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거절’의 테크닉
[이영균의 ‘말이란 말야’] 직설적으로 거절하는 건 최하수 ‘핑계 대기’ 거절법은 자칫 들킬 수도 거절하되 역제안, 불쌍한 놈 척하기 후환없이 거절 잘하는 지혜 필요해
후환이 따르는 거절
최근 라면값과 과잣값의 인하를 놓고 말들이 많다. 처음에는 밀가루 등 원료비가 내려갔으니 인상분을 환원시키라는 압박과 다른 비용 등 원가 인상 요인이 다양해서 당장 인하는 어렵다는 거절이 팽팽한 듯 보였다. 그러나 정부의 압박과 소비자들의 동조에 제조업체들이 계속해서 버티기는 어려웠다. 결국은 가격 인하를 감행했는데 그 이후로도 시끄럽다.
인하폭이 적다느니, 시장 경제에서 이게 적절한 프로세스였냐는 등. 기업에서 오랫동안 몸담아 일해온 경험으로 보면 한번 인상한 가격을 다시 내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가격을 올리게 되면 늘어난 매출에 맞춰서 모든 예산을 수립하기 때문에 기존에 짜여진 예산과 비용을 갑자기 일괄적으로 줄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예산 항목에는 프로모션 등 변동비 항목도 있지만 인건비 등 고정비 항목도 많아 이를 갑자기 줄이는 것은 어렵다. 결국 가격인하는 영업이익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이는 다시 기업 활동 및 투자 위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아는 기업 입장에서 가격 인하를 단행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심지어 위험한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랴. 정부의 은근한 압박과 소비자의 더 강력한 호응성 압력을 기업이 견뎌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칫 강하게 ‘거절의 수’를 썼다가는 엄청난 후폭풍을 맞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거절에는 후환이 따른다. 이 같은 기업의 사회적·시장적 거절 행위는 물론이고, 개인간의 거절에도 대부분 후환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만큼 거절을 잘하기란 어렵다는 얘기다. 오늘은 바로 이 ‘거절의 기술’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한다.
거절 못하는 사람들
후배 중에 거절에 유독 약한 친구가 있다. 하루는 식사 중에 이 친구가 한참동안 통화를 하길래 중요한 전화인가 보다 했다. 10여 분 통화를 마치고 “무슨 전화길래 식사하다 말고 이렇게 길게 통화를 해?”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텔레마케팅(TM) 전화’였단다. 다들 뒤집어졌다. “‘TM 전화’를 이렇게 오래 받아? 빨리 거절하면 되지” 했더니 거절을 못하겠단다. 냉정하게 끊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며…
거절에 취약한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저 후배의 경우 좀 심각한 경우지만 많은 이들이 무언가 제안을 받거나 부탁을 받았을 때 어떻게 거절을 해야할 지 몰라 난감해 하곤 한다. 아래 대화를 보자.
민준 : 병만아, 나 니네 집 근처에서 관명이랑 술먹고 있다. 나와라.
병만 : 벌써 9시가 다 되어 가는데요?
민준 : 에이, 1시간만 있다가 가. 얼굴 봐야지.
병만 : 저는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어렵겠는데요.
민준 : 치사하다. 난 출근 안하냐?
병만 : 하여튼 지금 자려고 준비 다했는데 어떻게 나가겠어요. 다음에 뵈어요.
민준 : 쳇, 몰라. 이제 연락하지 말고 살자!
물론, 민폐 캐릭터다. 이런 민폐 캐릭터들은 주위에 꼭 있다. 하여간 그걸 떠나서 병만의 대처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상대의 제안이나 요청을 직설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자칫 상대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관계를 끊으려고 이런 식으로 응대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하여튼 거절의 기술 측면에서 보면 F등급에 해당한다.
민준 : 병만아, 나 니네 집 근처에서 관명이랑 술먹고 있다. 나와라.
병만 : 벌써 9시가 다 되어 가는데요?
민준 : 에이, 1시간만 있다가 가. 얼굴 봐야지.
병만 : 어휴, 저 와이프한테 죽어요.
민준 : 아니, 아직도 그렇게 제수씨한테 잡혀 사냐?
