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위해 금메달 양보한 국가대표 박형춘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복싱계의 페스탈로치’ 박형춘 올림픽 국대였지만 출전불허에 ‘눈물’ 1970년 방콕亞게임서 금 놓쳐 ‘억울’ 정부, 돈없어 유치권 반납했던 일화

만 30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박형춘.
만 30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박형춘.

원주를 강원도 복싱 메카로

2022년 숨가쁘게 한해를 달려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이다. 이번 글의 주인공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 1970년 4월 마닐라 아시아선수권, 12월 방콕아시안게임 대회에서 라이트 헤비급 복싱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박형춘이다. 그를 통해 그가 출전한 올림픽과 아시아 경기 대회에 얽힌 숨은 비화를 채굴하기 위해 지난 주말 박형춘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1940년 2월 전남 보성 출신의 박형춘은 1977년 설립된 한국체육대학교 초대 복싱 감독을 시작으로 경희대 복싱 감독을 거쳐 1979년 태릉선수촌에 입촌,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퇴촌할 때까지 대표팀 코칭스텝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복싱계의 페스탈로치’라 불릴 정도로 온화하고 자상한 인품의 박형춘 선생은 후학들에게 존경받아온 대표적인 지도자다.

한국 아마복싱의 기승전결, 흥망성쇠를 현장에서 지켜봐온 지도자 중 한 명인 그는 1957년 전남공고 1학년때 호남체육관 이재인 관장 문하에서 복싱을 수학한다. 그러다가 1963년 강원도 원주에서 군대 생활을 하면서 복싱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원주복싱 송영수 사범의 지도로 기량이 일취월장해 제 44회, 47회, 49회 전국체전에서 3회에 걸쳐 금메달을 따냈다.

강원도 원주는 홍천, 춘천에 비해 복싱의 기반이 크게 약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박형춘의 등장으로 원주 복싱계가 심기일전하게 됐다. 그는 1965년 군 제대후 원주에 정착, 원주대학과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그동안 원주 체육관에서 관원들을 지도해 지용주, 박종목, 이명호, 황광옥, 황광렬, 구본옥, 이상덕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잇따라 배출했다. 복싱계의 변방 원주를 강원도 복싱의 주무대로 거듭 태어나게 한 것이다. 플레잉 코치(Playing coach) 역을 맡았던 박형춘은 각종 대표 선발전에서 김덕팔, 이금택에게 고배를 마시며 대표팀에서 탈락하면서 부침을 겪는다. 그들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한 베테랑 복서였다.

올림픽 출전 기회 무산

월남전 참전용사인 친동생 박형석의 복싱 선수 생활은 형 박형춘에게도 자극이 됐다. 군 복무를 마친 동생 박형석은 1968년 어느 날 군 복무를 끝내고 형을 따라 원주에 들어왔고, 박형춘의 세심한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와신상담하던 박형춘은 그해 개최된 멕시코 올림픽 선발전의 라이트 헤비급 결승에서 고병남을 꺾고 우승을 차지, 태극마크를 단다. 그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당시 선발된 대표팀은 단장 김택수 대한복싱 협회 회장, 감독 강준호, 국제심판 박인양·김명곤에다가 선수로는 라이트 플라이급 지용주, 플라이급 서상영, 밴텀급 장규철, 페더급 김성은, 라이트급 이창길, 라이트 웰터급 김사용, 웰터급 박구일, 라이트 미들급 이홍만, 미들급 김승미, 라이트 헤비급 박형춘, 헤비급 김상만 등이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는 국제경쟁력에서 밀린다는 이유로 중량급인 이홍만, 김승미, 박형춘, 김상만에 대해 올림픽 출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와 임원중에 80세까지 사신 분은 김명곤 심판뿐이었다. 대부분 55세 전후로 짧은 삶을 살았다. 1983년에 김택수 회장이 57세의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것을 비롯, 1984년엔 박구일 40세, 박인양 64세, 1985년엔 지용주 37세, 1990년엔 강준호 68세, 2000년엔 장규철 54세, 2002년엔 이창길 54세, 2004년엔 김사용 59세, 2007년엔 김성은이 64세의 일기로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출전한 복싱협회임원과 대표선수 중 현재 전북 군산에 거주하고 있는 서상영(80세)씨가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멕시코 올림픽에 선발됐지만 찬밥신세가 되어 중도하차한 박형춘을 포함해 이홍만, 김승미, 김상만 등 중량급 4인방은 현역 은퇴후 국가대표 복싱 감독, 복싱해설자, 쿠웨이트 복싱 감독 등을 지내는 등 복싱 일선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올림픽 출전 불허의 아픔을 겪은 박형춘은 2년 뒤인 1970년 4월 제4회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출전, 준결승에서 태국의 룬녹을, 결승에선 파키스탄의 사워르에 각각 RSC 승을 거두는 등 파죽의 4연승(3KO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어진 그해 12월에 벌어진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도 라이트 미들급에 선발된 동생 박형석과 함께 국가대표에 발탁된 박형춘은 한국 아마복싱 백년사에 최초인 ‘형제 복서 국가대표’에 등재된다.

눈물의 방콕 아시안게임

선발전이 끝나고 얼마 후 복싱 훈련장에 귀한 손님이 방문한다. 아시안게임 단장에 선임된 장덕진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다. 장 회장은 복싱선수단을 향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종합 2위를 달성할 경우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에게 집 한 채 값인 1백만 원을 지급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때 돈 1백만원은 서울 마포에 18평 강변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당시는 중국이 본선에 참가하기 전이라 일본이 아시안게임 대회에서 독주를 할 때였고 한국이 태국, 인도와 2위 자리를 놓고 각축하고 있었다.

