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피보팅’ 전략은 어떨까①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피보팅 전략으로 성공한 음악가들
요즘 TV를 보면 왕년의 유명 운동선수 출신들이 예능프로에 나와 활약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스포츠계의 선수들은 다른 직업군에 비해 활동기간이 짧은 편이다. 현역 생활을 접고 난 후에 동종업계의 코치로 나서는 게 대부분일텐데, 강호동, 안정환, 박세리, 같은 프로 운동선수 출신들이 TV 예능에서 기성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보면서 기업의 ‘피보팅 전략’이 떠올랐다.
‘피보팅(pivoting) 전략’은 기업에서 업계의 새로운 동향이나 각종 지표 등을 참고하여 기존의 기업전략을 수정하여 사업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에게도 이런 식의 방향전환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업무적성검사, 요즘 유행하는 MBTI 검사 등에 근거해 전략적인 진로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기보다는 대개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 또는 상황에 떠밀려 방향전환이 이뤄지기도 한다.
서양음악사에 이름을 올린 음악가 중에도 일종의 피보팅과 같은 방향전환을 통해 성공한 사례가 있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간에 업(業)의 방향전환 후에 더 잘 나간 경우인데, 이들의 성공담과 사연 또한 귀담아 들을만하다.
비발디, 사제에서 음악가로 직업 전환
바로크음악의 대가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에게는 ‘빨강머리 사제’라는 별명이 있다. 베네치아가 고향인 비발디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조반니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장남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채고는 직접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한편 작곡 공부도 시켰다. 그러나 바이올린 연주로는 줄줄이 태어난 아홉 명의 자식을 키우기에 벅찼기에 장남을 안정적인 직업인 가톨릭 사제로 만들고자 열다섯 살이 된 안토니오를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런데 칠삭둥이로 태어난 탓인지 몸이 허약했던 안토니오는 수도원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집에서 출퇴근하도록 배려를 받게 되었다. 덕분에 계속해서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고, 틈틈이 아버지와 함께 공연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느라고 남보다 훨씬 길게, 10년 만에 사제 수련 과정을 마치고 스물다섯 살에야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붉은 빛의 금발을 가진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빨강 머리의 사제’이다.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딱히 신앙심이 깊다고 할 수 없었고, 자연히 성무(聖務)보다는 음악활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제직을 수행하기에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식을 앓고 있었고, 그 때문에 미사 집전 도중 발작적인 기침으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결국 사제 본연의 업무를 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교황청은 비발디를 일종의 고아원인 ‘피에타(Ospedale Della Pieta) 학교’에 바이올린 교사로 보내는 결정을 한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고아원이 많았다. 중세부터 해상무역으로 큰 부를 쌓은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16세기경부터 인기 있는 관광도시였다.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수 많은 여행객들이 넘쳐났고, 특히 그 유명한 카니발 기간이 끝나고 난 뒤엔 어김없이 사생아들이 태어났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피에타를 비롯한 당시의 고아원은 이러한 도시의 그늘을 조용히 거두는 기관이었다. 이 시설들은 일반적인 고아원과 달리 풍부한 후원금 덕분에 규모도 크고, 병원시설과 수준 높은 교육과정까지 갖춘 일종의 종합교육기관 같은 곳이었다. 피에타는 여자아이들만을 수용한 학교로, 특별히 그들에게 악기 교습을 시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도 구성되어 있었다.
비발디는 이 학교에 와서 빠른 시일 내에 능력을 인정받게 되고 그의 업무도 모든 악기를 총괄하는 ‘합주교사’이자 합창의 지휘와 감독을 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 그는 소녀들로 구성된 합창단과 합주단의 공연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해야 했는데, 작곡가로서는 합주단과 합창단이 자신의 악기나 마찬가지여서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론 그의 작곡 실력도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피에타 학교는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열었고, 외국에까지 명성이 알려져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일부러 이 학교의 콘서트를 보러 찾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피에타 학교의 명성과 함께 비발디의 명성도 함께 올라갔다.
비발디는 외국에서 왕족이나 귀족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하면 일부러 찾아가서 작품집을 헌정하거나 곡을 바치면서 그들의 환심을 샀고, 그들로부터 작곡을 의뢰받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초기 작품집, 다양한 양식과 개성을 담은 12곡의 협주곡이 들어있는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Op.3)>은 메디치 가문의 페르디난도 대공에게 헌정된 바 있다.
