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國旗)는 어쩌다 우파의 상징이 되었는가?
[최지윤의 스페인 이야기] 스페인 국기 ‘로히구알다’ 한때 프랑코 독재정권 연관설 왜 극우정당 전유물 됐을까 우리도 ‘태극기’ 잃지말아야
스페인 국기를 즐겨 사용한 극우정당
요즘 스페인 정치판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지난 7월 23일에 치러진 조기 총선의 승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원 의석 350석 중 176석의 과반을 차지하는 정당의 대표가 총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 어느 쪽도 과반을 얻지 못했다. 선거 결과 1위를 차지한 스페인 중도우파 국민당(PP)은 137석을 차지했고, 극우 정당 복스(VOX)와 연정을 구성하려고 했으나 복스는 33석을 얻는 데 그쳤다.
반면, 현 집권여당의 경우 현재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이끄는 사회당(PSOE)이 121석을 거뒀고, 좌파연합 수마르(Sumar)가 31석을 차지했다. 두 진영 모두 나머지 군소 정당의 지지 없이는 연정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연정 구성이 어려워지면 2019년 때처럼 스페인 국민은 두 번째 총선을 치러야만 한다.
총선이 열렸던 지난 7월 23일, 필자는 집에서 개표 방송을 보고 있었다. 우파가 승리할 거라는 여론조사, 출구조사와는 다르게 좌파 정당이 선전하면서 승부는 좀처럼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보통 선거 개표는 비교적 빠르게 이루어져서 당일 자정 이전에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개표 방송 끝부분에서는 국민당과 사회당 중앙 당사 앞의 화면이 동시에 중계되었다.
두 정당이 모두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결과가 나왔으나 각 당 대표는 자신이 승리자라고 말하며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방송에서 유독 눈에 띈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각 정당 지지자들이 흔들고 있던 깃발이다. 국민당 당사 앞에서 환호하던 지지자들은 당 로고가 새겨진 깃발과 스페인 국기를 골고루 들고 있었는데 반해, 사회당에서는 스페인 국기를 흔드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는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스페인 국기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사실인 듯했다.

예전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모두 자국의 국기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공원이나 대로변에 큰 스페인 국기가 펄럭이고 있고, 테라스에 국기를 펼쳐 걸어놓은 집도 여기저기 보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차 룸미러에 스페인 국기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노란색 매듭을 지어 걸어놓은 차들도 제법 많이 볼 수 있다. 여름철에는 스페인 국기 색의 팔찌를 착용한 사람들도 눈에 많이 띈다. 필자 역시 지인으로부터 스페인 팔찌를 선물 받아 이 나라를 존중하는 의미로 자주 애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스페인 친구로부터 희한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팔찌는 선거철에 웬만하면 안 차고 다니는 게 좋을 거 같아”라는 말이었다. 알고 보니, 여기서는 스페인 국기 표시 팔찌를 하고 있다간, 우파임을 과시하려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국기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의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서 국기가 왜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일까?
독수리문양 있다없다 한 ‘로히구알다’
‘무적함대’라고 불릴 만큼 강력했던 스페인 해군은 대항해시대를 열어 17세기까지 최전성기를 맞았다. 스페인 국기 ‘로히구알다(La Rojigualda)’ 역시 해군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18세기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로스 3세는 멀리 있는 배가 아군 배인지 적군 배인지 더 쉽게 알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고유의 깃발을 만들려고 했다. 당시 해군은 열두 가지 도안을 제작해 왕에게 보고했고, 카를로스 3세는 두 가지 디자인을 최종 선택해 하나는 해군 군함에, 다른 하나는 상선기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1843년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이들 깃발은 이사벨 2세에 의해 스페인 국기로 명명되었고, 전국적으로 사용되게 됐다. 이어 스페인에 격동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사벨 2세 퇴위 후 급진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고, 1873년에 제1공화국이 세워진다. 왕정이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국기에 있던 왕관 문양을 제외했다. 1년 남짓한 사이 네 명의 대통령이 재임하는 등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고, 결국 1874년 알폰소 12세가 즉위하여 제1공화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나날은 계속되었고 1931년 알폰소 13세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스페인에 제2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이때 새로운 스페인을 만들고자, 하단의 붉은색 대신 카스티야를 상징하는 보라색을 넣어 국가를 수정했고, 아라곤, 나바라, 그라나다 왕국의 상징을 추가했다. 이후 스페인 국기는 프랑코가 정권을 잡은 후에 여러 번 변경됐다. 제2공화국 때 사용됐던 하단의 보라색 부분은 역사적으로 국기에 사용되었던 붉은색으로 복원되었고, 성 대신 왕관이 삽입됐으며 프랑코가 가톨릭 군주(이사벨 1세)에게 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독수리 문양이 추가됐다. 그러나 1981년에 스페인에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프랑코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독수리문양이 없어지고, 부르봉 왕가의 문장이 가운데 부분에 추가됐다.


