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인가?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편향됐을 가능성 있는 데이터를, 과학이 보증하는 유일한 진실이라 주장하면서 동시에 풍수가에게 의견을 묻는 태도는, 전혀 과학적이 아니다
필자는 젊은 시절에 흰쥐의 뇌를 가지고 연구를 했었다. 연구 가설을 세우고 실험 계획을 세우고 데이터를 얻고 분석해서 가설을 검증하고 논문을 쓰는, 겉보기로는 잘 확립된 흐름을 따르는 일련의 작업이었다. 물론 실제 시행하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 중 하나는 같은 실험을 두 번 하였는데 결과가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통계다. 같은 실험을 반복하고 결과를 모아서 통계 처리를 하면 결과가 “믿을만한지”를 판정할 수 있다. 신뢰성 지표인 유의수준 p < 0.05는 나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들에게 ‘자신의 발견이 진짜 옳은 것’이라는 보증서처럼 간주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연구자들의 p < 0.05 연구는 상반된 결과를 제시하기도 하고 심지어 한 연구자의 첫 연구와 다음 연구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연구자들이 수행한 과학은 무엇이었을까?
과학: 실재론과 도구론
과학이 무엇인가, 또는 과학이 무엇을 찾는 작업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두 가지 대립하는 관점이 있다. 하나는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이다. 과학이 기술(記述)하는 것은 자연의 실재(實在, reality)라는 입장이다. 과학이 만들어 내는 기적들 – 이론으로 예측되었던 소립자를 실험으로 찾아내는 것 등 – 은 과학이 실재하는 것을 다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다른 관점은 도구론(instrumentalism)이다. 과학적 발견과 지식은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좋은 과학이 예측 능력이 뛰어난 것은 좋은 도구이기 때문일 뿐 “이론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실재”를 기술하기 때문은 아니다.
실재론은 강력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과학 이론이 기적적 성과를 거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설명을 제공하는 가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면(귀추법,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IBE), 실재론이 가장 좋은 설명을 제공하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가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재를 잘 기술하는 것으로 보였던 정교한 과학 이론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빛에 대한 고전적 과학은 ‘에테르’라는 매질(媒質)을 전제로 한 IBE적 이론이었다. 그런데 에테르를 증명하기 위한 많은 연구들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고, 19세기 물리학자 맥스웰이 빛을 매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자기장의 파동으로 설명하면서 에테르 이론은 무너지게 되었다. 무너진 이론은 IBE였지만, 실재에 대한 기술이라기 보다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때 유용했던 도구일 따름이었다.

‘과학은 진리’라는 신화
실재론 대(對) 도구론 논의는 과학이론 체계에서 인식론적 중요성을 갖는다. 두 입장은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은 그르다기 보다는 과학자들이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 대해 갖는 세계관 또는 가치관이지만, 일반인들이 과학적 발견에 의미를 부여할 때는 의미가 다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막연한 신뢰의 배경에는 ‘소박한’ 실재론이 있다. 과학은 불변의 진리를 기술하는 언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과학은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교육받았고,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았다. 과학이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에게 생소하다. 이는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연구는 인식론적 성찰과 전혀 관계 없이 진행된다. 많은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가 자연현상이라는 실재를 밝히기 위한 작업이라는 암묵적 전제를 갖고 일한다.
그러나 조심스런 연구자라면, 자신의 데이터가 p < 0.05의 검증을 통과해서 논문으로 발표되었더라도 바로 과학적 실재를 찾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태도는 다르다.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적 주장 또는 과학자의 주장은 곧 사실이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지만, 과학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은 ‘진리’라는 믿음은 사회에 퍼져있다.
