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없이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이영균의 ‘말이란 말야’] “공감, 내 편을 만들고, 부족하면 적을 만든다” 공감이란, 생각을 공유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 공감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올바른 방법은
최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로 정치권과 외교당국이 조용할 날이 없다. 일본정부와 우리나라 정부, 여권, 야권, 시민단체, 과학계 등 어느 한 집단도 같은 소리를 내는 곳이 없다. 심지어 한 집단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니 그야말로 ‘아사리판’이라 하겠다.
이렇게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결론적으로 ‘서로에 공감이 없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축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쪽에서는 ‘과학적 결론’인데 왜 믿지 못하느냐고 말하는 반면, ‘100% 확실한 과학이 어디있나’, ‘과학이고 뭐고 쟤네는 못믿겠다’ 등 믿지 못하는 이유가 각양각색이다. 아무리 근거를 들어서 상대를 설득하려 해도 믿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들의 대화에 무엇이 부족하길래 서로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있을까?
애미 : 이번 주말에 뭐할까?
동일 : 글쎄,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네?
애미 : 아웃렛 가서 쇼핑할까?
동일 : 쇼핑은 무슨… PC방 가서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게임 어때?
애미 : 맨날 PC방이냐? 지겹지도 않아? 차라리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나 한편 보자.
동일 : 요즘 볼만한 영화가 없어. 차라리 술이나 마시자.
애미 : 또 술이야? 됐어. 난 동은이나 만날래.
동일 : 참나, 그럼 난 상인이랑 술 한잔 하고 있을 테니 이따 연락해.
애미 : 몰라.

첫 연애 시절과는 딴판인 대화
오래된 연인이 주말 데이트 일정을 짜는 대화 상황이다. 서로 본인이 하고 싶은 일만 권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대화인가 싶다. 얼핏 혼잣말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우리 생활에 이런 식의 대화가 결코 드물지 않다. 오래된 연인, 늘상 만나는 친구, 가족 간의 대화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커플, 대화가 항상 이런 식이라면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초창기부터 이랬을까? 그들이 처음 만나기 시작했던 2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애미 : 이번 주말에 뭐하세요?
동일 : 특별한 계획은 없어요. 우리 만날까요?
애미 : 좋아요. 만나서 뭐 할까요?
동일 : 글쎄요, 진숙씨랑 함께라면 뭐든지 좋아요. ^^
애미 : 그럼, 스타필드에서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면 어떨까요?
동일 : 좋네요. 끝나고 술도 한잔 하구요.
애미 :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2년 전과 현재의 대화를 비교해 보자. 두 사람이 만나서 하자고 하는 활동에는 별 차이가 없다. 여자는 동일하게 쇼핑과 영화를 원하고, 남자는 술 마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이다. 2년 전 대화에서는 뭘 해도 좋다는 식이고, 지금 대화는 뭘 해도 싫다는 식이다.
2년 전과 지금, 이들 사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서로에 대한 익숙함? 서로 존중하지 않게 된 것? 두 대화에 근거해서 그 결정적 차이를 지적한다면 ‘상대에게 맞추고자 하는 의지의 유무’라고 하겠다. 연애 초창기에는 상대를 배려하고 뭐든 맞추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지금은 서로 자신에게 맞추라고 강요를 한다. 상대를 배려하고 맞추겠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이렇게 완전히 다른 대화의 양상을 만들어 낸다. 이번에는 한 회사의 상사와 후배의 대화를 들여다보자.
최부장 : 송과장, 지난 번 얘기한 보고서 다 됐나?
송과장 : 부장님, 그거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최부장 : 뭐? 지시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야?
송과장 : 이게 막상 손을 대보니 생각보다 방대한 작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지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최부장 : 아니, 그럼 진작에 얘기를 했어야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떡하나? 이거 이번 주 내로 사장님께 보고해야 하는 건인데 어쩔거야?
송과장 : ㅠㅠ. 오늘 내일 밤을 세워서 완성하겠습니다. 직원들 세 명만 붙여주십시오.
최부장 : 한심하구만.
마음으로 욕하는 대화 vs 상대를 이해하려는 대화
직장 생활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옆에서 보기 불편하다.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서로 원망하며 욕을 해대고 있을 것이 뻔하다. 매일 얼굴을 마주치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끼리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야 여러가지로 언급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의지나 노력이 있었다면 애당초 이런 상황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대화가 이런 식으로 이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서로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면 대화가 어떻게 전개됐을까?
최부장 : 송과장, 지난 번 얘기한 보고서 다 됐나?
송과장 : (헉, 이거 급한거였나?) 부장님, 그거 언제까지 완성해야 할까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최부장 : (내가 데드라인 얘기를 안했나?) 아이고, 내가 데드라인 얘기를 안했나 보네? 쏘리! 이거 이번 주 내로 사장님께 보고해야 하는 건이야.
송과장 : 제가 시한을 미리 확인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번 주 내로 완성하려면 지원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직원들 세 명만 지원해 주시면 밤을 세워서라도 내일 밤까지 완성하겠습니다.
최부장 : 어허, 그건 너무 무리인 것 같고, 어쨌든 지원은 붙여줄 테니 최대한 빨리 해보게. 내가 사장님께 보고가 하루 이틀 지연될 것 같다고 말씀드려 보겠네. 데드라인을 미리 얘기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으니.
송과장 : 정말 죄송합니다.
