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의 중국, 한국을 어떻게 품으려 하는가
[정대성의 미중관계 리포터] 모순처럼 보이는 중국 외교화법 ‘책임대국’은 주변국 압박 의도? 영토확장 아닌 관계 재설정 개념 ‘선한 질서’ 추구한다는 뜻은 아냐 ‘中의 관계 재설정’ 개념부터 파악을
‘주권평등’이라면서 ‘국가간 위계’를 말하는 중국
한중 정상회담은 표면상으로는 양국관계 복원을 내세우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국제정세를 둘러싸고 냉정한 말들이 오간 회담이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세 척 두께의 얼음은 하루의 한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역사의 올바른 편에 굳건히 서서 정확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을 두고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한중 우호와 복원을 가장한 ‘미국 중심 질서에서의 이탈 압박’으로 해석했다. 중국이 우호적인 외교 수사와 함께 관계 회복 의도를 내세우지만, 본질적으로는 자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이중적 태도’를 지적하는 해석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중국을 둘러싼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단어는 ‘위선’이다. 중국은 한편으로 ‘주권평등’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위계’를 암시하는 언어를 구사한다. 이 때문에 서구의 시각에서는 중국이 “규칙을 존중하는 듯 보이면서 규칙을 바꾸려는” 행위자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중국의 언어를 단순히 ‘모순’으로 환원해 버림으로써 정작 중요한 질문을 비켜갈 위험이 있다. 문제는, 중국의 진정성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중국을 해석하는 개념의 문법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현 민족국가 체제의 핵심 원리인 주권과 영토 보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내정불간섭’을 강조해왔다. 동시에 그는 ‘인류 운명 공동체’, ‘책임대국’ 등 유교적 함의를 지닌 어휘를 반복적으로 동원한다. 주권평등의 언어와 관계적 위계를 연상시키는 어휘가 동일한 담론 공간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서방이 이를 위선으로 읽는 이유는 분명하다. 중국이 과거 조공체제의 위계적 질서를 복원하려 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주권평등이라는 규범의 언어로 그 의도를 포장한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의심은 추측에만 기대지 않는다. 실제로 중국 외교 담론에는 대국과 소국의 차이를 전제하는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예컨대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는 강대국 간 갈등을 피하고 상호존중과 협력을 추구한다는 ‘새로운 대국 관계 모델’을 표방한다. 또한 ‘책임대국(責任大國)’이라는 표현은 군사·경제 등 막강한 역량을 갖춘 대국이 그 힘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과 역할을 져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언어 구조 자체가 대국과 소국의 구분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은 제기된다. 중국은 정말 동일한 규범 문법을 공유하면서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중국은 애초에 서로 다른 두 층위의 문법을 동시에 운용하고 있는가. 이 때문에 서구의 단일 문법이 이를 ‘모순’으로 읽어내는 것인가. 나는 이 과정에서 중국 외교학자 친야칭(秦亚青)의 “관계 이론(Qin, Yaqing. 2018. A Relational Theory of World Polit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이라는 책을 통해 중국 특유의 국제관계 관점에 대한 탐구로 연결시켰다.
서구 국제정치학도 관계를 말한다?
여기서 흔히 제기되는 반론이 있다. 서구 국제정치학도 제도주의·구성주의·상호의존·네트워크·규범 확산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계’를 분석해 왔다는 주장이다. 이 점은 사실이다.
문제는 서구 이론이 관계를 다루느냐가 아니라, 관계를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있다. 현 국제정치학은 대체로 “먼저 독립된 국가(행위자)가 존재하고, 그 후에 국가 간 관계가 형성된다”는 출발점에서 시작한다. 관계는 행위자의 외부 환경이거나 선택을 조정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한다.