병만 : 쩝, 그렇죠. 며칠 전에도 술먹고 늦게 들어와서 이혼당할 뻔 했어요.
민준 : 한심한 놈… 알았다.
병만 : 죄송해요… ㅠ
거절의 기술 C등급이다. 이른 바 ‘남 핑계, 상황 핑계’ 대고 빠져 나오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쓴다. ‘TM 전화’가 왔을 때 회의 중이라고 한다든지, 전화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든지 상황 핑계를 대는 것은 비교적 긍정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치사하게 비쳐질 수도 있고 매번 써먹기도 애매한 방법이다. 따라서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때로 상대가 막무가내로 ‘제수씨 전화 바꾸라’느니 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으니까.
상습적으로 거절하는 인상 주면 안돼
그나저나 예전에 화장실에서 어떤 남자가 소변을 보면서 “운전 중입니다”라고 통화하는 걸 봤다. 아마도 ‘TM 전화’가 왔던 모양이다. 여유롭게 소변을 보면서 운전 중이라고 얘기하는 게 얼마나 웃겼던지 나도 모르게 ‘파악’ 하고 현웃(현실 웃음)이 터졌던 기억이 있다.
민준 : 병만아, 나 니네 집 근처에서 관명이랑 술먹고 있다. 나와라.
병만 : 아, 선배! 어디신데요?
민준 : 어, 사거리에 있는 봉봉 치킨집이야.
병만 : 잠깐만요, 저 상황좀 보고 다시 전화 드릴께요.
민준 : 어…꼭 와라.
병만 : (30분 후) 아이고 선배, 제가 나가려고 옷도 입고 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안되겠어요.
민준 : 왜?
병만 : 아니, 와이프가 삐져서 설득이 안되요.
민준 :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병만 : 그러게 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민준 : 하여튼, 알았다. 다음에 보자.
거절 B등급의 시간차 공격이다. 얼핏 보면 C등급의 대처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C등급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내가 나갈 의지가 있다’라는 것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C등급의 대화에서는 내가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냥 남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내가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물리적, 상황적 변수 때문에 어렵다고 했을 때 상대는 적어도 나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황을 탓하겠지. 그러나 이 역시 매번 써먹을 수는 없다. 특히 시간차 공격은 여러 번 반복될 경우 상습범(?)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한 두 번쯤은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거절의 고수들은 이렇게 한다
민준 : 병만아, 나 니네 집 근처에서 관명이랑 술먹고 있다. 나와라.
병만 : 지금이요? 아이고 저 지금 집에서 야근 중이에요.
민준 : 이 시간까지? 에이… 거짓말 아니야?
병만 : 설마요. 오늘은 너무 나가고 싶은데 어렵겠구요, 차라리 다음 주에 날 잡으시죠.
민준 : 아, 그래? 그러자.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어때?
병만 : 네, 좋습니다. 내일 오전에 다시 통화해서 확정하시죠.
민준 : 그래, 알았어. 아쉽네.
병만 : 저두요. 맥주 한 잔 시원하게 하고 싶은데… 오늘의 아쉬움은 다음 주에 화끈하게 푸시죠!
민준 : ㅎㅎ 그래. 일 마무리 잘 하고~
거절의 A등급…역제안이다. 상대가 어떤 제안이나 요청을 했을 때 그냥 거절을 하는 것은 사실 관계 유지 측면에서 볼 때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상대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남겨서 마음의 빚을 지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역제안을 하는 것은 거절을 함과 동시에 공을 상대에게 넘겨서 내 마음의 부담도 제거하는 방법이다. 물론, 역제안을 할 마음도 없다든가 사실상 상대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셈이라면 좋은 방법은 아니다. 이런 경우라면 어차피 이후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크지 않으니 거절 F등급에 해당되는 ‘정색하고 거절하기’나 C등급의 방법인 ‘남이나 상황 핑계대기’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민준 : 병만아, 나 니네 집 근처에서 관명이랑 술먹고 있다. 나와라.
병만 : 선배, 저 어제 술을 너무 먹어서 지금 약 먹고 누워 있어요.
