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정치는 이젠 그만!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욕망의 정치’, 민주당도 전염돼 시민은 물질적 이익만 추구하지 않고 공동선과 정의 추구한 시민들 많아 민주당 정치, 더욱 시민을 교육시켜야
욕망의 정치
총선 전초전이 한참이다.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참패 이후 국민의힘은 작정한 듯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인요한 혁신위를 가동했을 뿐만 아니라, 김포 서울 편입, 의대 정원 확대, 주식시장 공매도 금지 등과 같은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적절성이나 성공 여부를 떠나, 제법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덕분인지 국민의힘에 대한 정당 지지율도 굳건하다.
사실 진작부터 주류 한국 보수의 선거 전략은 제법 일관적이었다. 그들은 나라와 사회의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제대로 된 고려 없이 유권자들의 말초적 욕망을 수용하고 자극해서 표를 얻으려 한다. 가령 메가시티 서울 공약에는 김포 시민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얄팍한 방식으로 착취해 보겠다는 저열한 정치 술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래도 과거의 보수는 이런 ‘욕망의 정치’를 다른 정치적 수사로 포장이라도 했는데, 지금의 주류 보수는 자신들이 하겠다는 정치의 지향을 그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내가 볼 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무슨 정의나 인권 같은 가치보다는 ‘경제적 이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이런 욕망이 가능한 한 아무런 외적 방해 없이 충족되는 데서 성립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많은 시민들은 실제로 가능한 최대한의 이익 추구라는 준거에 따라 세상을 살고 또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게 한국 보수가 믿는 구석이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한국 보수는 유권자 시민들을 그냥 원초적인 욕망에만 충실한 ‘개·돼지’로 본다. 그들에게는 영남 지역주의라는 일차적으로 결정적인 정치적 지반이 있다. 그러나 내년 총선 같은 전국 단위의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 지역주의가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든 수도권과 서울에서 이겨야 한다. 그들은 여기에서 이기기 위한 관건이 그러한 욕망을 어떻게 잘 부추기느냐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이미 ‘부자 되기’가 시대정신이었던 MB 시절 여러 선거에서 입증되었던 바다.
진보적이라는 민주당도 못지않다. 이 당도 선거 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 온갖 선심성 공약을 내놓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의힘이 김포시를 서울시로 편입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공약을 내놓아도 표 계산 때문에 제대로 거부도 못 한다. 지난 대선 때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미래를 위한 제대로 된 비전 제시는 뒤로한 채, 무슨 ‘소확행’ 공약에만 매달리다 패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이 당은 청년 세대의 지지를 끌어낸다며 “정치는 잘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고 거두어들인 적이 있다. 나는 이게 어쩌다가 일어난 해프닝이 아니라고 본다. 그 사건은 저열한 욕망의 정치가 민주당마저 휘어잡고 있음을 방증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국 정치는 언제 이런 욕망의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민주당의 패권주의적 욕망의 정치
그런데 민주당이 펼치는 욕망의 정치에는 조금 특별한 구석도 있다. 민주당은 DJ(김대중)와 노무현 전대통령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 인권, 사회적 약자 보호, 보편 복지와 같은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이 당은 언제부턴가 그런 ‘가치의 정치’를 은근슬쩍 포기하고서 그저 집권당으로서 또는 제1당으로서 누리는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정치를 많이 해 왔다.
20대 총선 당시의 위성정당 창당이나 당헌·당규를 바꾸기까지 하면서 감행한 서울시 및 부산시장 보궐선거 참여 같은 일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번에는 지난 대선을 전후로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스로 약속했던 ‘정치개혁’ 약속도 얼토당토않은 현실 논리를 핑계로 헌신짝처럼 버릴 태세다. 자신들이 주도해서 통과시키고 심지어 확대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아예 포기하려 하고, 잘못했다고 깊게 사과까지 했던 위성정당 창당도 배제하지 않겠단다.
