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자유로운 영혼의 불안한 선택
[장 PD의 클래식 한담(閑談)] 새해, 피보팅의 시간② 무시와 핍박 당하던 모차르트 ‘독립적 예술가’로 홀로서기 성공 고난 없었다면 ‘위대한 음악’ 탄생했을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2, 오스트리아)만큼 많은 얘기거리를 남긴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철저한 음악교육 하에 길러진 천재적 재능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뤄낸 음악적 성과와 업적은 말할 것도 없고, 다소 특이했던 인간적 면모와 서른여섯 나이에 맞이한 죽음에 얽힌 에피소드 등, 그에 관한 스토리텔링은 연극으로, 영화로, 뮤지컬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이전 글에서 새해를 맞아 ‘피보팅’을 얘기하던 참이니, 모차르트가 음악가로서의 진로에 방향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부분에 관한 얘기로 이어가본다.
‘음악사의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찬사를 받는 모차르트. 이 천재도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구직난’에 시달려야 했다면 과연 믿어질까? 그 시절만 해도 음악가들이 궁정이나 교회, 귀족의 고용인이 되어야 생계를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던 때였다. 모차르트는 평생 자신의 역량에 어울리는 최상의 일자리를 얻지 못했고, 후원자 운도 없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무궁무진한 음악적 영감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지원해줄 높은 안목과 재력이 풍부한 후원자나 안정적인 직장은 늘 그를 비껴갔다. 한마디로 관운(官運)이 없었던 셈.
1772년,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겸 제후 슈라텐바흐가 세상을 떠났다. 연주 여행으로 자주 대성당의 악사 자리를 비웠던 모차르트 부자(父子)에게 관대했던 슈라텐바흐의 후임으로 온 대주교 콜로레도는 매우 깐깐한 인물이었다. 모차르트 부자가 이제 잘츠부르크에 눌러앉아 ‘콜로레도’의 이름으로 의뢰한 음악을 만들어 대주교 자신의 이름을 빛내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신동’이라는 수식이 어울리지 않는 십대 후반에 접어든 모차르트는 여전히 재기발랄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특히 창작에 열심이었지만, 신분은 대주교 산하의 무급 고용악사에 불과했고, 그 대우는 어린 시절 왕실에서 받았던 환대와 후의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하인들과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신세이다 보니 아버지 레오폴트로서도 아들이 제대로 대우받는 자리를 얻지 못하는 점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차에 아들과 자신의 새 일자리를 위한 계획을 비밀리에 세우고는 1773년 7월 아들과 함께 빈으로 향하지만, 일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았다. 빈 궁정악단 취업 계획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크게 낙담했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데 대한 분노와 우울한 심경 속에서도 g단조 교향곡(K.183, 제1 악장은 <아마데우스>의 타이틀곡으로 유명해졌다)을 작곡하는 등, 그동안 유럽 각지를 돌며 흡수한 새로운 양식과 내면의 음악적 에너지를 끌어내어 작곡가로서의 개성을 단련하고 성장시키는 귀중한 시간을 보낸다.
‘신의 선물’ 같은 모차르트의 음악
1777년, 스물한 살의 모차르트는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 파리, 뮌헨을 향한 일종의 구직을 위한 대장정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별 소득은 없었고, 여행 중 어머니가 객사하는 큰 슬픔까지 겪게 된다. 그나마 당시 교향곡 발전에 앞선 만하임에서 최고 수준의 관현악단 연주를 듣고, 그곳 작곡가들에게서 교향곡 작법과 관현악기법 등을 배울 수 있었던 점이 수확이라면 큰 수확이었다.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대주교의 밑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이도 싫었지만, 그는 2년 만에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즈음 빈에 머물고 있던 콜로레도 대주교로부터 호출을 받게 되어 빈으로 불려갔다. 모차르트는 빈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교류하며 주목할 만한 연주회도 한 두 차례 열 계획이었고 어떻게든 적당한 자리를 얻어 보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도록 요구하며 사람들 앞에서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대주교는 처음부터 모차르트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상대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박대했다. 참다못한 모차르트는 “은혜로운 대주교께서는 제가 못마땅하십니까?” 이에 대주교는 “네가 어찌 감히 나를 위협하는가? 불쌍하고 어린 망종 같으니... ” 이런 거친 언사가 몇 번 오간 후에 그는 말 그대로 대주교의 의전관에 의해 엉덩이를 발에 차여 문밖으로 내쫓기는 수모를 당하고 만다.
