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어느 나라 시인일까?
[박기찬의 말랑고소한 북한 이야기] 중국 북간도, 시인이 자라고 묻힌 고향 북한, 인간 양심과 민족 절개 지킨 시인 일본도 윤동주에 대한 사랑 유별나 동주는 한국 너머 아시아·세계의 시인
코로나가 끝나면서 해외여행이 크게 늘었다. 그 중에 백두산과 연변지역을 관광하는 여행객도 많아졌는데, 해마다 중국 동북3성을 방문해 온 필자도 지난 상반기에 그곳을 다녀왔다. 연변 지역에서 한국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단연 ‘윤동주 생가’다.
그 곳에 갈 때마다 필자에겐 두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하나는 ‘윤동주 시인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쉬는 이유’이다.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윤동주에게 북간도 용정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윤동주가 어느 나라 시인인가” 라는 질문은 한마디로 우문(愚問), 즉 어리석은 물음이다. 시인이 살았을 때에는 지금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 1949년 수립)이 없었고, 한반도가 분단되지도 않았으며 남과 북에 단독정부(1948년)도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시인이다”, “너희 시인이다” 라는 주장이 의미 없는 글로벌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윤동주 시는 10여 나라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K-컬쳐의 영향으로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이 늘어나면서 쉽고 아름답게 쓰인 윤동주의 시가 더욱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중국, 북한, 일본에서 윤동주의 시가 어떻게 평가되고 사랑받는지를 그들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윤동주 시인을 우리가 만든 좁은 경계에 가두지 않고 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동주가 태어나고 자란 곳 ‘용정’
용정과 용정 명동촌을 아우르는 북간도는 윤동주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서 묻힌 곳이다. 윤동주가 살아간 여정(旅程)은 북간도-평양-북간도-서울-일본-북간도, 즉 북간도 용정에서 시작해 그곳에서 마무리됐다. 윤동주는 약 27년의 짧은 삶에서 평양 6개월, 서울 4년, 일본 3년을 제외하고 약 20년을 북간도에서 살았다.
북간도는 윤동주를 길러 낸 토양과 같은 곳이다. 윤동주는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북간도의 자연 속에서 육체가 영글었고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에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시에서도 북간도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고향의 땅으로 나타난다. ‘별 헤는 밤’에서 “어머님, /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고.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때에 두만강을 건너 그 곳에 정착했으니, 지금의 개념으로 이해하자면 윤동주는 재외동포 3.5세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윤동주를 조국 땅을 떠나 제3국에서 살아간 ‘디아스포라’ 또는 다문화 및 다언어 환경에서 성장한 청년이라고 보기도 한다.
수년 전에 윤동주 생가 입구에 세워진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표지석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다. 윤동주는 우리말로만 시를 썼지만, 언제부터인가 생가 뜰에는 모든 시가 중국어로 번역돼 있는 것도 한국 방문자에게 거부감을 준다.
하지만 윤동주가 그곳에서 살다간 그곳의 시인이라는 것이 그곳 사람들의 시각이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묘지 등 용정에서의 흔적을 보전하고 관리하는 것이 용정 사람들과 중국 용정시 정부라는 것 또한 현실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도 윤동주는 매우 자랑스러운 시인이라는 것이다.
평양과 금강산, 원산에 남긴 동주의 시
본적지가 함경북도 청진부인 윤동주는 함경북도 방언, 정확히는 육진(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등) 방언을 쓰며 살았다. 그의 시에 나타난 함북 방언은 시인 본인과 시집을 발간하는 편집자에 의해 표준말로 오늘날의 시집에는 바꿔져 있다. 육필 원고와 현재 시집은 총 570군데가 다르다고 한다. 윤동주 시가 가졌던 원래의 맛을 느끼고자 한다면 함경북도 방언이 살아 있는 시로 읽히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한다.
윤동주는 평양에서 6개월 간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짧은 기간이지만 평양에서의 인연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 먼저 평양 생활은 본인이 성인으로 성장할 즈음 처음 고향을 떠나 조국 땅에서 생활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 기간 동안 시인은 15편의 시를 창작했으며, 그의 시 ‘공상’이 문예지 『숭실활천』에 실려 자신의 시가 인쇄화되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식권’ 이라는 시에서 “대동강 물로 끓인 국 / 평안도 쌀로 지은 밥 / 조선의 매운 고추장 // 식권은 우리 배를 부르게”라고 그곳 생활을 노래했다.
