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으로 아마 최강...’전설의 국대’ 이현주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70~80년대 아마복싱 전성기 11차례 ‘국대’ 고교생으로 올림픽 선발전서 형들 다 꺾어 한일국가전에서 ‘14초만에 KO승’ 전설 써

1982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 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여한 한국 복싱국가대표팀.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이현주.
1982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 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여한 한국 복싱국가대표팀.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이현주.

모교의 종합우승을 이끌다

지난 3월24일 폐막한 2022 대한복싱협회장배 전국 복싱종별대회는 또 하나의 밝은 역사가 쓰여지는 무대였다. 전남체육중학교 복싱부가 알토란 같은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며 중등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충남 청양 군민회관에서 벌어진 이번 대회에서 42㎏급 김태수(전남체중 3학년)는 결승에서 이승훈(대전 가오중)을 만나 3 대2 판정승을 거뒀다. 또 46㎏급의 유태민(3 학년)은 최인우 (온양 신정중)를 5대 0 판정으로, 48㎏급 임유빈(2 학년) 역시 권종찬(대전 가오중)에 4 대1 판정으로 잡고 각각 1위에 올랐다.

이밖에도 50㎏급 권민준(3 학년)은 결승전까지 올랐으나, 준결승에서 입은 손목부상으로 기권하는 불운으로 은메달에 머물렀고, 52㎏급 이승훈(2 학년)은 준결승에서 안현민(세종복싱클럽)에 아쉽게 패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눈부신 성과에 힙입어 전남체중 유은상 코치가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는 기쁨을 누렸다. 이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현주 감독. 아마추어 최강의 복서라는 전설을 갖고 있는 사람.

폐막후 최종술 전남체육중 교장은 이 감독의 체계적인 선수 관리와 유은상 코치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지도력를 높이 평가했고, 힘든 훈련을 묵묵히 이겨낸 선수들이 코치진과 조화를 맞춰 금자탑을 일궜다고 격려했다. 이번 종합우승은 전남 체육중고 복싱팀이 창단후 두번째. 이 감독이 다녔던 전남체고는 1987년 광주시가 광주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없어지고 광주체고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후 2000년에 전남체중이 전남 무안에 신설됐고 3년후에 전남체고가 다시 태어났다. 새롭게 설립된 전남체중고에서 두번째 종합우승을 하게 된 것.

특별히 필자는 축하의 말과 함께 이번 주 <더 칼럼니스트>의 주인공으로 그의 감춰진 이력(履歷)을 펼쳐보기로 했다,

대회 우승의 주역들인 전남체중 복싱팀. 왼쪽부터 유은상 코치, 김태수, 권민준, 유태민, 이승훈, 임유빈 선수. 그리고 이현주 감독
대회 우승의 주역들인 전남체중 복싱팀. 왼쪽부터 유은상 코치, 김태수, 권민준, 유태민, 이승훈, 임유빈 선수. 그리고 이현주 감독

인생의 방향 바꿔 ‘천하무적’으로 서다

이현주는 1961년 7월 18일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유제두, 백인철, 동양 챔피언 정영길, 1985년 월드컵과 1986년 아시안게임 라이트플라이급(LF)급을 재패한 오광수 등 을 배출한 전남 고흥 태생이다. 본래 육상 중장거리 선수로 1975년 전남 체육중에 입학을 하지만,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자 이듬해 복싱으로 전환했다. 역시 인생은 누군가의 말처럼 ‘속도(速度)’가 아니라 ‘방향(方向)’이라고 했는데, 이현주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었다.

유도의 올림픽 금메달 조민선(한국체대 교수)과 김미정(용인대학 교수)도 서울체고 재학시절 평범한 육상선수 출신였다. 이를 감안하면 육상은 모든 종목의 기초란 생각이 든다. 1978년 전남체고에 복싱으로 입학한 이현주는 육상선수 출신답게 뛰어난 지구력을 바탕으로 1979년 6월 제9회 대통령배에 전남 대표(밴텀급)로 출전, 결승까지 올랐다. 비록 지택림(충남)에 판정으로 패했지만 정상급 수준의 복서로 인정받기 충분한 실력을 보였다. 당시 이현주가 속한 1979년의 전남체고 복싱팀은 역대급 전력을 보유한 최강팀이었다. 1년 후배인 김종섭, 김동길, 송중석, 성두호와 1년 선배인 박기철, 이남의 등과 함께 이현주는 ‘세븐스타(Seven Star)’를 형성, 전국 무대를 휩쓸며 천하무적(天下無敵)을 자랑했다.