뒷줄 중앙에 장덕진 아시안게임 단장과 앞줄 왼쪽의 박형춘 김태호
뒷줄 중앙에 장덕진 아시안게임 단장과 앞줄 왼쪽의 박형춘 김태호

장덕진은 1934년 춘천 출신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로 고시 3과에 합격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런 당근 정책을 내놓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66년 축구 월드컵에서 ‘동양의 진주’ 박두익이 활약한 북한팀이 이탈리아를 1대 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일궜다. 이에 자극받은 남한 정부는 ‘체육 한국’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시안게임을 서울에 유치하려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대만, 실론(현 스리랑카)과 치열한 유치전 끝에 대회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국가재정능력이 문제가 됐다.

당시 제2차 경제개발(1967~1971년)에 쏟을 돈이 급한데, 스포츠 행사에 투입할 자금이 부족해 1967년에 결국 20만달러의 위약금을 물어가며 유치권을 반납했다. 1967년 그해 남한의 1인당 국민총생산량(GNP)은 142달러, 수출은 3억 2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한국이 반납하자 태국이 1970년 방콕에서 재정적자를 짊어지고 1966년에 이어 2회 연속 대회를 치른다. 이때 단장으로 선임된 장덕진이 실추된 국가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메달 효자종목인 복싱 대표팀에 파격적인 당근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 금메달 후보는 밴텀급에서 대경상고 3학년 김태호였다. 김태호는 강펀치의 서상영을 판정으로 잡고 선발된 기대주였고, 뒤를 이어 박형춘, 지용주, 김성은, 김현치, 조원민이 메달권 후보였다. 여담이지만 미들급의 조원민은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펀치력이 발군인 복서였다.

방콕아시안 게임이 열리자 눈앞에 1백 만원이란 포상금이 걸린 금메달을 향해 11체급의 태극전사들이 표범처럼 달려들어 상대방을 향해 맹공을 가했다. 그리고 결승전이 펼쳐진 12월 15일 한국은 김충배, 지용주, 김성은, 김현치, 정영근, 박형석, 박형춘등이 7체급에서 결승에 올랐다. 결과는 라이트 헤비급에 출전한 박형춘을 제외한 6체급의 선수들이 금메달을 획득했다. 폐막을 나흘 앞둔 12월 15일 남한은 금메달 12개를 획득하며 금메달 9개를 획득한 인도를 밀어내고 종합 2위를 차지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 왼쪽부터 정영근, 박형석, 박형춘, 김현치, 김태호, 지용주, 김성은, 김충배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 왼쪽부터 정영근, 박형석, 박형춘, 김현치, 김태호, 지용주, 김성은, 김충배

박형춘은 결승전에서 이전에 한차례 격돌해 RSC로 제압한 태국의 론록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석연찮은 버팅으로 2회 눈부상을 당하면서 ‘억울한’ RSC 패배를 당했다. 이때 한 외교관이 박형춘에게 다가와서 한국의 아시안게임 반납으로 인해 태국은 엄청난 적자를 감수하며 대회를 치루는 바람에 ‘반한 감정’이 극에 달한 상황이라고 알려줬다. 그는 이런 현실에서 한국이 태국에 금메달 한 개를 양보(?)한 것은 박형춘 개인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선 다행한 일이라고 말하며 박형춘을 위로했다.

박종규 대한체육회장과의 일화도

박형춘은 이후 복싱을 접는다. 그리고 1977년 한국체대와 경희대 복싱 감독을 지내면서 김인창, 황충재를 조련해 이들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1979년 3월 조철제 복싱협회 전무의 추천으로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의 경호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뉴욕에서 개최된 제1회 월드컵 대회의 국가대표 코칭 스탭으로 전격 발탁돼 태릉선수촌에 입촌한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미들급의 신준섭,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플라이급의 김광선이 금메달을 획득할 때 현장에서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수훈을 세웠다.

1979년 뉴욕 복싱 월드컵대회를 마치고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을 접견하는 박형춘 대표팀 코치(왼쪽)
1979년 뉴욕 복싱 월드컵대회를 마치고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을 접견하는 박형춘 대표팀 코치(왼쪽)

박형춘은 대표팀 코치로 첫 출전한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 대회에서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회상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치러진 그 대회에서 황철순, 김인창, 박일천 등 3명의 복서가 유연하고 빠른 몸놀림, 동물적 감각으로 결승에 진출해 은메달 3개를 획득했다. 탈(脫)아시아권 수준의 경기력을 연출하자 이에 크게 고무된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이 사비 5천만원을 털어 선수단 전지훈련비로 지급했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난 주말에 만났을 때 박형춘 선생에게 “요즘 아마복싱이 최악의 침체기에 빠진 원인이 무엇이냐”고 필자가 묻자 그는 “복싱은 멘탈 경기”이라며 “바위처럼 단단했던 의지가 진흙처럼 물컹해지는 순간, 무기력한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다”면서 정신력 강화를 역설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칼은 녹슬어서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쥐고 있는 무사의 의지가 사라졌을 때 가치도 사라진다’는 어느 사무라이의 독백이 떠올랐다. 지난 한해 칼럼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한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