그리고 민족교육의 전당이었던 숭실중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는 생생한 현장에서 피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온몸을 느꼈을 것이다. 윤동주는 ‘모란봉에서’라는 시에서 “허물어진 성터에서 / 철모르는 여아들이 / 저도 모를 이국말로 / 재잘대며 뜀을 뛰고, //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라고 썼다. 여기서 ‘자동차’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의 숨통을 조여 오는 일제의 반문명적 침략행위를 빗댄 것은 아닐까.
북한이 보는 동주
북한에서도 윤동주 시인은 애국시인, 저항시인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김일성 주석은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의 아버지 김형직이 나온 평양 숭실학교를 설명하면서 윤동주를 “재능있는 애국시인”으로 묘사했다.
2001년에 출판된 『조선대백과사전』은 윤동주를 “대학공부를 하던 중 《조선독립운동 건》으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하였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윤동주는 ‘서시’에서 일제식민지통치 밑에서도 인간의 량심과 민족의 절개를 지켜가는 애국적 열의를 열정적으로 토로하였다.(중략) 비운에 찬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참된 삶을 갈망하고 그 길에서 투지를 가다듬은 애국적 시인“이라고 정리했다.
그러나 연구자와 문학인 외에 북한의 일반 대중에게 윤동주의 시가 널리 알려지고 읽히는 것 같지 않다. 언젠가 애국시인 윤동주가 함경북도 말로 쓴 아름다운 시가 북녘의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비로봉’, ‘바다’는 윤동주가 금강산과 원산 앞바다를 여행하며 쓴 시다. 윤동주의 시비가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에 관광객을 위한 포토존으로 세워질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도 사랑받는 동주의 시
일본인들의 윤동주 사랑도 유별나다. 동경과 교토에서 유학했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마지막 3년을 일본에서 살았다. 이들 도시마다 윤동주의 시를 읽거나 2월16일 기일을 추모하는 모임이 있다. 윤동주의 시를 일본어로 옮긴 여러 개의 번역본이 있으며 연구논문도 많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윤동주는 국제법 상으로 일본국의 관할 하에 있었던 식민지 변방 만주 땅에서 온 유학생 청년이었을 것이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은 과거 군국주의를 반성하면서 윤동주를 평화와 화해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추모하기도 한다. 일본 사람들의 윤동주에 대한 사랑에는 새파랗게 젊고 끝까지 순수했던 청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 함께 묻어 있다.
‘서시’와 함께 윤동주에 대한 에세이를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은 일본의 여성 문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말했다.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 그대들에겐 광복절 / 우리들에게는 항복절인 / 8월15일이 오기 겨우 반년 전 일이라니 / 아직 교복 차림으로 / 순결을 동결시킨 듯한 /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처음 가는 마을』, 2019년)

동주를 국가라는 좁은 경계에 가두지 말길
윤동주가 용정 사람들에게 잊혀져있던 1985년, 그의 묘소를 찾아낸 사람은 일본인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이며, 그 묘소를 단장한 분은 미국의 의학자 현봉학 박사다. 윤동주가 북간도에서 현대식 민족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데는 캐나다 기독교 장로회의 지원이 큰 밑거름이 된 사실도 기억하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하지만 그를 우리만의 좁은 틀 속에 가두지는 말아야 한다. 윤동주는 지금도 많은 아시아인과 세계인의 마음 속에 널리 살아 있다.

떠난지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윤동주가 많은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먼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쉽고 솔직하고 순수한 윤동주의 시어일 것이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내면의 부끄러움을 끝까지 끌어안은 시인의 용기가 아닐까.
1917년 윤동주가 태어났을 때 이미 조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굳어져 있었고, 1945년 그가 세상을 뜰 때에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윤동주는 평생 피식민지 청년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숨기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 있었다.
오늘날 한반도의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수치심과 굴욕감에 고통받고 있는 것 같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끝까지 마주하고 끌어안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순수함과 용기’를 우리에게 조용히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쉽게 씌어진 시
(중략)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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