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란드에 투사된 미국의 ‘정체성 불안’

①제국의 ‘존재론적 안보’에 대해 그린란드 ‘소유’에 집착하는 트럼프 희토류, 북극항로, 군사거점 논리 빈약 ‘세계1위 지위’ 불안 징후로 해석해야 ‘위대한 미국’라는 서사를 만들려 해 향후 세계질서, ‘새로운 경쟁’ 시작된다

사진= SBS뉴스 캡쳐
사진= SBS뉴스 캡쳐

▶ 칼럼을 대화로 들어보세요

“합의는 쉬운 길이다. 하지만 쉬운 길이 안 되면, 힘든 길로 갈 것이다.”

올해 1월 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석유·가스 기업 경영진을 만난 자리에서 던진 이 말을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보긴 어렵다. 트럼프는 그린란드 문제를 두고 ‘쉬운 방식(딜)’이 통하지 않으면 ‘어려운 방식(군사적 옵션)’을 선택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지난 2019년 처음 ‘그린란드 매입’이 거론됐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이를 부동산 재벌출신 특유의 과장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재집권 이후 이 구상은 더 노골적인 국가 프로젝트로 변모했다. 트럼프는 2025년 말 루이지애나 주지사 제프 랜드리를 ‘그린란드 특별대사(특사)’로 임명했다. 덴마크와 그린란드 정부는 즉각 반발하며 “그린란드는 그린란드인의 것”이라고 못 박았다. 최근 그린란드 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미국의 “인수/장악 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방위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틀 안에서 다루겠다고까지 밝혔다.

그렇다면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왜 미국은, 그것도 동맹국 덴마크의 영토를, 이토록 ‘소유’하려 하는가? 희토류, 북극항로, 군사 거점…. 설명거리는 많지만, 이상하게도 무엇 하나 결정타가 되지 못한다. 그린란드엔 이미 미군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토대가 있고, 피투픽 우주기지(Pituffik Space Base) 같은 핵심 시설도 운영 중이다. ‘접근권’이 아니라 ‘소유권’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캐나다, 러시아, 북유럽에 둘러싸여 있는 그린란드.
캐나다, 러시아, 북유럽에 둘러싸여 있는 그린란드.

존재론적 안보(ontological security)

여기서 국제정치학의 개념 하나가 도발적인 해석을 제공한다. ‘존재론적 안보(ontological security)’, 즉 국가는 물리적 생존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지속성을 지키려 한다는 관점이다. 국가는 스스로를 설명하는 서사(敍事,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가 흔들릴 때, 군사적 위협만큼이나 강한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그 불안이 커질수록 정체성을 ‘증명’해줄 상징적 행동에 매달린다.

트럼프의 그린란드 집착은 이 틀에서 더 설명력이 생긴다. 핵심은 섬의 가치가 아니라, ‘소유’라는 행위가 주는 정체성 효과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미 미국이 덴마크에서 자유롭게 군사행동을 할 수 있는데 왜 소유해야 하는냐는 질문에 “성공을 위해서는 심리적으로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소유권은 임대나 조약으로는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이 사안이 국가전략을 넘어 권력자의 정체성 정치와도 맞물려 있음을 보여준다.

‘미완의 서사, 그리고 중국·러시아의 부상과 ‘지위 불안’

미국의 국가적 자아(自我)는 오랫동안 ‘확장’과 결합해왔다. 19세기 서부 개척을 정당화했던 Manifast Destiny(명백한 운명)는 ‘미국은 더 넓어져야 미국답다’는 감각을 낳았다. 1867년 알래스카 매입이 조롱(‘아이스박스를 샀다’는 수어드의 어리석음)을 받다가도 훗날 전략적 승리로 재해석된 역사는, ‘지금의 비웃음은 미래의 영광’이라는 서사를 반복 생산한다.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알래스카에 겹쳐 보려는 유혹은 여기서 나온다. 그에게 그린란드는 자원지대이기 전에 “위대한 미국”을 다시 서사적으로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것을 심리극으로만 환원할 필요는 없다. 그린란드가 북대서양·북극권의 요충지이고, 미사일 방어와 감시체계에서 의미가 큰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트럼프가 반복하는 논리는 대개 이렇게 정리된다. “우리가 안 가지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가진다.” 로이터 역시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러시아·중국의 잠재 점유”로부터 막기 위해 “미국이 소유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해왔다고 전한다.

이 언어는 전형적인 지위 불안(status anxiety)의 징후다. 21세기 미국은 더 이상 유일무이한 관리자’로 자신을 확신하기 어렵다. 경쟁자의 부상은 단순한 군사적 위협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인가’라는 질문을 되살린다. 불안에 빠진 제국은 종종 과격해진다. 그래서 ‘군사기지를 더 쓰는 것’이 아니라 ‘영토를 소유하는 것’이 더 매혹적 처방으로 떠오른다. 소유는 가장 원초적이고 직관적인 권력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비합리성”을 설명하는 이론

이쯤 되면 반론이 따라온다. “결국 자아를 위해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너무 끼워맟추기 혹은 스토리텔링 아닌가?” 하지만 ‘존재론적 안보’가 겨냥하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겉으로 ‘비합리’로 보이는 행동이, 내부의 정체성 논리에서는 ‘증명’이자 ‘합리’가 되는 순간.

