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혐오는 문화적 산물이며, 교육과 생활을 통해 전수되기도,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 혐오 공격자들은 특별히 성격이 비뚤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혐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관용의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 시민사회에서는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를 표적으로 한 혐오와 공격이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정치판에서는 자신의 파트너인 정치 세력에 대해 비판을 넘어선 적나라한 혐오의 말들이 오간다. 세계적으로도 냉전의 시대가 부활하고 있다. 인종 청소 범죄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다. 이런 혐오와 적대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진화론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조명해 보자.
싸움-도망, 그리고 혐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자극들을 접한다. 그 자극 중에는 유익한 것도 있고 해로운 것도 있다. 해로운 자극들에는, 나를 잡아먹는 포식자와 나를 병들게 하는 병원체나 독소 등이 있다.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해로운 자극을 피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에게 접근하는 포식자를 피하는 방법은 “싸우거나 도망가는 것(fight-or-flight)”이다. 생리학자 월터 캐넌이 교감신경계의 기능을 설명할 때 사용했던 용어인데, 교감신경계는 신체가 강력한 활동을 하도록 준비시키는 시스템이다. 싸움과 도망은 인류뿐만 아니라 많은 동물에서 기본적인 행동양식이다.
또다른 적응방식인 ‘혐오’는 병원체나 독소를 회피하는 과정에서 진화된 행동양식이라 할 수 있다. 혐오는 강력한 부정적 정서 체험과 신체적 표현이 특징이다. 심리학자 폴 에크만은 인간에게 표정으로 구분되는 여섯 가지 기본 정서가 있다고 하였는데, 분노(anger), 혐오(disgust), 공포(fear), 기쁨(happiness), 슬픔(sadness), 놀람(surprise)이 그것이다(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에 이 정서들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렇듯 혐오는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정서 중 하나다.
혐오는 미각에서 잘 나타난다. 무심코 한 입 베어 문 음식에서 곰팡이 맛이 날 때 우리의 표정은 원형적 혐오를 보여준다. 미각 혐오 반응은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를 독성 먹이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후각에서도 혐오 반응은 잘 나타난다. 배설물 냄새에 우리는 즉각적 혐오 반응을 보인다. 배설물은 우리를 병들게 할 수 있는 잠재적 감염원이니까.
혐오는 본능이지만, 혐오 대상은 학습 가능하다
싸우거나 도망가게 만드는 대상들은 직접 우리를 공격하는 것들인 반면, 혐오를 일으키는 대상들은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존재가 “잠재적” 위험이 될 수 있는 것들인데, 우리는 이런 자극도 강력하게 회피하는 본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혐오 본능은 “무엇(혐오의 대상)”보다는 “어떻게(강력한 거부 반응)”와 더 관계된다. 선천적인 혐오 대상도 훈련에 따라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게 될 수 있으며, 혐오의 대상이 새로 학습될 수도 있다. 학습 능력은 혐오 반응이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해준다.
잠재적으로 위험한 대상 중 다수는 금방 눈에 띄지 않고, “이것이다”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인류가 진화하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위험할 수도 있는 대상은 늘어난다. 강력한 본능적 배경을 갖는 혐오의 힘이 문화적으로 형성된 애매하고 다양한 대상을 향하게 되는 배경이다. 새로운 혐오 대상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문화적 산물이므로, 한 집단에서 교육과 생활 경험을 통해 후대로 전수되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
공격성과 협조성
무엇이 혐오의 대상이 될까? 여러 집단이 섞여서 경쟁하며 생활하는 세계에서는 “나(우리, 내가 속한 집단)와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 혐오의 1차적 후보가 된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내 집단과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으며, 문화적으로는 내 집단과 다른 인종, 문화, 종교를 갖는다. 내 집단의 구성원이더라도, 나-다수와 다른 행동양식이나 믿음을 갖는 사람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경쟁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인데, 싸움을 이끄는 마음의 힘이 공격성이다. 공격성이 항상 파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쟁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 나에게는 이득이 될 수 있겠지만, 상대도 내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집단 전체적으로는 파괴가 최선의 해답이 아니다. 파괴로 인한 손실은 파괴로 내가 얻는 것보다 크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집단 내에서는 이기적 행동(공격적 탈취)보다 이타적인 행동(협조와 양보)이 유전자 보존에 더 유리한 행동양식이라 설명한다. 문화적으로도 비슷한 설명을 할 수 있다. 문화는 진화하는 과정에서 경쟁에 대한 규칙을 갖게 되었다. 규칙이 있음으로써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닌 협조라는 상호작용이 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물이 늘어나서 개인이 얻는 것도 많아진다. 홉스식 사회계약론의 진화론적 근거다.
