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의 6월, 한국-EU간 특별한 악수

이재명 대통령과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가운데), 우르즐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EU이사회 본부에서 디지털 통상 협정(DTA) 서명식을 마친 뒤 손을 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과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가운데), 우르즐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EU이사회 본부에서 디지털 통상 협정(DTA) 서명식을 마친 뒤 손을 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 미국 일변도 안보의 한계와 EU라는 우회로 북·중·러 결속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에만 의존하는 안보 정보 구조는 외교적 자율성을 제약한다. 한-EU 비밀정보보호협정을 통해 다층적인 안보·방산 협력망을 구축해야 한다.
  • 미·중 테크 독점에 맞설 소버린 AI 연합 가동 글로벌 AI 시장이 미·중 빅테크에 종속될 위기 속에서 이번 디지털통상협정은 세계 표준을 선도하는 ‘규제의 EU’와 반도체·모델을 갖춘 ‘기술의 한국’이 결합하는 전략적 접점이다.
  • 안보와 디지털 인질극에서 벗어나는 생존 전략 한-EU 협력은 기존 동맹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미·중의 ‘안보·디지털 인질극’에서 벗어나 한국의 협상력을 높이고 패권 경쟁 속에서 ‘제3의 표준’을 제시하겠다는 선언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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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EU 정상회담,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니다

지난 6월 10일 이재명 대통령의 브뤼셀 EU 방문 성과와 관련해 발표된 자료를 살펴보면, 이번 한-EU 협력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인도·태평양 안보전략과 AI·디지털 협력에 관한 합의는 향후 한국 외교·안보 전략의 방향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 제11차 한-EU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양측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와 유럽 안보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EU는 ‘비밀정보보호협정’ 체결 협상에 착수하기로 했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한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안보 문제가 더 이상 지역적 사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시에 유럽 역시 인도·태평양의 불안정성을 자국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를 공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럽의 전쟁이 동아시아의 위기로 이어져

인도·태평양과 유럽 안보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한의 개입으로 그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북한의 러시아 지원과 군사적 연계는 유럽의 안보 위기가 동아시아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지난 2024년 6월 북한과 러시아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하며 유사시 상호 군사 지원 가능성을 공식화한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대서양 안보 위협이 인도태평양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여기에 더해 북·중·러의 전략적 결속이 강화되는 흐름도 주목을 받았다. 중국, 러시아, 북한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하면서도 실질적인 전략 협력을 강화할 경우, 한반도 안보 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6월 8일 시진핑 중국 주석의 북한 방문이 인도·태평양에서의 미중 긴장관계를 더욱 공고화했다. 북한과의 국경무역 확대, 군사협력 강화, 상호 주권과 이익 존중을 강조하는 행보를 볼 때,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핵화 논의는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통해 국제 제재의 압박을 완화하려 할 것이고, 중국은 북한을 전략적 완충지대로 활용하려 할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라, 대만 문제와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의 전략적 운신을 제약하는 외교·안보적 카드로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8일 평양 금수산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신화/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8일 평양 금수산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신화/연합뉴스

한반도와 대만, 위기가 동시에 올 수 있다

중국이 대만 문제에서 군사적 압박을 높이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때 북한이 서해나 비무장지대, 또는 사이버·미사일 영역에서 안보 불안을 조성한다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곧바로 ‘이중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즉, 인도·태평양에는 하나의 위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만 해협의 위기와 한반도의 위기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북·중·러의 전략적 연계가 강화될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은 기존의 안보 구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미동맹은 여전히 한국 안보의 핵심축이지만, 모든 안보 역량을 미국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전략적 취약성을 초래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EU는 한국의 새로운 안보 파트너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국 일변도 안보 구조의 한계와 EU의 전략적 가치

