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설’ 장정구...세계복싱의 역사를 쓰다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변화무쌍한 전술과 임기응변...복싱천재 주먹이 어디서 나올지 몰라...유명우도 고전 ‘명예의 전당’에 이름 올려...인간미도 뛰어나
부산의 ‘스트리트 파이터’ 출신
이번 주 칼럼의 주인공은 한국복싱계의 빛나는 전설 장정구다. 한국 프로복싱 제12대 챔피언이자 세계적인 복싱 랭킹 사이트 복스렉(Boxrxc)에서 세계 라이트 플라이급 (LF)급 올 타임 1위에 등극한 살아있는 신화 그 자체인 장정구.
부산시 아미동 출신의 장정구는 1975년 3월 14일 김현치와 벤 필라폴로의 경기를 보면서 적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김현치에 반해 그해 7월 충무동 로터리에 있는 극동 체육관에 입관, 복싱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3살,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에 스스로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승리의 서사를 꿈꾸기 시작했다.
장정구는 1976년부터 아마복서로서 처음 데뷔한다.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 장흥민을 비롯, 청소년대표 김평국, 대학선수권 최우수복서 안현문, 전국체전 금메달 김재홍, 동양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최연갑, 1979년 세계청소년 대회 은메달 홍동식, 1981년 김명복배 최우수복서 김상찬 등 기라성 같은 복서들과 맞닥뜨렸다. 장정구는 이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아마 전적 38전 33승(14KO) 5패의 전적을 쌓아 올렸고 전도유망한 복서로 성장하고 있었다.
1980년 어느날 장정구에게 특별한 인연이 찾아온다.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을 지낸 김성준이 타이틀을 상실한 후 부산에 훈련하러 내려왔다. 그의 스파링 파트너가 바로 장정구였다. 그때 신들린 듯 주먹을 휘두르는 장정구를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복싱계 대모 심영자 회장의 오빠인 심준섭 씨(시나리오 작가)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장정구는 1980년 전국체전 부산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거뒀다. 하지만 부산 복싱협회에서 대회를 앞두고 대표를 장흥민으로 전격 교체하자 장정구는 아마추어생활을 청산하고 1980년 11월 제10회 MBC 신인왕전 출전, 프로에 데뷔한다.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심영자 회장이 후원회장으로 있는 극동 프로모션에 안착했다. 6연승(2KO)을 거두면서 우승과 함께 우수신인왕에 등극했다. 그 대회 준결승에서 후에 IBF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신희섭을 상대로 한차례 녹다운을 뺏으며 완승을 거둔 경기는 압권이었다.
장정구의 죽마고우이자 1982년 대학선수권 플라이급 우승자인 정석봉은 필자와 장정구의 성공 요인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장정구가 유년 시절 아미동 산동네를 하이에나처럼 어슬렁거리며 싸움판을 벌이다가 체득한 스트리트 파이터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과 부산 경남지역의 우수한 아마추어 복서들을 상대하며 기량을 한 단계씩 끌어 올린 덕분”이라고 진단했다.
‘노력형 천재복서’...유명우도 혀를 내두를 정도
장정구의 세계타이틀 도전은 1982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1982년 7월 10일 전WBC 라이트 플라이급(LF) 챔피언 아마도 우르수아(멕시코)를 상대로 한차례 다운을 빼앗은 끝에 10회 판정승을 거두며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세계챔피언은 파나마의 사파타. 그해 9월 18일 충주체육관에서 WBC 챔피언이자 22전 20승(8KO) 2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사파타에 도전했지만 장정구는 근소한 차로 판정패했다. 장 챔프는 훗날 “19전만에 기록한 이날의 첫 패배가 미래의 장정구를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절치부심, 와신상담한 끝에 사파타와의 재대결은 그후 6개월 뒤인 1983년 3월 26일 열렸다. 장정구는 경기초반부터 사파타를 거칠게 몰아부치며 맹공을 가했다. 챔피언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채 날개만 퍼덕거리는 잠자리 마냥 무기력했다. 결국 3회 2분 46초만에 사파타가 백기를 들었다. 세계복싱계에 ‘짱구 시대’가 화려하게 열리는 순간이었다.

사파타는 1980년 3월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나카지마(일본)를 제압하고 처음 세계정상에 오른 후 김치복(한국), 나카지마(일본), 멜린데스(도미니카), 베세라(멕시코) 등을 제압한 후에 나중에 WBA 동급 챔피언이 되는 조이 올리버 (미국)마저 13회 TKO로 잡아내면서 전승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후에도 헤르만 토레스(멕시코), 보라싱(태국) 등을 차례로 잡으며 8차 방어에 성공했던 그는 9차 방어전에서 28승 (22KO) 10패의 우르수아의 강타에 2회에 침몰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르수아를 꺾고 정상에 오른 일본의 도모리 다다시를 일본 원정경기에서 2 대 1 판정으로 잡는데 성공하는 등 2체급에서 3차례 정상에 올랐고 통산 14차 방어까지 성공한 챔프였다. 필자가 지켜본 챔피언 사파타는 장신의 사우스포 (왼솝잡이)로 허리가 고무줄처럼 유연하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굉장히 까다로운 최상위급 고수였다.
장정구가 사파타에 도전할 당시 한국은 김태식이 WBC 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아벨라에게 패한 후 1년 7개월동안 11명의 복서들이 세계정상의 문을 두드렸지만 잇따라 패배의 쓴잔만 들이키고 있었다. 장정구는 12번째만에 타이틀 획득에 성공한 것이어서 기쁨은 두배로 컸다. 그해 6월 11일부터 시작된 타이틀 방어전에서 일본의 이나미를 2회 KO 시킨 장정구는 이어 헤르만 토레스, 치탈라타, 도카시키등 강적들을 연파하면서 방어횟수를 늘려갔다. 1986년 9월 몬티엘을 꺾고 한국복서로는 최초로 10차 방어벽을 넘었고 이후에도 5차례나 더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동양출신 복서로서 최다방어(15차방어)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장정구는 42전을 치르는 동안 20차례가 세계타이틀전이었다. 또한 42차례 대결중 세계챔피언을 역임한 복서와 17차례 맞대결, 13승 4패의 성과를 거두면서 순도(純度)높은 커리어를 과시했다.
이런 퀄리티 높은 성공을 이룩한 장정구 챔프와 현역시절 여러 차례 스파링을 경험했던 유명우 전 WBA 동급 챔피언은 선배 장정구를 어떻게 평가할까. 유 챔프는 “장정구 선배는 예측 불가능한 곳에서 펀치가 나오는데, 지금껏 접해 본 적 없는 한 클래스 높은 복싱 스타일로 타점(打點) 맞추기가 무척 힘겨웠다”고 회고한다.