반면 중국식 관계론은 보다 급진적인 방향을 취한다. 국가가 먼저이고 관계가 나중인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국가의 정체성과 역할이 형성되고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즉 관계는 부속물이 아니라 행위자를 규정하는 기저 구조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주권을 말하면서도 역할과 위계를 말하는 중국의 외교 언어는 계속 ‘모순’으로만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내가 이 글에서 말하려는 핵심 주장은 “중국은 위선이 아니다”라는 도덕적 변론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은 주권의 언어를 유지하면서도 관계의 위계와 역할을 강조하는 이중의 문법을 구사하며, 그 이중성은 중국의 국제관계 인식 아래에서는 반드시 모순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주권은 국제법적·제도적 차원의 언어다. 독립성, 영토 보전, 내정불간섭 등 국가 자격의 최소 규범을 의미한다. 반면 대국/소국, 책임, 역할은 주권이 전제된 이후 국가들이 서로를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고 조정할 것인지, 즉 관계의 운영 원리를 규정하는 언어다.
서구 국가들이 만들어낸 국제 질서를 살아가는 우리는 주권의 평등을 말하는 순간 곧바로 위계의 언어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식 문법에서는 주권이 국가 자격의 규범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그 위에서 역할과 책임의 차등이 ‘관계의 질서’로 제시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주권을 말하면서 동시에 위계를 말하는 언어가, 중국 내부에서는 곧바로 ‘자기모순’으로 판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생긴다. (물론 이것이 곧 정당성을 보장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중국에게 있어서 왜 그 언어가 성립한다고 느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대국은 “관계를 정의하는 능력”
이 지점에서 ‘대국(大國)’을 단순히 물질력의 동의어로 이해하면 논지가 흐려진다. 대국은 단지 강한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설명할 언어를 갖추고, 도덕적 명분을 제시하며, 관계를 정의하고 조정할 능력을 가진 국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대국은 군사력이나 경제 규모뿐 아니라, 그 힘을 정당화하고 의미화하는 능력(관계의 규칙을 설계하는 능력) 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주권체제는 국가들에게 형식적인 동등함을 부여한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그렇듯,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국가들의 역량과 실질적인 위계는 동일하지 않다. 이는 도덕 이전에 정치적 현실이다.
중국의 ‘책임대국’ 담론은 바로 이 현실을 ‘책임’이라는 규범어로 포장하여, 대국이 관계를 관리할 의무와 자격을 가진다는 논리로 자기 역할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문제의식은 중국 학계의 ‘관계’ 중심 관점을 통해 더 선명해진다.
앞에서 언급한 중국 외교학자 친야칭은 이를 ‘체스’와 ‘바둑’의 비유로 쉽게 설명한다. 서양 체스에서는 각 말이 처음부터 고유한 역할과 위계(킹, 퀸, 비숍 등)를 부여받는다. 즉 서양 체스에서는 각 말들의 동등함은 배제되며, 역할과 위계만이 존재한다. 반면 바둑에서는 모든 돌이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다른 돌들과의 배치와 연결 속에서만 가치와 역할이 결정된다(동등함과 역할의 차이가 병존한다는 것이다). 체스가 속성(정체성) 중심의 세계라면, 바둑은 관계(배치) 중심의 세계다. 국제정치가 중국식 관계론에서 바둑판처럼 이해될 수 있다는 함의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 관점이 함의하는 바는 크다. 관계가 전제되는 순간 갈등은 반드시 불구대천의 총력전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쉽게 말하자면 예를 들어 부모와 아들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사랑하는 한 가족 공동체의 기능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관계 속의 충돌은 종종 부분적 이해관계의 조정으로 관리될 가능성이 커진다. 또한 관계 밖에서 완전히 독립된 자아와 이익을 상정하기 어렵다면, ‘순수한 자기이익’ 역시 성립하기 힘들다. 이익은 타자의 이익과 연결되어 있고, 결국 공동 이익(co-interest)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친야칭이 냉전기의 상호확증파괴(MAD)를 예로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치 냉전과 쿠바 위기가 보여주었듯, 가장 극단적인 적대 관계에서도 양측이 생존 이익을 공유하는 순간 관계는 제로섬의 단순한 도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관계적 권력는 “규칙과 의미를 정하는 힘”
권력의 개념 또한 달라진다. 관계론은 권력을 단지 상대를 굴복시키는 힘(power over)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은 관계의 규칙과 의미를 설계하고, 선택의 구조를 형성하며, 어떤 행동이 ‘책임’이고 어떤 행동이 ‘배신’인지를 규정하는 능력(power to)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식 이중 문법은 다시 한 번 설명력을 얻는다. 주권은 국가 자격의 기저 규범으로 남겨두되, 그 위에서 관계의 운영 원리를 재정의하려는 시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친야칭의 ‘친족의 딜레마(Kinsperson’s Dilemma)’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장치다. 죄수의 딜레마가 협력과 배신의 계산 문제라면, ‘친족의 딜레마’는 동일하게 중요한 두 관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어떤 원리에 따라 선택하는가라는 문제다.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물에 빠졌고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는가’라는 고전적 질문은 관계의 우선순위를 묻는다.