민준 : 뭐? 얼마나 쳐먹었길래 그래?
병만 : 모르겠어요. 저 지금 몸에 열도 나고 식은 땀도 나고 그래요.
민준 : 어휴, 미련한 놈… 몸 생각좀 해라.
병만 : 죄송해요. 제가 며칠 내로 연락드릴께요.
민준 : 그래, 몸조리 잘해라.
거절의 S등급… ‘불쌍한 놈 코스프레’이다. 여기서는 아픈 척 거절을 했지만, 다양한 버전으로 활용 가능하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동정심이 들도록 만드는 것이다.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닌 이상 동정심이 들면 상대에게 뭔가 도와주고 싶지 요구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게 되는 법이다. 이에 겸손하게 자세를 낮춘다든지 불쌍한 상황을 내세운다든지 하는 것은 거절에 있어 고수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는 것은 거절당한 상대의 씁쓸한 마음까지 어루만져주는 효과가 있어서 더욱 유용하다. 다만 거짓 상황을 내세우는 것은 자칫 상대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으니 그 점은 유념해서 활용해야 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거절과 관련된 여러가지 테크닉들을 나열해 봤다. 거절의 기술을 등급으로 나눠 놓긴 했지만 사실 상황에 따라서는 아랫 테크닉이 오히려 윗 테크닉 보다 유효한 경우들도 있다. 즉, 어떤 경우는 B등급 테크닉이 오히려 S등급 테크닉 보다 유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황과 다른 변수들은 통제하고 거절의 성공 가능성과 이후 관계 유지라는 측면에서만 등급을 나눠 놓은 것일 뿐. 따라서 지금까지 언급한 거절의 테크닉들을 상황과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조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만약 이것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면 명실공히 ‘거절의 왕’이라고 부를 만할 것이다.

현대인의 생사를 가르는 거절
대영 : 우성아, 나 이번에 보험사 취직했다. 아무래도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우성 : 아, 그랬구나. 건승을 빌게.
대영 : 그나저나 너도 웬만한 보험은 다 있겠지? 그래도 이 회사에서 나온 암보험은 차원이 달라. 다른 회사에서 특약으로만 보장되는 암도 다 보장해주더라. 너도 하나 들어라.
우성 : 얼마짜린데?
대영 : 월 30만원 짜린데, 백혈병에 구강암까지 안되는 거 없이 거의 모든 암이 다 보장돼.
우성 : (30만원이란 말에 움찔하며) 그래? 일단 이메일로 사양 한번 보내줘봐. 검토해 볼께. (다음 날) 대영아, 니가 보내준 거 와이프랑 보고 상의해 봤는데, 와이프 왈, 아무래도 이거 하려면 뭔가 한 개 기존 보험을 해지하고 들어야 한대. 너무 중복이라. 그런데 기존에 적립된 금액도 상당액 포기해야 하고 손해가 좀 크더라고.
대영 : 아이고 그래? 그럼 어렵겠어?
우성 : 골프 보험이나 운전자 보험 같은 건 없냐? 나 그런 건 없어서 필요할 것 같은데…
대영 : 아, 그래? 운전자 보험 좋은 거 있어. 그거 내용 보내줄께.
이 대화에서 대영은 우성에게 고액의 암 보험을 제시했다. 우성 입장에서는 친한 친구인 대영이 부탁하는데 그냥 거절하는 건 곤란한 상황. 작은 상품으로 돌리기 위해 시간차 공격, 와이프 핑계 대기, 역제안, 손해가 큰 상황에 대한 불쌍한 놈 코스프레 등 온갖 스킬을 다 동원했다. 결국은 성공했다.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완전 거절도 가능했을 것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거절을 해야 할 상황은 의외로 매우 많다. 가볍게는 마케팅 권유 전화부터 크게는 빚보증 요청까지… 지금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빚보증을 거절 못해서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 사연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런 걸 보면 어쩌면 거절의 스킬은 생존의 수단과도 연결된 건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TM 전화’를 거절 못해 식사 중에 10여 분이나 통화를 했던, 처음에 언급한 그 ‘거절 불능’의 후배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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