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비판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뉴라이트를 비판하고 일본을 경계하는 것은 ‘반일종족주의’ 때문이 아니다. 일본이 우리의 민주공화국의 이상 실현을 방해하고 억압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광복 79주년 국회-시민사회 1000인 선언'이 열리고 있다. 이 자리에서 참여자들은 뉴라이트 역사학자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임명 철회를 요구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 8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광복 79주년 국회-시민사회 1000인 선언'이 열리고 있다. 이 자리에서 참여자들은 뉴라이트 역사학자인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임명 철회를 요구했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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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비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에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막가파’일 줄은 몰랐다. 방송통신위원장부터 국가인권위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자질은 물론, 가치관이나 국가관마저 의심스러운 사람들만 골라서 국가 고위 공직을 맡기고 있다. 심지어 독립기념관장엔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인물을 앉히고, 노동운동을 적대시하는 극우 인사를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총선에서 드러난 국민들의 심판 정서도 비판적인 여론도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겠단다.

그런데 대통령이 최근 발탁한 인사들은 모두 ‘뉴라이트’ 계열이거나 적어도 뉴라이트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대통령 자신은 뉴라이트가 무엇인지 모르며 충성심과 능력만 보고 사람을 선택했다는 ‘엽기적인’ 변명을 내놓긴 했지만, 새삼 이 정권의 뉴라이트적 본성이 확인되고 있다. 진작부터 그는 국가교육위원장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뉴라이트 인사들을 계속 중용했더랬는데, 틀림없이 대통령 자신의 뉴라이트적 인식 때문일 거다.

주지하다시피 뉴라이트는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합법이라고 볼 뿐만 아니라 그런 식민지화 덕분에 우리나라가 근대화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곧 식민지 지배는 억압이 아니라 ‘은총’이었다는 거다. 바로 이런 인식의 배경 위에서 윤석열 정권은 지속적으로 친일 행보를 했을 터다. 일제강점기 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제3자 변제 해법 제시, 홍범도 장군 동상 철거, 일본 정부의 사도 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묵인, 친일 역사교과서 발간, 독도 조형물 철거 등 열거하자니 끝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윤석열 정부의 뉴라이트적 행보와 관련하여 단순히 친일적 성향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판해서는 안 된다. 친일적 행태가 괘씸하기는 하나, 뉴라이트적 행보를 단순히 무슨 ‘밀정’이나 ‘토착왜구’의 준동이라는 차원에서만 볼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최근 들어 한국 보수의 주류가 된 것처럼 보이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참된 뿌리와 이상을 부정하거나 호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한국 보수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제대로 그려 본 적은 없으나, 내 눈에 윤석열 정권 들어 한국 보수는 ‘올드 라이트’의 전통을 일정하게 계승하면서 뉴라이트적 세련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예나 지금이나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인 것 같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부터 최근의 광복절 경축사에 이르기까지 어울리지도 않는 자유 타령을 줄곧 해댄 데서 뿐만 아니라, 가령 최근 검정을 통과한 모든 역사 교과서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만 서술하도록 강제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북한도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니 자유민주주의만이 진짜 민주주의란다.

내가 볼 때 이런 이데올로기적 신조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슬그머니 자유민주주의, 그것도 한국 보수에 의해 엉터리로 이해된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어 버린다는 데 있다. 1919년이 아니라 1948년이 건국의 기점이 되어야 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뉴라이트적 주장이 핵심적으로 노리는 바도 바로 여기에 있지 싶다. 이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닌 게, 이런 접근은 민주공화국의 정당성과 참된 이념이 무엇인지 무시하거나 기껏해야 그 핵심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있다고 퉁치면서 기득권 질서를 수호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가스라이팅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유민주주의 개념은 아주 기가 막힌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갖고 있다. 한국 보수가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자유민주주의는, 통용되는 보편적인 인식에 비추어 볼 때,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기 힘들다. 입만 열면 자유를 외치는 윤석열 정부 들어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엄청나게 하락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는 분명하다. 이것은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유신 헌법을 만들면서 독일 헌법에서 훔쳐 와 왜곡해 집어넣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해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모델은 애초의 독일 헌법이 가장 경계했을 법한 전체주의적 유신체제다.

물론 지금 한국 보수가 옹호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유신체제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 보수는 바로 그런 역사적 배경을 계승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형된 유사-권위주의 체제로 이해하는 것 같다. 또는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응한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체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최대한의 시장적 자유다. 여기서는 어떤 형식이든 당사자들 사이에서 아무런 간섭 없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계약이라면, 설사 한 쪽 당사자가 절대적 약자이고 극한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경우라도, 정당하다. 노예계약과 유사한 착취적 노동계약은 물론 일본이 조선에 강제한 식민지 계약도 합법적 형식을 취했다면 정당하다. 이런 자유는 결국 사회적 강자들이 약자들을 마음대로 착취하고 지배할 수 있는 자유다. 나는 예전 칼럼에서 윤석열이 옹호하고 있는 이런 식의 자유 개념이 얼마나 ‘차갑고 메마른지’를 다룬 적이 있는데(칼럼: 윤석열의 자유는 차갑고 메마르다), 참고 바란다.