한국 아마추어 스포츠 역사에 1979년은 특별한 해였다. 축구에서 대구 청구고는 변병주, 박경훈, 백종철, 백치수 등이 맹활약해 고교 축구 역사상 초유의 5관왕을 달성했다. 청구고와 비견될 만큼 복싱에서는 전남체고 복싱부가 전국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복싱팀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치 1971년 황규봉, 이선희, 배대웅, 천보성, 정현발, 함학수, 구영석등이 포진해 전국대회 5관왕을 달성한 야구의 경북고 신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아마추어 복싱계에서 역대급 전력을 보유한 팀이 바로 이현주가 속한 <전남체고 복싱팀>이었다.

고교생이 성인무대를 평정하다

1979년 9월, 학생 대표로 대만에 원정 첫 국제경기 경험을 쌓은 이현주는 이를 발판으로 그해 12월 모스크바 올림픽 1차 선발전(페더급) 결승에서 이거성(당시 경희대), 서인석(동아대), 박태국(해태제과), 유인봉(경남대), 한창덕(중산체), 최진식(부산극동)등 일당백(一當百)의 복서들을 차례로 잡은 킹스컵 국가대표 출신 테크니션 전학수(수경사)와 일전을 벌인다. 절대 열세란 예상을 뒤엎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판정승을 거둬 기염을 토한다. 최종선발전에서 정교한 아웃복싱을 구사하는 박태국에 판정패하는 바람에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지는 못했다.

박태국와 일전을 벌이고 있는 고교 2학년 이현주(오른쪽).
박태국와 일전을 벌이고 있는 고교 2학년 이현주(오른쪽).

그를 지켜본 동료 복서인 박기철은 “이현주는 문성길과 동일한 파이터였지만 그에 비해 레벨과 클라스가 한단계 높은 파이터였다”고 평했다. 천부적인 복싱 스킬을 바탕으로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선발전 최종 결승전에 전남체고 2학년 재학중인 이현주가 진출했던 것이다. 다음해 졸업반인 이현주는 제1회 회장배 대회를 비롯, 제34회 전국선수권을 휩쓸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특히 그해 6월 일본 후꾸오까 산업대 체육관에서 벌어진 한일국가대항전에서 일본 대표 ‘야구비’에 기록적인 14초 만에 KO승을 거두는 깜찍 실력을 보여줬다. 이 기록은 1982년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김동길이 홍콩의 라우 윙키에 거둔 31초 KO승보다 빠른 기록으로 남아있다.

선수생활 당시 숙적이던 고희룡(왼쪽)과 함께. 그와의 경기에서 패하면서 이현주는 사실상 은퇴했다.
선수생활 당시 숙적이던 고희룡(왼쪽)과 함께. 그와의 경기에서 패하면서 이현주는 사실상 은퇴했다.

탄력을 받은 이현주는 목포대학에 진학한 1981년 제2회 뉴욕월드컵을 시발로 1982년 제4회 세계선수권, 킹스컵, 마르코스배,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등 무려 2년 4개월 동안 11차례 국제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빠짐없이 출전한다. 한일국가대항전 2연패를 비롯,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국제대회 3관왕을 달성했고, 제7회 킹스컵과 제1회 마르코스배 은메달 등 각종 대회에서 총 8개의 메달을 획득하며 국위를 더 높였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 듯, 계속돤 강행군으로 1982년 7월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이현주는 체력이 고갈돼 탈진된 상태에서 감기몸살까지 겹치는 바람에 태국의 사와디 윙과의 준결승에서 2회에 충격적인 KO패를 당한다. 이어진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선발전(라이트급)에서 국제대회 3관왕 고희룡에게 판정패하면서 사실상 복싱을 접는다.