오늘의 대중매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는 과학자들을 아무런 검증 없이 소개하여 우상으로 만든다. 소박한 믿음은 흔히 악용 당한다. 효능이 불분명한 건강식품이 유명 학술기관에 의해 효과가 증명되었다는 광고 문구를 내세우며 등장한다. 혈액 한 방울로 수백 가지 질병을 진단한다는 벤처기업을 만든 엘리자베스 홈스는, 사기 행각을 벌이면서 첨단 과학을 내세우면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믿어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에는 목적이 없는데 연구에는 목적이 있다
과학을 내세운 기업이나 과학자의 의도적 일탈만이 과학적 실재론을 오남용 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과학은 중립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목적”의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실재는 사람의 존재에 관계 없이 거기 있는 것이지만 도구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도구는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드는 것인데, 목적은 실재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 아니다. 어떤 연구든 목적이 있다. “이 연구를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목적은 과학이 갖는 도구로서의 속성을 보여준다. 아마추어가 취미로 하는 연구가 아닌, 대규모의 공적 연구비가 투입되는 연구에서는 목적이 특히 중요시된다. 국가 연구비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기안되기도 한다.
예컨대 “첨단 산업의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표제를 내세우는 연구비 공모가 발표된다. 이런 연구는 실재인 자연 현상의 속성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를 개발하는 것이다. 때로는 목적 또는 의도가 감추어진 연구 결과가 실재에 대한 중립적 기술인 것처럼 발표된다. 예컨대 교육 기회의 불평등 등 맥락을 숨긴 채 특정 인종의 지능이 다른 인종보다 낮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는데, 인종 차별을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숨은 목적을 갖는다고 의심받을 수 있다.
자연현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도 완전한 중립성은 불가능하고 환경의 요구에 영향받게 되므로, 연구가 찾아낸 것은 절대적 실재가 아닌 “조건부” 실재가 될 수 있다. 물리학계에서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고 보고하였을 때 준거로 삼은 유의수준은 0.05(표준편차의 2배)가 아닌 5-시그마(표준편차의 5배) 였는데, 유의수준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설정하는 것은 위양성(僞陽性), 즉 진짜 발견이 아닌데 진짜라고 잘못 발표할 경우의 혼란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유의수준은 과학적 발견을 위해 중립적으로 참조된 것이지만, 그 기준을 5-시그마라는 수치로 결정할 때는 학계에 미칠 영향이라는 사회적 고려가 필요했다. 반대로 공중 보건에 중요한 독성물질 노출과 질병의 관계에 대한 역학 연구에서, 유의수준을 너무 조심스럽게 설정한다면 심각한 독성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물질이 위험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렇듯 연구의 맥락이나 목적에 따라 통계적 유의수준이 달리 설정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같은 데이터에 기반하였더라도 연구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데, 그런 문제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최종 결과만을 듣고 그것이 실재 또는 진실이라 믿게 된다.
과학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예에서 보았듯이, 과학의 이름으로 주장된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과학적 주장이 실재인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적 합리성이 인류가 살아가는 유일한 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 문화를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적-기계론적 합리성뿐만 아니라 ‘감성적 합리성’ 역시 중요하다. 모짜르트가 위대한 것은 그가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음악이 우리의 감성과 직접 교감하고 우리 마음이 행복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염수의 위험성이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과 분노– 지구촌 동료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도의 인간적 윤리를 저버린데 대한 분노– 를 비과학이므로 무가치한 것, 심지어 거짓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마음이 없이 움직이는 인공지능 로봇에 가깝다. 인공지능이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인간을 따라올 수 없는 것은, 인공지능이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데이터를 학습해서 마음을 시뮬레이션은 하겠지만, 인공지능은 기뻐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분노하는 것도 무엇인지 모른다. 인공지능이 “안다”는 것도 사실은 의인법 비유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은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필요한 과학은 우리가 처한 자연적-사회적-문화적 상황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는 태도지, 특정 주장이 과학적 진실이라 맹종하는 것이 아니다. 맹종은 어떤 경우에도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데이터를 과학이 보증하는 유일한 진실이라 주장하면서 동시에 풍수가에게 의견을 묻는 태도는 전혀 과학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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