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비관론자’ 헤르만 헤세의 힘겨운 사랑

[홍성광의 독일 작가들의 사랑 이야기] ‘극강의 에고이스트’ 헤르만 헤세 결혼 실패엔 가정 돌보지 않는 성격 탓 세 번째 결혼한 니논과는 18살 차이 까칠한 니논과 뒤늦게 행복찾아...’성자’

말년의 헤르만 헤세(왼쪽)와 니몬.
말년의 헤르만 헤세(왼쪽)와 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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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이혼하고 세 번 결혼한 헤세

흔히 ‘성자’ 또는 ‘현자’로 불리는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놀랍게도 두 번이나 이혼했고, 세 번 결혼했다. 헤세는 결혼을 원하지 않는 소위 ‘결혼 비관론자’였다. 여성들의 나이도 들쭉날쭉했다. 사진작가인 첫째 부인은 자신보다 9세 연상이었고, 성악가인 둘째 부인은 20세 연하, 셋째 부인은 18세 연하였다.

고대 유적지를 탐방하고 고대 문화 연구에 열정을 쏟았던 고고학자 겸 미술사학자인 셋째 부인 니논 아우스랜더(Ninon Ausländer, 1895~1966)와는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같이 살았다. 헤세는 그녀를 ‘어린 소녀’라고 부를 정도로 그녀와는 나이 차가 있었다. 자살 충동이 있었던 그는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오래 살아 그토록 유명한 문필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가정과 가족에 무심했던 헤세의 결혼생활은 상대편인 여성들 입장에서는 삶 전체가 난폭하게 휩쓸고 지나가는 재난과 같았다. 헤세의 성향은 유목민이나 사냥꾼, 방랑자, 외톨이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결혼한 후 말년에 그는 비로소 성자(聖者)가 됐다.

첫 부인인 마리아 베르누이(오른쪽)와 헤르만 헤세. 중간에 있는 아이는 큰아들 브루노.
첫 부인인 마리아 베르누이(오른쪽)와 헤르만 헤세. 중간에 있는 아이는 큰아들 브루노.

헤세의 열렬한 팬 니논

루마니아 체르노비츠 출신인 니논 아우스랜더(Ninon Ausländer, 1895~1966)는 루마니아계 유대인 변호사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니논은 처음에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그 다음에 고고학과 고대 예술사로 전공을 바꾼 오스트리아 여자였다.

1909년 14살이던 니논은 헤세의 유명한 소설 『페터 카멘친트』(1904)를 읽고 열렬한 팬이 되어 헤세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1920년 12월 22일 그날도 어린 소녀는 헤세의 소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읽고 편지를 썼다. 헤세가 자기를 ‘확실하게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편지 속에 자신의 사진도 넣었다. 편지의 한 대목.

“이 무슨 놀라운 언어인가요! 집약된, 간결한, 육중한, 다채로운, 그리고 이글거리는.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어요. 내 안에 무언가 강렬한 힘을 느꼈답니다. 당신에게 내가 누구인지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어요.”

헤세를 찾아간 니논

니논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도 헤세에게 편지를 보냈다. 1920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1922년에 여동생 토카가 자살했을 때도 편지를 보내 헤세의 답장을 기다렸다. 니논은 1918년에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여전히 헤세에게서 구원을 바랐다. 그녀가 결혼한 프레트 돌빈은 엔지니어이자 풍자 만화가로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그래서 니논은 남편과 별거 생활에 들어갔고, 혼자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살아가고 있었다.

1926년 3월에 니논은 헤세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하고 취리히에 있는 그를 만났다. 헤세는 그녀에게 “그동안 (자살)충동을 느끼면서도 망설였는데, 얼마 전부터는 두려움 없이 자살할 수도 있겠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이어 “하지만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먹고 내 인생을 사랑하기로 했다”라는 말에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혼을 망설이는 헤세

이때는 헤세에게 ‘위기’의 시기였다. 두 번째 부인 루트 벵거(Ruth Benger, 1897~1994)와의 관계가 완전히 파경에 이르지는 않아 헤세와 니논 사이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니논은 헤세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자 했다. 그녀는 ‘불쌍한 아이’ 헤세를 위해 어머니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헤세의 전 부인, 마리아 베르누이와 루트 벵거 모두 실패했던 역할이었다. 헤세는 니논의 적극적 구애에 거부감과 부담감을 느꼈다. 이 무렵에 나온 시 「유혹자」(1926)에서 그는 “자신은 무엇을 소유해도 행복할 수 없다”며 자신이 구애하더라도 들어주지 말라고 호소한다.