이해하기 어려운 집착으로 변하는 모습은 국제정치에서 생각보다 흔하다. 그 집단의 맥락을 공유하지 못하면, 왜 그 문제가 ‘목숨값’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이라는 황무지를 두고 수십 개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인다고 말한다면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랜드리 그린란드 특사는 X(구 트위터)에 “전쟁 후 덴마크가 유엔 프로토콜을 무시하고 그린란드를 ‘재점유’했다”는 취지로 적기도 했다. 사실관계 논쟁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런 언어가 동맹을 상대로까지 ‘정체성’과 ‘역사’를 무기로 삼는 방식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국제정치는 점점 더 ‘무엇이 합리인가’의 싸움이라기보다, ‘무엇이 정당한가’의 서사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자유주의 질서의 균열은 ‘약육강식’만 부를까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흔들리면 사람들은 곧장 19세기 제국주의를 떠올린다. ‘룰이 무너지면 결국 약육강식으로 돌아간다’는 공포는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나는 그 결론이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자유주의 질서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미사여구에 가깝다. 정말로 질서의 균열이 곧바로 국제정치의 정글을 복원할까?

이 질문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우리가 힘, 혹은 권력 (power)을 무엇으로 정의해왔는지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A가 B로 하여금 원래 하지 않았을 일을 하게 만드는 강제력”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바넷과 듀발(Barnett & Duvall)이 지적하듯, 권력은 그보다 훨씬 다층적이다. 때려서 움직이게 하는 힘만이 아니라, 담론과 의미를 통해 무엇이 정상이고 정당한가라는 기준을 생산하는 힘, 다시 말해 행위자의 정체성과 선택지를 규정하는 힘까지 포함한다. 쉽게 말해 권력은 “굴복시키는 힘”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해석하는 문법을 지배하는 힘”이다.

이 지점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쇠퇴가 갖는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은 단순히 미국의 군사력이 약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유주의 질서가 지녔던 생산적 권력, 즉 “힘이 무엇인지, 무엇이 정당한 행동인지, 무엇이 국제사회에서 정상으로 인정되는지”를 규정하던 표준 자체가 흔들린다는 뜻이다. 규율이 촘촘한 환경에서는 아무리 강한 국가도 룰을 ‘연기’하며 행동할 수밖에 없다. 룰이 분명한 경기에서는 힘이 제한적이고 형식적으로 발현된다. 하지만 심판이 흐려지고 규칙이 느슨해지면, 갑자기 경기의 양상 자체가 바뀐다. 행위자에게 주어지는 선택지가 늘어나고, 그 순간 국가는 단지 더 세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줄 서사를 찾아 나선다.

그린란드 마을의 풍경
그린란드 마을의 풍경

그래서 “질서의 붕괴=약육강식”이라는 도식은 절반만 맞다. 룰이 약해진 세계에서 국가는 힘을 앞세우되, 그 힘을 그냥 쓰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야기 (역사, 상징, 기억, 문명, 정체성)를 결합해 도덕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경쟁으로 이어진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보유 자체가 패권의 상징이었고, “문명화 사명” 같은 정체성이 정당화의 근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냉전 이후 자유주의 질서가 강했던 시기에는 미국조차 패권을 “식민지 보유”가 아니라 “규칙·제도·보편가치”로 재정의했다. 같은 서구 내부에서도, ‘패권을 증명하는 방식’은 시대와 규범에 따라 달라져 왔다.

여기서 중요한 가능성이 하나 생긴다. 오늘날처럼 서구적 맥락을 공유하지 않는 국가와 집단이 늘어나고, 각자의 문명적 경로의존성이 전면으로 올라오는 상황에서, ‘패권’과 ‘안보’와 ‘국익’에 대한 정의는 더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역설적으로 국제정치를 19세기식 ‘모두가 같은 트로피를 향해 달려드는’ 경쟁으로 되돌리지 않을 수도 있다. 행위자들이 서로 다른 핵심이익과 상징을 갖고 있다면, 충돌이 커지는 만큼 양보의 여지도 커진다.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남에게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는 환경에서는 오히려 거래와 타협의 공간이 생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모두가 같은 시험지를 보고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는 학교에서는 경쟁이 훨씬 살벌해진다. 1등을 놓치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준이 제각각인 환경에서는 경쟁이 ‘단일 순위 싸움’이 아니라, 각자가 다른 장점과 서사를 들고 나오는 방식으로 분산된다. 지금의 세계는 후자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자유주의 질서의 균열이 불러오는 것은 약육강식의 단순 복원이 아니라, 정당성의 문법이 다원화되는 세계, 그리고 그 문법을 둘러싼 새로운 형태의 경쟁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서 그린란드 문제는 단지 북극 자원이나 항로의 이야기가 아니다. “힘”이 다시 단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힘이 정체성과 서사와 결합하는 국면의 징후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직관적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습관”을 버리고, 서로 다른 행위자들이 어떤 맥락과 이야기로 자신을 정당화하는지 읽어내는 렌즈의 다각화다.

글쓴이

정대성 중국 북경대 대학원 석사과정

정대성은 재미교포 출신으로 UC버클리 정치학과(학부), 중국에서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 석사과정에 국가장학생으로 수석 입학한 후 졸업했다. 이후 도쿄대학 법학정치학연구과 동양문화연구소 소속 연구생으로 있다가, 현재는 미 시카고대학 역사학과(동아시아 외교사)에서 공부하며 외교사와 국제정치, 비교정치를 넘나드는 연구자가 되려 하고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