유명우 챔프의 촌평처럼 장정구는 한마디로 ‘변화무쌍(變化無雙)한 복서’였다. 그는 상대 스타일에 따라 전략과 전술을 임기응변으로 전환할 줄 아는 ‘노력형 천재 복서’였다. 장정구와 스파링을 치른 적이 있는 황동룡도 비슷한 말을 했다. 황동룡은 1982년 볼리바르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WBC 동급 세계랭킹 6위에 올랐었다. 그는 “장정구 특유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스타일에 혼이 빠져 나만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3년부터 장정구의 경기와 스파링을 숱하게 지켜본 필자 생각에도, 장정구는 한마디로 복싱에 특화(特化)된 ‘타격기계’(打擊機械) 였다.

한국 최초, 동양 최초 이어 세계 최고
장정구는 뛰어난 기량으로 복싱 캔버스 밖에서도 크게 각광을 받았다. 그는 WBC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을 85년, 86년, 87년에 걸쳐 3년 연속 수상했고, 1993년에는 WBC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뽑은 최우수복서 27인에, 2000년엔 WBC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서 25인에 각각 선정돼 호세 슐레이만 WBC 회장에게 기념패를 받았다. 또 2014년엔 WBC 체급별 최우수복서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더욱 뜻깊은 기록은 2010년에 세워졌다. 장정구는 그해 2010년 6월 13일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한국인 복서 최초로 입성했다. 이렇게 장정구는 ‘한국 복싱의 레전드’가 되어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장정구
장정구는 인간적인 매력도 넘쳐났다. 필자가 곁에서 지켜본 장정구의 가장 큰 인간적인 장점은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배려심이다. 그는 세계타이틀 15차 방어에 성공할 때까지 임현호 사범에게 자신에게 매달 지급되는 월급에서 50만원을 떼어 활동비로 드렸고, 전지훈련이나 해외 원정 방어전에는 보조 트레이너는 물론 운전기사까지 자신이 경비를 부담하면서 동반 참석시킬 정도였다. 또 한 경기 끝날 때마다 들어오는 격려금 중 일부를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필자는 오래 전 장 챔프와 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에 투숙한 적이 있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새벽녘에 전화벨이 울렸다. 오하시 히데유끼 회장이었다. 그는 현역시절 장 챔프와 두차례 타이틀전에서 KO패한 일본 복서였다. 그후 35년이 흘렀지만 두사람은 지금도 친형제처럼 지낸다. 오하시 회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우는 이들에게 본인이 장정구 챔프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KO패 했던 당시 상황을 툭하면 얘기한다고 한다.
오하시는 장 챔프와 대결한 후 한 체급 내려 1990년 2월에는 WBC 스트로급에서 최점환을, 1992년 10월에는 WBA 미니멈급에서 챔피언 최희용을 각각 잡고 양대기구 챔피언에 오른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이 두 경기로 일본의 세계타이틀전 21연패 흑역사(黑歷史)를 청산한 일본복싱의 레전드 중 한명이다. 그는 또 현역시절 WBA 미니멈급서 22차 방어에 성공한 52전 51승(38KO) 1무를 기록한 챔피언 리카르도 로페즈(멕시코)와도 싸워봤던 사람이다.
필자는 이런 오하시 회장과 대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두 선수에 대한 전력을 비교 평가해 달라고 했는데, 오하시 회장은 망설임 없이 “두 선수 모두 힘들고 벅찬 상대임에 틀림없지만, 장 챔프가 로페즈 보다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웠다”고 답했던 기억이 새롭다.
필자는 1992년 12월 심영자 회장의 주선으로 88체육관 트레이너로서 장 챔프와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다. 장 챔프는 지도자 스타일과는 적성이 맞지 않았다. 그가 지도했던 9전 8승 (8KO) 1패의 김오곤 선수가 1993년 2월 27일 올림픽 펜싱장에서 벌어진 화이잘 아카바(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자 다음날부터 체육관에 발길을 끊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가 6개월 만에 타격코치 생활을 접었다는데 장 챔프는 딱 2개월 지도자 생활을 했다. 국내 스포츠계에서 장효조, 최동원 등 프로야구 슈퍼스타들도 지도자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는데, 장정구도 그랬다.

최근에 장 챔프는 필리핀 전지훈련 때 인연을 맺은 이천 호텔 인트라다를 경영하는 박치순 전 필리핀 한인회장과 복싱경기를 참관하는 등 변함없이 복싱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1935년 조선 권투 연맹이 발족한 이래 75년만에 한국인 최초로 복싱 명예의 전당에 오른 장정구 챔프에게 경의를 표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