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는 어떻게 대한민국 꽃이 됐을까
[조민제의 식물 이름 이야기] 최치원의 글에 등장하는 무궁화 ‘신라=무궁화의 나라’ 나라꽃 공식화 ‘오늘 피었다 지고 내일 다시 피는’ 꽃 윤봉길 “왜놈에 맞서 무궁화 삼천리”
국화(國花, 나라꽃)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꽃을 말한다. 무궁화를 대한민국의 나라꽃으로 정한 명시적 법률은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국기법」은 국기의 깃봉을 무궁화 꽃봉오리 모양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나라문장 규정」은 나라문장의 태극 바깥부분 문양을 무궁화로 하고 있다.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은 국가기관 등으로 하여금 무궁화에 관한 보급과 관리에 관한 의무를 부과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또한 행정안전부가 발간한 『정부의전편람』(2024)에 따르면, ①나라문장, 국기깃봉과 대통령표장의 문양, ②국회기, 법원기 등의 깃발의 문양, ③훈장 및 상장 등의 문양, ④의원(국회와 지방의회)의 배지, 군인·경찰의 계급장과 모자 등의 문양과 ⑤국경일의 행사장의 장식 등에 무궁화를 이용하고 있어 나라꽃의 실질적 기능을 하고 있다.
무궁화는 어떻게 나라꽃으로 인식되고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을까? 기원을 찾아 역사를 올라가면 아래의 기록이 있다.
최치원의 ‘근화향’
기록1
“당시 발해국은 스스로 나라가 크고 군사가 강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당에 들어가 조헌할 적에는 그들의 사신이 신라 사신의 아래에 자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하정사인 왕자 대봉예가 서장을 올려 발해가 신라 위에 거하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의 황제는 조서를 내려, 마땅히 전례에 따라 그대로 선시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이에 당번 숙위원이 왕(신라왕)에게 그 실정을 아뢰니, 왕이 이로 인하여 사신을 보내고, 또 표를 붙여 사례하기를, “...(중략)...지난날 폐하께서 영특하신 도량으로 독단하고 신필을 날리지 않았다면 근화향(槿花鄕: 무궁화의 나라, 즉 신라)의 염치와 겸양이 저절로 없어지고, 호시국(楛矢國: 호시를 생산하는 나라, 즉 발해)의 해독과 고통이 더욱 성하여졌을 것입니다.” - 안정복, 『동사강목』(1756년) 정사년 효공왕 원년(897년)의 기록에서.
기록2
①《산해경》에 이르기를, “해동에 군자국이 있어,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다. 근화초(槿花草)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하고, 또 ② 《고금기》에 이르기를, “군자국은 사방 천 리에 무궁화(木槿花)가 많다”하였다. ③당 현종은 신라를 일러 군자국이라 칭하였고, 또 ④고려 때 표사에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이라 일컬었던 것은 대체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이수광, 『지봉유설』(1614년) 제국부 중 本國(본국) 부분에서.
「사불허북국거상표」의 근화향에 대해
기록1은 18세기 중엽에 저술된 『동사강목』에서 기록된 것이다. 최치원은 897년에 당에 보내는 표문을 초안했는데, 그 제목이「사불허북국거상표」이다. ‘북국(발해)의 사신이 높은 자리를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감사하는 표문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은 고려 말기에 편찬된 『동인지문』(1338년)과 조선 성종의 명에 따라 편찬된 『동문선』(1478년)에서 「사불허북국거상표」의 전문이 수록되었고 『동사강목』의 기재 내용과 일치하는 점에서 확인된다.
897년 즈음에 신라는 잦은 민란과 호족의 반란 등으로 인해 국력이 쇠하고 급격히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때에 당에 파견된 사신의 자리를 두고 발해와 다툼이 생겼다. 당시 사신이 앉는 자리의 위치는 당과 관계의 긴밀성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전의 역사를 고려할 때 당이 발해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거나 침략을 용인할 수 있음을 뜻했다. 그러한 일을 막고자 최치원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초안했다. 그는 여기서 신라를 무궁화의 나라라는 뜻인 ‘근화향’(槿花鄕)이라 했다.
‘근화향’은 신라의 별칭으로서 국호(나라이름)였다. 공식적 외교문서에 사용되었으므로 대외적으로 천명되었던 것이다. 현대에서 나라꽃은 주로 문양화하여 사용되지만, 당시에는 별칭으로 사용되는 나라이름에 삽입되어 국가를 표상했다.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사용된 최초의 일이었다. 1,100여 년 전에 나라꽃이 사용된 것으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이다.
『지봉유설』의 근화향에 대해
기록2는 임진왜란 때 명에 파견되어 사신으로서 역할을 했던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이 저술한 『지봉유설』 권2 제국부 중 우리나라에 관한 본국(本國) 부분에서, 왜 나라이름 중에 근화향이 있는지를 문헌적 자료에 근거해 해설한 것이다.
그 중 ①은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산해경』 해외동경 편의 ‘군자국’을 축약하여 기술한 것이다. 『산해경』의 원문에는 근화초가 아니라 ‘薰華草’(훈화초)였다. 훈화초가 어떤 식물인지 논란이 있었는데, 위진남북조시대의 학자 곽박(郭璞, 176~324)은 『산해경주』라는 책에서 ‘薰’(훈)을 ‘菫’(근)으로 해석했고, 발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槿’(근) 즉, 무궁화라는 이해가 보편화됐다. 이수광은 이에 근거해 훈화초를 槿花草(근화초)로 기술한 것이었다.