잘츠부르크의 궁정악사는 대주교의 시중이나 드는 하인 밖에 안되는 자리였나 하는 회의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때 음악신동으로 빈 궁정에서 테레제 여제의 무릎에 앉아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자신에 대한 대우가 너무 야박했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시의 문화 규범이었던 ‘궁정사회’를 스스로 박차고 나온 셈이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와 상의 없이 벌인 일이었고, 무슨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고 감행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스스로의 예술적 목표를 혼자 달성하고자 결단을 내리고, 빈에 계속 머물기로 결심한다. 피아노 교습과 작품 판매, 스스로 추진한 대중음악악회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해 가는 독립적인 예술가로 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도 감행한다. 결혼생활이 가져다준 안정 속에서 이전 작품보다 훨씬 깊이 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써내려가 걸작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피아노협주곡, 교향곡 등 주옥같은 작품들로 창작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지리도 후원자 복이 없었던 모차르트는 작품번호가 붙은 곡만 600곡이 넘는 다작(多作)을 남겼다. 오페라,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종교음악 등 모든 장르에 걸친 작품들이다. 만약 그가 궁정이나 교회의 안정된 직장에서 활동했다면 어땠을까? 이탈리아 출신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했던 직장 ‘빈 궁정’에서 수십 년 동안 봉직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살리에리의 이름은 모차르트의 연관어로나 찾을 수 있을까. 만약에 그가 안정된 지위의 궁정음악가로 고용되었다면 더 많은 작품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귀족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의 <피가로의 결혼> 같은 오페라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 같다. 독립 예술가의 길은 결과적으로 경제적 불안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 길이 아닌가?’...누구에게나 찾아올 피보팅의 시간
음악가 중엔 연주자로 시작하여 작곡가의 길로(또는 그 반대로) 방향을 틀어 활동한 사례가 여럿 있다. 창작과 연주 모두 음악의 영역이지만, 각각의 재능과 기능은 엄연히 다르다. 예로부터 작곡가 겸 연주자로 활동한 음악가들이 많았지만, 19세기 초반부터 연주에서의 비르투오소 경향이 심화되고, 작곡 연주 지휘 등 각각의 전문성이 점차 강화됨으로써 음악가들의 직업도 세분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만 간추리자면, 로베르트 슈만(1810~1856, 독일)은 애초에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으나 무리한 연습으로 손가락 근육을 다치는 바람에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낭만성 가득한 독보적 스타일의 피아노곡과 가곡, 교향곡, 협주곡 등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 작곡가로 당당히 음악사에 그 이름을 알리고 있다. 당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음악가들은 누릴 수 없는 영광이다.
당대에는 지휘자로 명성을 떨쳤던 구스타프 말러(1860~1911,오스트리아)는 음악원 시절부터 창작에 뜻을 품었으나, 졸업 당시 작곡 콩쿠르에서 실패하자 자신의 실력으로는 작곡가로서 생계를 이어가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는 비교적 안정된 직장인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다. 소도시의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시작하여 점차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종국에는 빈 오페라극장과 빈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라는, 지휘자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악기처럼 다루며 관현악법에 통달할 수 있었기에 여름 휴가를 이용해 꾸준히 교향곡 작곡에 매진하여 쓴 교향곡이 모두 10곡이나 된다. 말러만의 독특한 세계가 담긴 대작들이 오늘날에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피아노협주곡으로 유명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러시아)는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를 꿈꾸다가 점차 작곡에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음악원 재학 중에는 작곡에 몰두했다. 교향곡과 피아노협주곡, 교향시 등 러시아 전통적 색채의 낭만적 작품들로 인정받던 중,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망명지 미국에서 다시 피아니스트로서 활동을 해야 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였다. 이전에도 그는 자신의 피아노 작품을 위해서는 연주자로 나서기도 했었으나, 본격적인 생업으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다시 익히며 무대를 준비했고, 레코딩 음반산업이 발달하던 시기와 맞물려 독특한 스타일의 전설적인 음반을 여러 장 남기기도 했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러시아)는 음악원 시절 피아노 연주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수재였다. 그러나 내심 우승을 노리고 참가한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수상권에 들지 못하자 창작 쪽으로 마음을 굳히게 된다. 전통적인 양식에 기초한 교향곡과 협주곡, 실내악곡 등 많은 작품을 남기며 당대 러시아 최고 작곡가의 영예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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