최근 한미 간 정보 공유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한국 안보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공개 출처 정보’라고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민감 정보 관리’ 문제를 이유로 북한군에 대한 정보 공유를 제한하고 있다. 이는 한국 입장에서 “길들이기” 수준의 상당한 압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정밀 군사정보와 위성정보는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한국은 안보 협력 채널을 다변화해야 한다. 미국의 정보자산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일수록, 한국의 외교·안보적 자율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U는 독자적인 위성정보 체계와 하이브리드 정보 역량을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 프랑스의 군사정찰위성 체계, 유럽 차원의 위성·전자정보 역량, 그리고 각국의 방위산업 기술은 미국의 정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더라도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한-EU 비밀정보보호협정은 단순한 문서 협정이 아니다. 이는 한국이 미국 중심의 단일 정보 구조에서 벗어나 다층적 안보 협력망을 구축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미국이 정보 접근을 외교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려 할 경우, 한국이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적 우회로’도 될 수 있다.

비밀정보보호협정은 방산·군사기술 협력의 기반이다

한-EU 비밀정보보호협정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방산 정보 교류와 군사기술 협력의 법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데 있다.

한국은 이미 K-방산을 통해 유럽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폴란드 등 유럽 국가들과의 방산 협력은 한국 무기체계의 경쟁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향후 협력이 단순한 무기 수출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정보 공유, 공동 연구개발, 첨단 군사기술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비밀정보 보호 체계가 필수적이다. 이번 협정 논의는 한국과 EU가 단순한 경제 파트너를 넘어 안보·방산·기술 파트너로 발전할 수 있는 제도적 발판이 될 것이다.

결국 한국이 미국 일변도의 안보 구조에서 벗어나 다원화된 안보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모습 자체가 중요한 메시지다. 이는 특정 동맹을 대체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과 협상력을 높이겠다는 선언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디지털통상협정, 소버린 AI 동맹의 출발점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EU 간 디지털통상협정의 정책적 함의다. 이는 필자가 이전 칼럼에서 강조한 바 있는 EU의 테크 헤게모니 상실 문제(칼럼: Tech 헤게모니에서 밀려나는 유럽)와 미국과 중국 중심의 AI 산업 독점에 대응하기 위한 소버린 AI 연합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현재 글로벌 생성형 AI 시장은 미국의 오픈AI, 구글, 메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와 중국의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거대 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 흐름이 지속된다면 한국과 유럽은 자체 언어, 문화, 제도, 가치체계를 반영한 AI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한 채 미국과 중국의 AI 시스템에 종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한 산업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다. AI는 앞으로 교육, 행정, 국방, 의료, 금융,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다. 따라서 AI 주권을 상실한다는 것은 곧 데이터 주권, 지식 주권, 나아가 정책 주권의 약화를 의미한다.

현재 글로벌 AI 시장은 미국의 오픈AI, 구글 등과 중국의 딥시크, 텐센트 등 거대 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그림출처= Internet Governance Project
현재 글로벌 AI 시장은 미국의 오픈AI, 구글 등과 중국의 딥시크, 텐센트 등 거대 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그림출처= Internet Governance Project

‘규제의 EU’와 ‘기술의 한국’이 만나는 지점

EU는 세계 최초로 포괄적인 AI 규제 법안을 마련하며 ‘글로벌 AI 규범’ 경쟁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EU의 약점은 자체 빅테크 기업과 초거대 AI 플랫폼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규범은 있으나 이를 구현할 기술 기업의 기반이 없는 실정이다.

반면 한국은 네이버 등 독자적인 AI 모델 개발 경험을 갖고 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AI 반도체, 특히 HBM 분야에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기술과 제조 역량을 갖고 있지만, 글로벌 규범 설계와 시장 확장 측면에서는 EU와의 협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한-EU 디지털통상협정은 ‘규제의 EU’와 ‘기술의 한국’이 결합하는 전략적 접점으로 볼 수 있다. EU의 데이터 보호 기준과 한국의 AI·반도체 역량이 결합한다면, 미·중 모델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 소버린 AI 생태계를 구축할 가능성이 열린다. 이는 단순한 산업 협력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전략적 동맹이다.