61년생 소띠 복서들의 전성시대

이현주는 한국 아마복싱에서 한 획을 그은 1961년생 소띠 복서들인 전칠성, 문성길, 김동길, 고희룡, 진행범, 곽귀근, 김유현, 최우진 등과 어우러져 1980년대 한국 아마복싱의 전성기에서 한축을 담당한 대표적인 복서였다. 소띠 출신은 뭔가 특별한 스포츠 재능을 타고난 것일까.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박재홍, 차명주, 김종국, 송지만, 박종호등 90년대 한국 프로야구를 풍미한 선수들 역시 1973년 소띠 선수들이었다. 당시 한국스포츠계 인기종목인 복싱과 야구에서 태백산맥처럼 중추적인 역할을 한 주역들은 소띠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현주는 11차례 국가대표로 출전한 국제 대회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대회로 1981년 1월 일본 시즈오카에서 벌어진 제2회 한일국가대항전을 꼽았다. 당시 한국은 8승 5패로 우세를 보였고 페더급에 출전한 이현주는 일본 국가대표 우사미를 판정승으로 이긴 대회였다. 특히 라이트헤비급(LH) 급에 출전한 김유현이 일본의 사토를 맞아 1회 2분 22초만에 통쾌한 KO승을 거두자, 당시 경기를 현장에서 참관했던 모 사업가 등이 사업하면서 일본인에게 겪은 울분을 통쾌하게 복수해줬다며 즉석에서 선수단에 회식을 제의할 정도였다.

당시 선수단을 통솔했던 조철제 전무는 선수단의 체중조절을 이유로 거절하고 귀국 후 연락을 취해 무교동 일식집에서 그 사업가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 사업가는 즉석에서 선수단에게 ‘천만원’을 쾌척, 선수단이 일식집에서 풍족하게 만찬을 즐겼다는 후문이다. 그 사업가는 이후에도 프로복서 김치복과 골든컵 금메달 김인창(한국체대) 등을 적극 후원 하며 복싱에 깊은 사랑과 애정을 보였다.

‘전설’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1984년 전국체전을 끝으로 굵고 짧은 복서 생활을 접은 이현주는 대학 졸업후 제주 체육회와 전남체육회에 근무했다. 2000년에 전남 무안에 전남 체육중학이 신설되자 교사로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2003년에는 전남체고가 창설과 맞물려 복싱부를 창단하자 복싱 감독으로 부임한다. 지난 2018과 2019년 고등부 56㎏ 급에서 고성훈이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하자 이현주는 지도자로서도 입지를 구축했다. 한국복싱의 미래라 불리는 고성훈은 이듬해 대전대로 진학, 한국 아마복싱의 대들보로 성장했다.

이번 대한복싱협회장배 종별대회에서 만나 함께 포즈를 취한 곽귀근 경북체고 감독(왼쪽부터), 이현주 감독, 홍기호 서원대 감독.
이번 대한복싱협회장배 종별대회에서 만나 함께 포즈를 취한 곽귀근 경북체고 감독(왼쪽부터), 이현주 감독, 홍기호 서원대 감독.

이현주 감독 겸 교사는 곽귀근 경북체고 감독 겸 교사, 홍기호 서원대 복싱 감독과 더불어 아마 복싱계에서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품격 높은 대표적인 복싱인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이번 종합우승에 대해 이현주 감독은 필자에게 “4년 전에 전남 체육 중고에 복싱강사로 취임한 유은상 코치가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한 덕”이라며 자신은 모든 것을 유 코치에게 맡기고 행정적인 관리 감독만 했다고 몸을 한껏 낮췄다.

이번 대회에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은 충주공고 출신의 유은상 코치는 공수주(攻守走) 3박자를 겸비한 테크니션에 복싱센스가 탁월한 복서였다. 1997년과 1998년 필자가 서울체고 코치로 재직때 각종 전국대회에서 코크급 결승에서 서울체고 국나남과 결승전에서 우승컵을 놓고 2차례 맞붙은 인연이 있었다. 1999년 한국체대에 진학해 2000년 시드니올림픽 선발전에 라이트 플라이급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유 코치가 오는 5월 28일 벌어지는 제51회 소년체전에서도 이현주 감독을 잘 보필해 전남체육중 선수들이 값진 성과를 올리기를 기대한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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