비발디는 엄청나게 빠른 작곡 속도로 유명했는데, 당시에는 작곡법이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었기에 오늘날보다 훨씬 빠르게 많은 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청중들도 기존에 작곡된 곡을 듣기보다는 늘 새로운 작품을 선호했기 때문에 작곡가는 빠른 속도로 작곡해야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있었다. 비발디는 스스로 필사가가 악보를 베끼는 속도보다 자신의 작곡 속도가 더 빠르다고 자랑을 했을 정도였고, 여기에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합주단과 합창단까지 맡고 있었으니 수백 곡이 넘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사제생활이 적성에 맞아 그가 그대로 교회에 눌러앉았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비발디의 명곡들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을까 싶다.
바흐, 무명의 설움을 대도시 진출로 해결

비발디보다 7년 늦게 1685년 독일 작센 지방에서 태어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몇 대를 걸쳐 내려온 유명 음악가문 출신이다. 그 당시엔 ‘바흐=음악가’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덕분에 열여덟 살 무렵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든 바흐는 출발부터 동료 음악가들에 비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는 음악가가 궁정이나 교회, 귀족 저택의 고용인 신분이었다. 그러므로 직장을 옮기는 일도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던 시절.
그럼에도 바흐는 주인과 불화가 있거나 음악적으로 성취할 새로운 목표가 생길 때에는 과감하게 사표를 쓰기도 하였다. 물론 주인에게 간곡히 이직(移職)을 청하는 예를 갖춘 이직서였다. 그렇게 대여섯 차례 옮겨간 도시의 궁정이나 교회에서 쓴 작품들엔 각각의 고유한 음악적 특징이 담겨 있기에 그의 음악 인생을 도시의 이름을 넣어 ‘바흐의 00시대’‘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매우 좋은 조건으로 인생 최고의 시절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곳은 네 번째 직장인 쾨텐 궁정이었다. 30대의 바흐로서는 봉급도 매우 후하게 받았고, 전처와의 사별 후에 재혼도 하여 안정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같은 명곡들도 왕성하게 생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쾨텐에서 안주하며 지내는 동안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역할’이라는 음악가의 초심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실력을 널리 알려 명성을 쌓고, 자식들에게는 대학교육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커졌다.
자신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던 쾨텐 궁정을 떠나겠다는 결심이 서자 그는 라이프치히의 교회 칸토르(합창장) 직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당시 라이프치히는 상업과 문화, 교육을 이끌어가는 대도시였고, 이곳의 성 토마스 교회는 독일 교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신임 칸토르 직의 물망에 오른 음악가들은 무려 열 명이나 되었다. 그 열 명 중엔 당대 최고의 음악가 텔레만을 비롯해 모두 학식과 음악면에서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바흐의 실력이나 이름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고 대학 졸업장도 없는 탓에 그는 열 번째 순위로 밀려나 있었다.
바흐는 일생일대의 큰 용기를 낸 만큼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동안 자식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던 악보들을 모아 교본으로 엮어 제출하는 등 교회음악가로서의 사명과 교육자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을 은근히 어필하였다. 다행히 쟁쟁한 경쟁자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중도탈락하게 되었고 결국 교회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으로’ 바흐를 칸토르 직에 최종 낙점하였다.
라이프치히의 생활은 이전 직장보다 급여는 훨씬 적고, 해야 할 일은 엄청 많은 무척 고된 나날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맡은 일들을 충실히 수행하여 교회의 주요 절기마다 연주할 새로운 작품들 -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등의 교회음악 등 많은 작품을 이 시절에 작곡하였다. 여기에 매 주일 예배를 위해 성가대를 지도하는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 마흔네 살이 되던 해에 텔레만에 이어 라이프치히 콜레기움무지쿰의 신임감독에 임명되는 큰 명예를 얻기도 했다.
200년이 지난 훗날, 이 대도시의 음악가 멘델스존이 그동안 잠자고 있던 <마태수난곡>의 악보를 발견하여 다시 무대에 올림으로써 바흐의 이름은 다시금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대작곡가로 추앙받고 있으니 바흐의 대도시를 향한 이직(移職)모험, ‘피보팅 전략’은 적중한 셈이다.
PS: 다음 칼럼에서도 ‘피보팅 전략’으로 성공한 음악가들의 얘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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