AI 주권은 새로운 안보 주권이다

군사 정보와 마찬가지로 AI 역시 특정 국가나 특정 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심각한 안보 취약성이 발생한다. 국가의 행정 데이터, 산업 데이터, 의료 데이터, 군사 데이터가 미국 또는 중국의 클라우드와 AI 플랫폼에 종속된다면, 한국은 디지털 영토의 핵심 통제권을 잃게 된다.

AWS,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와 같은 미국 클라우드 인프라는 이미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 플랫폼이 제공하는 편의성과 기술력은 분명 강력하다. 그러나 국가 핵심 데이터가 외국 기업의 인프라에 장기간 종속되는 구조는 전략적으로 위험하다.

따라서 AI 주권은 더 이상 기술 산업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안보 주권의 문제이며, 국가 생존 전략의 문제다. 한-EU 디지털 협력은 군사정보 협력의 다변화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영토에서도 특정 패권국의 기술 독점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신뢰 가능한 AI 표준으로 미·중 독주를 견제해야

이번 한-EU 협력에는 데이터의 안전한 국경 간 이동뿐 아니라 AI 윤리, 개인정보 보호, 데이터 거버넌스에 관한 규범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한국과 EU가 함께 ‘신뢰 가능한 AI’의 글로벌 표준을 만들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막대한 데이터와 자본을 기반으로 AI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학습 방식은 개인정보 침해, 저작권 침해, 알고리즘 편향, 문화적 획일화라는 문제를 낳고 있다.

EU의 강력한 AI 규제는 일견 자체 AI 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평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이는 미·중 빅테크의 무제한적 데이터 수집과 시장 진입을 견제하는 제도적 방패이기도 하다. 한국이 여기에 기술력과 제조 역량을 결합한다면, 한-EU는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제3의 표준’을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은 미·중의 독주를 막는 제도적 브레이크이자, 역내 AI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가 될 수 있다.

한-EU 협력은 ‘안보 인질극’과 ‘디지털 인질극’에서 벗어나는 길

이번 이재명 대통령의 EU 방문과 그 결과로 제시된 군사안보 협력 및 디지털동맹 구상은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미국은 한국의 핵심 동맹이지만, 동시에 미국 중심의 안보·기술 질서가 한국의 자율성을 제한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이웃이지만, 안보상으로는 한반도와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의 전략 공간을 압박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어느 한쪽에 종속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방식으로 외교·안보·기술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EU와의 협력은 바로 그 가능성을 제공한다.

한-EU 협력은 미국을 배제하려는 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한국이 더욱 강한 협상력을 가진 동맹국이 되기 위한 전략이다. 또한 중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기 위한 구도가 아니라, 북·중·러 결속과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의 생존 공간을 넓히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 바로 EU인 것이다.

결국 이번 한-EU 협력의 본질은 분명하다. 한국과 EU는 서로에게 필요한 파트너다. 한국은 안보와 기술의 다변화가 필요하고, EU는 인도·태평양 전략과 AI 기술 협력의 실질적 파트너가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한-EU가 안보와 미래를 위해 함께 뭉쳐야 할 때다.

이 칼럼을 영상으로 · 2:00 한국의 무서운 빅 픽처: 미국 의존 끝내고 EU와 맺은 비밀 협정은?
글쓴이

최수정 칼럼니스트

최수정 칼럼니스트는 독일 함부르크대학 법학박사과정에서 해양안보법과 사이버안보법을 전공하고 있다. 한국 해양수산개발원에서 11년간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해양환경, 국제수산규범, 독도영토분쟁을 포함한 유엔해양법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나토(NATO) 사이버센터 방문연구자, 나토 해양안보센터 패널리스트, 나토 국방대학원 리서치 펠로우 과정을 모두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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