헤세는 1927년초 두번째 부인인 루트 벵거가 이혼을 요구하자 마음이 편치 않아, 안질, 두통,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병석에 누워 삶을 저주하며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헤세는 어린 시절에도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편집자주)

그러나 그와 인생을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은 니논의 도움으로 헤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27년에 헤세는 「니논을 위해」라는 시에서 “그대는 내 곁에 머물고 싶어 하나/ 내 삶은 어둡기만 하다오.[...] 그대와 그대의 사랑은/ 내게 선한 정령이 되어줄 것이오”라며 자신의 심경을 밝힌다.

두번째 결혼생활을 함께 했던 아내 루트 벵거(왼쪽)와 헤르만 헤세
두번째 결혼생활을 함께 했던 아내 루트 벵거(왼쪽)와 헤르만 헤세

두 번째 부인 루트 벵거와 이혼한 헤세

1927년 4월 24일, 두 번째 부인 루트 벵거와의 이혼 판결이 내려지자 헤세는 혼자의 몸이 되었다. 니논에게 헤세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였지만 이제 그녀의 꿈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운명을 함께 짊어지려고 하지 말라’는 헤세의 경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달 뒤, 니논은 몬타뇰라의 카사 카무치(스위스 루가노시 안에 몬타뇰라라는 마을에서 헤세가 살던 집-편집자주)에 들어와 헤세 집의 다른 공간에서 사는 분리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둘은 가정 내 편지를 통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렇지만 헤세 곁에 가까이 있게 될 걸로 기대했던 니논에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헤세는 하루의 일과를 미리 정해 놓고 지냈는데, 아침에는 아무도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루트 뱅거에게 하던 방식 그대로였는데, 니논은 처음에는 불평 없이 그대로 따랐다. 18살이나 어린 니논은 그러나 변덕이 심한 헤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을 질투했다.

마침내 결혼하는 헤세와 니논

니논은 헤세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친구나 애인이 아니라 부부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 헤세는 니논과의 관계에서 거리감이 사라지면 ‘속박의 굴레’에 갇힐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1931년 11월 14일, 헤세와 니논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헤세는 54세였고, 니논은 36세였다.

결혼할 당시 헤세에게 니논은 ‘덤불 속 꿈의 요정’이라며 사랑하긴 했다. 꽃을 심고 씨 뿌리는 모든 곳에 물을 흘려보내고, 꽃 피지 않는 시금치가 자라게 하고,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를 보내주는 요정 말이다. 헤세는 니논을 달에 비유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현명함이 깃든 당신의 검은 눈동자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소./

아, 그녀가 언제나 내 곁에 머물기를.”

결혼 전날 헤세는 작가 비간트에게 쓴 편지에서 “니논이 오래전부터 바라던 결혼이었고, 앞으로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반대로 니논은 기쁜 나머지 스위스의 루가노역에서 로마로 혼자 신혼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헤세에게는 결혼이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체념의 서약’이었다. 헤세는 결혼 다음 날 류머티즘 치료를 위해 독일 바덴으로 떠났다. 결혼하고선 따로 여행을 간 특이한 부부였다.

서로 다른 성격의 헤세와 니논

체르노비츠에서 14살의 여학생이 바라던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우상을 만나 함께 살고 있었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아내가 되었다. 헤세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고독한 삶을 원하는 은둔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부 단둘이 있을 때는 분위기가 어느새 냉랭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다.

니논은 헤세의 신경질을 감당하기 힘들어 했고, 그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니논은 헤세와 살면서 그다지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헤세는 니논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고 부부 관계도 없었다.

헤세와 니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다. 헤세는 정원 일을 좋아했으나 니논은 그렇지 않았다. 병고에 시달리는 그에게는 정원 일이 의미 없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녀는 고대 예술이나 신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헤세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너그러워진 반면, 그녀는 헤세와 함께 지내면서 학위 논문도 포기한 채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니논은 주인과 하인 간의 격식을 따지는 유럽 동쪽(루마니아) 출신이었다. 그래서 하녀와 하인들은 상하관계가 엄격한 니논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들을 친밀하게 대하는 헤세를 좋아했다. 니논은 동부 유럽과 스위스가 풍속이나 예절에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헤세의 옛 스위스 친구들에게도 불편함과 거부감을 주었다. 헤세가 호텔 종업원들과 자유분방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휴양객들과 격식을 차리지 않고 어울리는 것도 그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헤세를 사람들로부터 격리하려고 했다.