친야칭은 고전적인 중국의 질문을 인용한다: 당신의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물에 빠졌고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는가? 중국 왕조들은 유교적 원칙에 따라 관계를 정의하고 위계화했다. 이 맥락에서, 누군가는 이 유교 원칙을 사용하여 당연히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모자 관계는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며 혈연으로 묶여 있고, 아내의 경우 그녀의 아들이 그녀를 구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중국 외교학자는 이 딜레마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싱가포르의 경우처럼,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국가들이 더 빈번하게 직면하는 실제적인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 딜레마에서,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A는 양측 모두와 협력하고 싶어하지만, 한쪽과의 협력은 필연적으로 다른 쪽에 대한 배신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 관계를 정의하는 담론적 패권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면 이 친족의 딜레마는 훨씬 더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확장’과 ‘패권’ 재정의...영토가 아니라 관계 설계
이처럼 체제 인식이 다르면 확장의 모습도 달라진다. 서구에서 확장은 대체로 영토·군사·제도를 통해 외부로 힘을 투사하며 영향력을 발산하거나 정복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관계론의 관점에서 중국의 확장은 반드시 영토 점령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고대 중국의 천하체계처럼 무자비한 외부 확장보다는, 조공체제처럼 관계를 설계하고, 그 관계가 이탈하기 어려운 형태로 고착되도록 만드는 것이 확장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서구식 확장이 ‘바깥으로 나가는 운동’이라면, 중국식 확장은 때로 외부성을 줄이며 관계의 내부화를 추구하는 ‘내부를 향한 확장’으로 상상될 수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둘러싼 논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서구에서는 이를 신제국주의적 영향권 확장으로 규정하곤 한다. 물론 거대한 자본과 인프라가 동원되는 이상 권력정치의 고려를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관계론이 포착하는 핵심은 다른 지점에 있다. 항만·철도·통신망·디지털 플랫폼을 연결하여 상대가 중국이라는 중심 노드에서 분리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군사 주둔 없이도 네트워크에서 이탈하는 비용이 과도하게 커지도록 만드는 것, 중국이 일대일로를 야심차게 진행하는 것은 서구에서 이야기하는 영향권이나 물질적 경쟁을 위한 게임이라기보다 관계 재설계를 통한 주도권 게임을 설계하는 것에 가깝다.
다만 관계를 설계하는 힘이 언제나 온건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적 권력은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선택을 강요하는 권력이기도 하다. 중견국이 겪는 줄타기 압박이 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관계 기반 질서가 곧 ‘선한 질서’라는 결론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어떻게 설계되며, 그 설계의 비용이 누구에게 전가되고, 누가 주변부로 밀려나는가이다.
중국을 바라볼 땐 개념 정리가 먼저다
결국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뀐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는가 아닌가를 단정하기 전에, 중국이 말하는 질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국제정치의 구조를 바꾸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주권평등을 말하면서 위계를 말하는 언어가 곧바로 모순이 되는 것은, 두 언어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때 발생하는 해석의 결과일 수 있다. 중국식 이중 문법에서는 주권이 기저 규범으로 남아 있고, 역할과 책임은 그 위에서 관계를 운영하는 원리로 제시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것은 도덕적 성급함이 아니라 개념적 정리다. 중국의 확장은 누구를 관계 안으로 끌어들이고, 누구를 주변부로 밀어내는가. 그 네트워크는 실제로 공동 이익을 창출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종속 구조를 고착시키는가. 중국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는 국제정치를 여전히 ‘영토와 군대’ 중심의 게임으로만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관계와 연결망의 설계’라는 새로운 차원을 분석의 중심에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중국 논쟁은 어쩌면 21세기 권력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를 둘러싼 더 큰 논쟁의 한 축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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