일부 스페인 사람들은 현재 스페인 국기가 프랑코 시대의 잔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자료에 따르면 그렇다고 보기가 어렵다. 현재 사용되는 국기는 프랑코 독재주의와 관련이 없고, 국기 하단에 있던 보라색 대신 18세기부터 200년 넘게 사용되던 붉은색으로 다시 변경된 것뿐이다. 오히려 국기 가운데 문양은 프랑코 정권의 국기보다 제2공화국 국기의 그것과 훨씬 더 유사해 보인다.
1982년부터 1996년까지 14년 동안 스페인 총리를 지냈던 사회당 소속의 펠리페 곤살레스는 “스페인 국기는 모든 스페인 사람의 유산”이라고 했다. 스페인 헌법에서도 국기가 조국의 주권, 독립, 단결을 상징하며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스페인 진보층과 청년을 중심으로 국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겼다는 뉴스를 많이 보게 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청년들은 스페인 국기에 부정적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극우 정당 복스(VOX)와 관련이 있다. 복스는 여러 시위에서 스페인 국기를 사용해 왔다. 2020년 코로나-19로 모든 국민의 외출이 제한되었을 때 정부의 조치에 반발하며 국민의 자유를 주장하는 시위에서 스페인 국기를 대대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이번 총선 전에는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 해변에서 거대한 스페인 국기를 펼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5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복스의 선거 관계자들은 당 이름과 함께 스페인 국기가 그려진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있었다. 스페인 선거관리위원회가 “어떤 정당도 국기를 당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복스는 결국 국기를 상징하는 배너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일이 있다 보니, 평범한 국민들은 스페인 국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곧장로 우파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버리는 것이다. 보수 정당이 국기를 자기네 것처럼 쓰면, 진보 정당이 이를 막고 적절한 상황에서 국기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묵인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카탈루냐 문제와 관련이 있다.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왕국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나라다. 그러나 각 지역은 언어와 문화가 너무나 달라서 스페인이 하나의 나라로 인식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카탈루냐 지역은 적극적으로 독립을 요구하며, 스페인 국기 사용을 거부해 왔다. 국기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심하냐면, 카탈루냐주 지방자치단체의 18%만이 스페인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고 최근 보도되기도 했다.
지방자치단체는 자국 국기 게양의 의무가 있지만, 페드로 산체스 정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카탈루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현행 규정을 준수하라는 요청을 하지 않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다. 2017년 카탈루냐에서는 분리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가 이루어졌지만, 스페인 정부는 이 투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끝내 스페인 대법원은 국비를 부당하게 사용하여 불법 투표를 이끈 분리 독립 지도자에게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1년 산체스 총리는 이들을 사면했다. 이에 분노한 많은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야당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부조리한 일을 저질렀다며 총리를 비난했다. 산체스 총리는 이번 총선에서도 연정 구성을 위해 카탈루냐 지역 정당 ‘카탈루냐를 위해 함께(Junts)’의 지지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따라서 산체스 총리를 비롯한 진보 정당이 카탈루냐 정서를 의식해 스페인 국기 사용을 자제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국기는 한 나라의 역사와 민족성을 상징하는 존재라 할 것이다. 국제 행사나 스포츠 경기가 있을 때는 국민을 하나로 모아주는 중심이 되기도 한다. 모든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할 국기가 안타깝게도 스페인에서는 보수 정당의 전유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작년에 열린 카타르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을 응원하고자 교실에 스페인 국기를 걸어 놓았던 팔마 지역의 학생 30명이 퇴학당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됐다. 정치적인 오해로 인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스페인에서는 국기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굳어진 지 오래되어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대한민국에서는 국기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 선조들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지킨 우리나라의 역사와 그 숭고한 정신이 담긴 태극기가 어느 한 특정 정당의 전유물이 되지 않도록 함께 지켜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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