산책하는 니논(왼쪽)과 헤르만 헤세.
산책하는 니논(왼쪽)과 헤르만 헤세.

헤세, ‘성자’와 ‘에고이스트’ 사이에서

늙은 헤세는 이제 고집 세고 완고하면서도 ‘젊은’ 니논에게 맞설 힘이 부족했다. 헤세는 니논의 슬픔과 불만, 집 청소나 식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니논은 헤세를 마치 갓난아이처럼 다루었다.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성자’ 헤세를 말이다.

헤세의 집 하인과 하녀들은 헤세를 좋아하는 것에 그녀는 질투를 느꼈다. 그녀가 여행을 떠나면 헤세는 요리사와 하녀를 초대해 아들들과 함께 야외 드라이브를 즐기곤 했다. 니논은 헤세에게 오는 우편물과 헤세를 찾는 방문객까지도 통제했다. 헤세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나이가 든 탓에 그녀의 지배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큰아들 브루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헤세는 자신이 결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결혼은 예술가나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줄 뿐이란다.”

그렇지만 헤세의 성격을 그런대로 잘 파악한 니논은 그와 해로할 수 있었다. 니논은 부부가 같이 괴로워해야지, 아내가 남편에게 충고하거나 도움을 주려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헤세에게는 일을 한다는 것이,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괴로워하며 또 엿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헤세는 자신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성자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 에고이스트”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세계에 침잠하여 홀로 괴로워하면서 고독하게 지내려 했고, 그럴 때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내든 자식이든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헤세의 마지막 시 「부러진 나뭇가지의 삐걱거림」

헤세는 말년에 가서 예전보다 성격이 더 밝아지고 원만해졌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자살 충동도 사라졌고, 건강과 작업에 대한 불평도 수그러들었으며, 더 이상 사소한 문제로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공존이었다.

1962년 8월 8일, 헤세와 니논은 여느 때처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함께 들었고, 니논이 읽어주는 글에 귀를 기울이며 지냈다. 아침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나선 헤세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들고는 “아직도 싱싱하네”라고 중얼거렸다.

그날 밤에 니논은 헤세의 침대 곁에서 그의 마지막 시 「부러진 나뭇가지의 삐걱거림」을 보았다.

“부러져 꺾인 나뭇가지/

벌써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매달려/

바람에 메마른 노래 삐걱거린다.[...]

잎도 다 떨어지고 껍질도 없이/

앙상하고 헐벗은 채/

너무 긴 목숨과 너무 긴 죽음에 지쳐버렸네.”

헤세의 우울한 심정은 여전해 보였다. 부러진 가지는 고립무원으로 죽어가는 상태를 나타내고, 삐걱거리는 메마른 노랫소리는 마지막 저항과 체념, 그리고 삶의 회한과 임박한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메마른 가지도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파릇파릇 살아나듯이, 헤세에게는 자연의 순환에 의한 재탄생의 희망이 버리기엔 이른 나이였다. 헤세는 이 시를 쓴 다음 날 아침 더 이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의 나이 85세. (헤세는 몬테뉼라 마을 산타본디오 묘지에 묻혔다. 이 묘지는 취리히 다다 운동의 선구자 휴고 발, 지휘자이자 작곡가 브루노 발터의 무덤도 있다.-편집자주)그러나 그를 아끼고 기리는 많은 독자들에 의해 거듭 다시 태어나 영원히 부활했다. 그의 마지막 아내 니논은 홀로 남겨져 자유로운 몸이 되어 헤세의 유고들을 정리하여 출판했다.

니논은 우울하고 힘들 때마다 헤세의 무덤을 찾아갔다. 1966년, 헤세의 기일이 다가오자, 니논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고 우울증은 심해졌다. 의사의 진료를 받기로 예약되어 있었던 9월 22일 아침, 니논은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루가노의 의사가 몬타뇰라 마을의 카사 카무치에 도착했을 때는 헤세의 왕국을 함께 일궜던 니논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글쓴이

홍성광 번역가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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