극적인 반전을 주려고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리긴 했지만 어떤가?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이 같은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최 부장은 송 과장이 데드라인을 몰랐기 때문에 보고서 작성이 우선 순위에서 다른 업무에 밀렸다는 점을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송 과장은 본인이 데드라인을 미리 확인하지 못한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문제 발생 이유를 상대에게 돌리지 않고 그 원인의 일부 혹은 전부를 스스로에게 돌리게 된다. 이에 공감이 형성되고 대화는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법이다.
여기서 ‘공감’이라는 대화의 포인트가 언급됐다. 앞의 두 가지 대화들을 살펴보면 서로 공감이 이뤄진 대화들은 성공적이었지만 공감 형성이 되지 않은 대화들은 절망적이었다. 그렇다면 공감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공감’이란 게 무엇이길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좀더 풀어서 표현한다면 ‘같은 생각을 하는 것’ 혹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즉, 대화에서 공감을 얻는다는 것은 남으로 하여금 ‘상대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면 대화는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이뤄진다. 반대로 상대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면 대화가 이어지기 어렵다. 즉, 대화에 있어서 공감이라는 것은 핵심 중에 핵심 포인트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대화에 있어 공감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또 공감이 없는 대화는 왜 실패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 남에게 공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DNA에 새겨져 있는 ‘갈등의 역사’에 기원을 둔다. 인류는 수 천년, 수 만년 전부터 집단 갈등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그런 역사적 학습의 결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생존의 본능이 인간의 DNA에 새겨지게 됐다고 한다. 이는 많은 인류학자, 생물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내용이다. 이에 같은 편임을 확인하고 강화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방법은 같은 상징 체계와 언어를 공유하고 같은 신화와 철학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다.
앞에서 봤듯이 생각을 공유하거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이에 공감은 고대부터 인류에게 새겨져 있는 생존의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 공감을 얻어야 생존할 수 있는 셈이니 그 중요성을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대화는 바로 그 공감을 얻기 위한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의사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갈등을 피하고 서로 협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공감은 결국 대화의 목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즉, 공감을 얻는 대화라면 성공한 대화가 되고 공감을 못 얻었다면 실패한 대화가 되고 만다.
공감을 얻기 위해 생각을 공유하고 그러한 행위를 중요시하는 것은 근대를 지나 현대 세계에 와서도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가치가 더욱 크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이에 문명이 발전할수록 생각을 공유하는 기회와 방법을 어떻게 하면 더 간단하게, 동시에 더 광범위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인류의 고민은 계속해서 진화해 왔다. 산업혁명 이후 개발되고 확산되어 온 인쇄술이며 20세기 매스 미디어 진화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후 21세기 인터넷의 발전에 이어 최근 10여 년에 걸친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킹망(SNS), 유튜브 등의 태동과 확산은 역시 ‘생각을 공유하기 위한’ 인류의 몸부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주 중요해져버린 ‘공감’이라는 수단
한편, 이렇게 진화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공감이라는 ‘놈’에게 기존의 집단 강화의 기능을 넘어 집단을 잘게 쪼게고 그렇게 형성된 소집단을 강화시키는 기능까지 부여하게 되었다. 즉, 단순히 같은 언어권, 문화권으로 같은 집단을 구성하던 과거와 달리 상대적으로 지엽적인 부분에서의 공감 척도에 의해 집단의 경계를 구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젠더 집단, 세대 집단은 물론이고 표현된 정치적 성향의 차이나 비건 등 식습관 차이까지도 내 편, 남의 편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이른바 ‘에코 챔버 효과’로 인해 집단 내에서의 커뮤니케이션과 자기 확신 강화가 점점 더 심화됨에 따라 ‘집단내 공감’이 ‘집단외 갈등’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21세기에 공감이라는 것은 집단 내 소속감을 만드는 것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생존 요건으로까지 기능을 하게 돼 버렸다.
공감을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자, 이렇게 공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 공감을 얻는 방법 즉, 남들에게 ‘상대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냥 맞장구를 치고 동의한다는 표현을 쓰면 되는 것일까? 혹은 무작정 대화를 많이 하면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될까?
다시 앞에서 봤던 대화들을 분석해 보자. 남녀의 대화에서는 서로에게 맞추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있느냐 여부가 공감 형성의 핵심 요건이었고, 직장 내 대화는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공감 형성의 핵심 조건이었다. 공감을 형성하는데 상대의 상황, 혹은 욕구에 맞추려는 의지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 조건이다. 즉, 공감을 얻어 내려면 우선은 상대의 기준에 맞추고 상대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이야기를 해보자. 저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집단 내지 사람들에게 서로에게 맞추려는 의지나 노력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 보다는 서로의 이익, 혹은 갈등관계, 믿고 싶은 근거 등에만 의지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공감이 형성될 수가 없을 것이고 공감이 없는데 서로를 믿게 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상황일 것이다.
이렇듯 서로 맞춰가려는 의지가 없는데 무작정 대화만 많이 한다고 공감이 생길 수는 없다. 만약에 그냥 갈등 상황으로 놔두고 방치하는 게 최종 목적이 아니라면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추가 조치를 취하든, 다른 수단을 강구하든, 아니면 반대급부적인 무언가를 얻어내든, 국민이나 주변국들을 안심시키든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을 얻는 대화는 내 편을 만들어 내고 공감 없는 대화는 적을 만들어 낸다.” 이 한 마디만 기억하고 대화에 임하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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