②의 『고금기』는 『산해경주』를 집필한 곽박이 『산해경』과 비슷한 내용으로 저술한 『현중기』(玄中記)를 의미한다. 아마도 조선에 전래될 때 제목을 달리하여 유통이 된 것으로 보인다. ‘군자국 지방천리에 무궁화가 많다’는 내용으로, 『산해경』의 군자국을 보완해 설명한 것이다. ③은 당 현종이 신라를 군자국이라고 칭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1145년)의 「신라본기」와 『구당서』(945년)의 「신라전」에 기록이 있다.
④는 위 ①, ②과 ③을 이유로 하여 신라를 근화향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즉, 해외동경의 군자국에는 무궁화가 있고, 또 군자국의 지방천리에 무궁화가 많으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신라를 군자국으로 칭했기 때문에(주-④에서 이수광은 하나의 오류를 범했는데, 신라를 고려라고 잘못 표기한 점이 그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스스로를 근화향이 칭한 표문은 발견되지 않고, 그 표문이 897년에 최치원에 의해 초안된「사불허북국거상표」라는 점이 여러 문헌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명확히 확인된다.) 신라의 최치원이 표문에서 신라를 무궁화의 나라로 했다는 의미이다. 근화향은 신라의 나라이름이고 신라는 곧 군자국이었므로 결국 근화향은 군자국의 다른 표현이 된다.
군자국과 무궁화의 나라
최치원이 『산해경』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지은 「양위표」 등에 『산해경』의 내용을 인용한 바 있고, 그가 초안한 낭혜화상탑비 등에서 신라를 군자국(군자지국)이라 일컬었던 것에서 확인된다. 최치원이 근화향을 군자국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근화향을 ‘염양(廉讓: 겸손과 양보)이 있는 나라’라고 표현했고 『산해경』의 군자국도 ‘호양부쟁(互讓不爭: 서로 양보하고 다투지 않음)하는 곳’이므로 서로 뜻이 통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이수광의 『지봉유설』의 내용은 실제 최치원이 신라를 근화향이라 불렀던 이유를 제대로 된 근거에 따라 추론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주- 한편 일부에서는『산해경』의 군자국에 관한 내용을 근거로 무궁화가 춘추시대 무렵부터 한반도에서 존재했다는 소위 ‘무궁화의 한반도 원산지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라를 군자국으로 이해했을 뿐 신라 이전에 별도로 군자국이 있었다고 보지 않았고, 세계지도가 조선에 소개되었을 때 중앙에 실제 지도를, 그 둘레에 『산해경』과 불교의 경전 등에 나오는 나라를 그렸던 18세기의 여러 천하도에서도 군자국을 한반도에 실존했던 국가로 보지 않았다.)

결국 무궁화의 나라인 근화향(槿花鄕)이 어떤 나라를 의미하는지를 알려면 『산해경』에서 그린 군자국을 모습을 살펴보면 된다. 『지봉유설』에 반영된 『산해경』의 군자국은 ▲의관을 갖추고(예의를 존중함), ▲칼을 차며(무력을 갖춤),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나라(상대방을 존중함)이었다.
선조들은 예의와 상대방의 존중의식이 투철했지만,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이 도륙되는 일이 발생하였을 때 무력의 부족을 실감하게 되었으며, 근화향은 오늘 피었다가 졌지만 내일 또 다시 피어나는 무궁화의 꽃처럼 이상향으로서 다시 소환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조선이 근화향이기를 원했고 그래서 조선을 달리 무궁화가 들어간 근원(槿原 : 무궁화동산), 근구(槿邱: 무궁화의 땅), 근화방(槿花邦: 무궁화의 나라), 근역(槿域: 무궁화의 땅)이라 불렀다.
다시 무궁화의 나라
병자호란의 상처가 아물어 가던 18세기말 북학파가 등장하고 청나라와의 대외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했을 때 조선은 공식 외교문서에서 스스로를 무궁화의 나라라는 뜻으로 근역(槿域)과 근화지향(槿花之鄕)이라고 일컬었다.
무궁화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여러 서구 열강과 국교를 맺어감에 따라 국가를 표상하는 상징이미지가 필요했던 때에 문양으로 등장했다. 1892년 5냥 은정의 뒷면에 왕실을 뜻하는 오얏(李)와 더불어 무궁화(槿)가 함께 도안되어 조선을 상징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국가행사 안내장, 서구식 군복과 문관대례복, 훈장과 훈장증서 그리고 국가가 사용하는 공문서에 새겨진 문양에 무궁화가 사용되어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용하는 국가상징물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권이 상실되어 감에 따라 무궁화 문양의 사용 빈도는 점점 약해졌고, 급기야 1910년 강제병합이 이루어졌을 때 오얏꽃은 일제에 의해 왕실 문양으로 살아남았지만 태극기와 더불어 무궁화는 더 이상 나라를 상징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무궁화만 홀로 남아 민중들 사이에서 국권회복와 민족독립을 상징하게 되었다.

윤봉길의 무궁화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의거를 하면서 남긴 유서에서 “피 끌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에 왜놈이 와셔 왜걸대나...(중략)...피 끌는 청년 제군들이 준비하셰, 군복 입고 총 메이고 칼 들며 군악나팔에 발 맛추어 행진하셰”라고 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각인된 무궁화가 어떤 의미인지를 적확하게 보여준다.
긴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 이후 1,000여 년이 훨씬 넘는 긴 세월을 관통하여 무궁화는 민족의 꽃으로, 나라의 꽃으로 공식화하여 국가의 상징문양으로 되살아났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주위 열강들의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실은 언제나처럼 또 다시 무궁화를 소환하게 된다. 광복절이 다가오는 이 여름날에 곳곳에서 어제 피었다가 졌지만 오늘 무궁화가 다시 곱게 피어 만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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