놀랍게도 그런 무지막지한 행태를 정당화하는 이유는 늘 그랬듯이 하나밖에 없다. 어떻게든 반대편 국민의힘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정치적 힘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 제1당이 되고 과반 의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도대체 여러 차례의 정치개혁 약속은 왜 했는지, 권력을 얻어 무얼 하겠다는 건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그냥 맹목적으로 권력에만 집착하는 패권주의적 욕망만 드러낼 뿐이다.
이런 정치도 가장 나쁜 의미에서 시민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정치다. 이런 정치는 시민들에게 원초적인 ‘정치적 부족주의’를 강요한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 진영과의 싸움에서 어떻게든 이기는 것인 만큼, 정치인과 정당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지지자들은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한다고 요구한다. 설사 그 선택이 앞서 했던 약속을 저버리고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어긋나더라도 말이다.

형성적 정치
당연히 시민은 ‘개·돼지’가 아니다. 시민들은 그런 정치에 대해 반드시 응징하기 마련이다. 민주당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위성정당 창당에도 불구하고 180석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경험을 내세우며 이번에도 유사한 일이 반복될 거라 기대하는 듯하지만, 엄청난 착각이다. 그런 우연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서울 및 부산시장 보궐 선거에서부터 지난 대선 및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했었다는 사실은 그 점을 웅변한다.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민주당의 정치적 승리를 추동하는 참된 동력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이 틀림없다. 민주당은 참된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했다. 민주당의 정치적 성공은 지역주의에 기초한 정치적 부족주의나 시민들의 물질적 이익에 호소하는 욕망의 정치에 기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민주당은 늘 수세에 몰렸다. 왜 민주당이 다시 이런 방향으로 선택을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민주당은 다가오는 총선에서 이미 지고 있다. 이 나라의 미래가 걱정이다.
욕망의 정치는 우리 시민들에 대해 어떤 공리주의적 인간관을 갖고 사고한다. 사람들은 으레 가장 원초적인 물질적 이익의 보호와 확대를 가장 중요한 행위의 동기로 삼는다고 보는 게 이런 인간관의 요체다. 여전히 우리 보수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한때 우리 진보 진영 전반이 알게 모르게 수용했던 마르크스주의도 공유하고 있는 인간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은 또한 일정한 도덕적 가치나 정의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물질적 이익이라는 것도, 어떤 날 것 그대로의 것이 있다기보다는, 일정한 도덕적 필터를 통해 해석되고 구성되기 마련이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이란 개인의 원초적 욕망 추구 너머에서 어떤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공동체 전체의 공동선과 정의를 더 우선시하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바로 그런 시민들이 일구어낸 것이다.
정치가 시민을 ‘개·돼지’로만 여기고 시민들의 어떤 원초적 욕망에만 반응하거나 그 욕망을 부추기려고만 들 때, 시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정치를 그렇게 취급한다. 정치는 단순히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이전투구의 장(場)일 따름이다. 공동선이든 사회정의든 그냥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어떻게든 나와 내 편이 이기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 여기서 정치는 자신을 모욕할 뿐이며, 시민들의 정치혐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물론 반대 방향의 정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품위 있는 정치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 사이의 갈등과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서도 우리 정치공동체 전체를 위한 공동선(善)의 모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치 행위자들이 서로에 대한 맹목적 적대가 아니라 절도 있는 경합 속에서 우리 공동체가 마주한 도전들을 극복하기 위한 해법을 찾아내려고 다툰다. 그런 경합은 결국 우리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비전에 대한 것이다.
이런 정치는 시민을 성숙하고 덕성 있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정치가 만들고 다듬어 내는 법과 제도 그리고 정치의 문화와 양식이 시민들의 공동선에 대한 지향과 정의감을 고양할 수 있다. 그런 정치 덕분에, 예컨대 시민들은 사회적 약자를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포용과 연대의 대상으로 여기는 데 익숙해질 수 있다. 더 큰 정의감으로 사회적 불의에 저항할 것이고, 공동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양보하거나 재해석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은 이런 정치를 ‘형성적 정치(formative politics)’라 불렀는데, 한 마디로 정치가 시민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 특히 진보적 민주당의 정치가 이런 정치를 실천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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