에 갔던 나머지 한 명이 장례식장에 왔다. 살아있는 그 친구는 장례식장에 와서는 손을 덜덜 떨면서 울었다. 얼마나 떨던지. 그 아이가 너무 안타까워서 나는 “니 잘못이 아니야. 괜찮아. 너라도 살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라며 위로해주었다. 그 아이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진심으로 걱정된다.
트라우마에 빠져...들려오는 2차 가해들
조카를 화장하고 다음날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밀려 있는 일을 처리하느라, 오래 비워두었던 나의 빈자리를 다시 채우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겉으로 다쳐 피가 나면 아픈 줄 알지만, 속으로 피가 나는 건 모르는 법이다. 평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몸 속의 자체 발전기로 에너지 넘치게 살던 내가, 더이상 예전의 내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기쁘지 않은 일이 있으면 바로 피해버리고, 뭔가 복잡한 요구를 할 것 같은 클라이언트는 큰 계약을 한다해도 피하게 됐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이 사람이 나중에 죽으면 어떻게 하지?’, ‘나도 이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하며 계속 죽음을 생각한다. 트라우마였다. 내 아들이 예쁘고 듬직할수록 자식을 잃은 내 언니의 심정은 어떨까 하는 마음에 툭하면 울컥한다.
필자는 정치적인 논란에 연루되고 싶지 않다. 이 글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함부로 입을 놀리는 사람들의 껌처럼 취급받고 싶지 않다. 다만 짐승조차 새끼가 죽었을 때는 건드리지 말고 삼가는 게 자연의 이치고, 우주의 이치라 배웠다. 그래서 옛부터 새끼를 밴 짐승은 건드리지 않고 알배기 물고기도 산란기에 잡지 않았고, 자식을 잃고 피눈물 흘리는 짐승들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 했다.
종교와 정치를 떠나 교육받은 사람이나 못받은 사람이나 피눈물 흘리며 자식을 잃어 고통받고 있는 이 가여운 부모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첫번째 일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지만, 최소한의 예의로 삼가고 조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의 도리 아니겠는가.
누가 잘못을 했는지 가릴 수가 없다 하더라도, 그 직책에 있는 사람은 책임을 통감하고 책임을 지려는 최소한의 예의가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첫 단계일 것이다. 첫 단계가 지나고 ‘세월’이라는 약이 더해져야 고통이 조금 줄어들 것인데, 위로의 첫 단계없이 세월이라는 약으로 치료하라고 강요하는 이 상황은 결코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안전매뉴얼을 만들고 책임을 져라
미국에서는 Liability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책임’이라는 말이다. 모든 직책에는 책임이 있다. 책임에 있는 이들이 만약 이태원에 나간 모든 사람들한테 ‘너희들 오늘 나갈 때 어떤 불상사가 있어도 정부는 아무 책임이 없어’라고 ‘liability waiver form(책임유예양식)’에 모두 서명을 받았다면 모를까, 그런 서명이 없다면 무조건 관할 책임자 책임이다. 관할지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의 책임은 관할 책임자의 책임이다. 그것이 행정권의 권한과 책임이고 국민이 부여한 것이다.
필자가 좋아했던 교회 집사님 한 분이 “그러니까 거기를 왜 가?”라는 말을 하길래, “아니 발 달린 젊은 애들이 어딘들 못갑니까? 어디를 가든 안전할 거라고 믿고 갔던 우리 애들이 잘못입니까?”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미국은 언제나 매뉴얼이 있다. 정치인 누가 오더라도 웬만해서 바꾸지 않는 안전 메뉴얼이다. 뉴욕 맨하탄의 타임스퀘어처럼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적법한 안전매뉴얼이라는 것이 꼭 있다. 이런 매뉴얼을 제대로 작동시키라는 뜻에서 국민들이 정부에 준 것이 공권력이다.
이태원 사고가 난 직후에 엠블런스가 통행할 수 있을 만큼 도로가 확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엠블런스 안에서 분초를 다투는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내 조카 같은 귀한 자식들이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평상시부터 소방차가 차를 대야 할 경우 절대 주차해선 안되는 공간의 확보, 사람들이 많든 적든 엠블런스가 항상 지나다녀야 할 도로의 확보, 아무리 많은 인파가 몰려도 좌측 통행과 우측 통행이 가능하도록 하는 정도의 공간, 수용 가능한 인원의 제한을 정하는 기준표 등 이런 매뉴얼들이 논의되어야 한다.
‘너희도 자식 잃어봐라’는 저주 나누지 말자
세월호 참사때 희생자 부모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자 외신기자들에게 “창피했다”라고 말한 내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조카를 잃은 내 몸에서 그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식 잃은 부모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언젠가 똑같은 경험을 하면 이해할까? 그런 사람들의 이해를 바라지도 않지만, 정말 필요하다면 그들도 똑같은 경험 하기를 원한다. 아, 이런 마음이 저주구나. 정말로 자식 잃은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가여운 유가족들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하는 세력과 집단들도 밉기만 하다. 당신들이 제일 먼저 예의를 갖춰라. 이들을 이용하지 말고 순수하게 배려하고 도와주기를 바란다.
희생자 158명의 유가족들이 슬퍼 눈물을 흘리고 있다. 투명한 눈물은 사실은 몸에서 나오는 피라고 한다. 피 흘리며 아파하는 유가족들, 그들의 눈물을 외면하고 조롱하면 언젠가 당신들의 눈에서도 투명한 피가 내릴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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