그런데 협조 규칙은 인류 전체가 아닌, 내 집단 안에서만 통용된다는 문제가 있다. 진화는 집단 내에서 국소적으로 적용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집단이 아닌 대상에는 협조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그 대상이 소수여서, 다수인 내 집단보다 힘이 약하다면 힘으로 파괴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저들을 파괴함으로써 내 집단이 쟁취하는 자원은 늘어난다. 나와 다름–협조 규칙 미적용–이 공격과 파괴로 이어지는 경로인데 이를 매개하는 정서가 혐오다.

저들과 우리
혐오는 우리의 본능을 근거로 한 강력한 잠재력인데, 이웃이 우리, 내 집단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때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포퓰리스트가 특정 소집단에 대해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라고 지목하면 잠재력이 현실적 힘으로 드러날 수 있다.
저들을 쉽게 식별하기 위해 라벨이 붙여지기도 한다. “좌빨, 토왜, 꼴페미, 한남충”등의 용어는 이런 용도를 갖는다. 물론 선동이 다수에게 받아들여지려면 특별한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전에는 그 배경이 소수 집단을 배척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었다.
“저들은 우리와 다름”이 강조되는 것과 대칭으로 “우리의 동질성, 민족 정체성”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혐오 집단과 내 집단간의 다름을 더 뚜렷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가 포퓰리스트에게 이용당하는 가장 무서운 결과는 ‘인종 청소’다. 나치는 유태인을 학살하면서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내세웠다. 아이러니컬하게, 팔레스타인 비극의 배후에는 시오니즘이 깔려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정서적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은 배타적 사회관계망인데, 단톡방에서 특정 개인, “아싸(아웃사이더)”를 혐오하고 따돌리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 되었다. 시위나 플래시몹 등 임시로 만들어진 집단에서도 개인은 집단에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이 상태에서 “저들”을 파괴하는 집단적 공격과 일탈이 일어난다. 책임성 있는 개인으로서의 나는 우리 속에서 잊혀진다.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에, 옆 사람들도 하는 일탈과 공격 행위에 아무런 판단이나 양심의 제어 없이 동참한다.
혐오의 평범성
혐오의 문제가 어려운 것은, 혐오 공격자들이 특별히 성격이 비뚤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이웃이라는 점이다. 평범한 시민이지만, 누군가 조작해 놓았을 수도 있는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숨겨져 있던 강력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 문제는 시민들 개인에게 혐오는 나쁜 것이라고 교육하거나 혐오 행위자를 비난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위자 본인도 그 상황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런 공격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몰랐을 수도 있다.
공격자를 비난하는 것이 새로운 혐오가 되기도 한다. 범죄 뉴스에 달린 댓글들은 용의자에 대한 강력한 혐오 표현을 담고 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기 때문에 저들 범죄자를 혐오해도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클릭수에 목말라하는 인터넷 언론은 이 강력한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기사를 쓴다. 그래서 범죄 기사에서 용의자는 독자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묘사된다. 부도덕한 범죄자는 국산 중형차가 아닌 ‘람보르기니를 타는 사람’이어야 한다. 독자가 안심하고 그를 혐오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기 위해서다. 스스로를 평범한 시민이라 믿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이런 댓글을 통해 혐오 공격자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다양성의 위기
혐오에 대한 가장 자연스런 해결책은 우리 안에 숨어있는 혐오 공격성이 자극 받지 않는 환경에서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다름이 자꾸 일깨워지지 않고, 인식될 필요도 없는 사회 말이다. 다름이 너무 당연한 것일 때 그렇게 될 것이다. 소수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규범이 강조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소수자 옹호 운동이 간혹 강력한 혐오에 부딪히는 것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소수자의 “다름”이 강조됨으로써 다수의 혐오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윤리적 당위성에서 출발한 운동이지만 역설적으로 포퓰리스트의 혐오 선동과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범죄 기사에 람보르기니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력이 “사람을 구분하는 요소”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혐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다양성이 투명한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엄청나게 다양한 정보가 실시간 유통되는 초연결 시대에 다양성은 오히려 사라져가고 있다. 이전에 국지적으로 다양하게 진화하던 문화적 컨텐츠들이 세계화 과정에서 사라지고, 지구적 1등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경제적 세계화가 글로벌 기업 몇 개만 살아남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1등의 독점은 소수들이 유지시켜온 다양성을 말살한다. 이때 혐오가 개입할 수 있다. 한 생산자가 만들어 내는 밈(meme)이 수천만 조회수로 공유되는 시스템을 누군가가 악용하면, 소수에 대한 혐오를 전 세계적으로 퍼뜨릴 수 있다. 충분히 합리적인 개인들도 가스라이팅 당해서 소수를 배척하게 된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은 저들의 것이므로, 그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다양성이 말살되면 인류 문화는 멸종의 길을 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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