그런데 이 체제에서 정치적 자유나 민주주의가 제대로 보장되어야 하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국가는 시장의 자유로운 활동과 확대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기본적인 법과 질서만 지켜지면 개인들 사이의 권력 불균형에서 생기는 어떤 결과도 정당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장적 질서의 유지이지 법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아니다. 법을 통한 지배(rule by law)는 필요하지만, 민주적 법치(rule of law)는 관심사가 아니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이해된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발전이다. 이런 시장경제의 발전이 있었다면, 일본의 군국주의적 전체주의나 군부 독재는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식민지 시대 한반도 인민들의 정치적 자결권이 박탈된 상태에 있었다거나 광복 이후에도 ‘친일파’들이 역사적으로 단죄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회적 기득권을 누렸다는 등의 역사적 사실들은 그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아니, 그런 것들이 시장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면 오히려 긍정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윤석열이 가끔 무슨 경축사에서 그랬듯이 독립운동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자기들이 이해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차원에서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1919년 10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1919년 10월11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사성과 도덕적 이상

이와 같은 식으로 이해된 한국 보수의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민주공화국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민주공화국에서도 자유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지만, 이때의 자유는 노예적 피지배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 전체의 집단적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했다. 우리 민족은 이런 지배를 거부하고 3.1 ‘민주혁명’을 통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이 민주공화국은 제대로 이해된 자유민주주의, 곧 시민들의 기본권이 최대한으로 보장되는 헌정화된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결코 한국 보수가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서구의 공화주의는 이런 자유를 ‘비-지배(non-domination) 자유’라고 개념화하는데, 이런 자유 개념이 단순히 서구에서 수입된 것은 아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이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건국의 철학적 기초를 닦았던 조소앙 선생은 그런 자유의 이념을 유교 전통과도 깊이 맞닿아 있는 ‘삼균주의(三均主義)’를 통해 표현했다.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균등을 추구했던 이 삼균주의는 우리 민족을 노예 상태로 만든 일본의 억압적 정치체제를 극복하고 모든 시민이 평등한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지향했다. 여기서 모든 시민은 평등한 정치적 권리와 교육 기회를 향유하고 실질적인 물질적 독립 상태를 누릴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이해되었다.

이런 민주공화국의 이념은 뉴라이트가 강조하듯이 미국을 통해 외부로부터 우리 사회에 이식된 게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유교적 대동(大同) 사상을 동력 삼아 오랫동안 나름의 공화주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천하위공(天下爲公: 세상은 모두의 것이다)’이라는 유교적 공화주의 이념은 조선 시대 이래 모든 정치의 핵심 지향이었으며, 왕과 사대부의 공동 통치를 뜻하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넘어 구한말에는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입헌군주제로서의 ‘군민공치(君民共治)’라는 헌정적 이상도 발전시켰다.

이런 바탕 위에서 순종의 국권 포기 이후 인민들이 주권을 계승하여 주권자가 되는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은 결코 무슨 역사적 곡예가 아니었다. 3.1운동은 바로 그런 주권자 선언을 통해 한반도 인민들이 민주적 시민으로 떨쳐 일어섰던 우리 민주공화국의 정초혁명이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삼아야 한다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우리 민주공화국의 이런 역사성을 완전히 무시할 뿐만 아니라, 민주공화국이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도 곡해된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로 왜소화한다. 느슨하게 이날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의 건국이 형식적으로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 있으나 이날이 그 기점은 아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참된 천하위공의 공동선을 실현하려 했던 우리 선조들의 오랜 노력과 투쟁의 바탕 위에서 건국되었고, 지금도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 투쟁을 교란하고 왜곡하려 한다. 민주공화국에서는 시장경제가 부정되지는 않겠지만 시민들의 자치가 온전하게 실현되는 민주적 정의가 더 중요하다. 민주공화국이 시민들 사이의 완전한 획일적 평등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시민 누구든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 위한 물질적 안정과 독립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친일적 뉴라이트를 비판하고 일본을 경계하는 건 무슨 ‘반일종족주의’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 역사적으로 바로 이런 민주공화국의 이상 실현을 방해하고 억압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점을 놓친 채 단순히 어떤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친일 비판에만 몰두하다가는 ‘아직도 반일 타령이냐?’며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보수의 역공세를 제대로 물리치기 힘들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 민주공화국의 역사적 뿌리와 이상에 대한 부정이지 단순한 친일이 아님을 놓치지 말자.

글쓴이

장은주 영산대 교수

장은주는 영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정치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한국 민주주의가 좀 더 안정되고 성숙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필요한 철학적 인식을 다듬는 게 주된 관심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대학에서 ‘비판사회이론’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사회의 고유한 삶의 문법과 발전 동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 함양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에 관심이 많다. <인권의 철학>, <정치의 이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같은 책을 썼다. 최근에는 <공정의 배신>, <공화주의자 노무현>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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