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몰래 훔쳐간 ‘약방의 감초’ 이야기

[조민제의 식물 이름 이야기]

2026. 6.21. 감초의 꽃(내몽고)
2026. 6.21. 감초의 꽃(내몽고)
  • 단맛나는 뿌리, 감초 감초(Glycyrrhiza uralensis)는 뿌리에서 단맛이 난다는 데서 유래했으며, 백 가지 독을 없애고 다른 약을 중화시켜 ‘국로(國老)’라고도 불렸다.
  • 조선때 국산화, 일본이 훔쳐가기도 고려 시대까지 국내에서 나지 않아 귀하게 여겼으나, 조선 시대에 세종의 국산화 노력과 밤섬 식재 등을 거쳐 조선 후기 《동의보감》에 이르러 국내 조달이 가능한 약재로 완전히 정착했다.
  • 분류학상 식물명과 다른 약재명 현대 식물분류학상의 ‘감초’는 특정 종(G. uralensis)을 뜻하지만, 한의학의 약재명 ‘감초’는 유사한 약성을 가진 감초속 3종의 뿌리와 뿌리줄기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 칼럼의 핵심 요약본을 들어보세요

감초란?

감초(Glycyrrhiza uralensis)는 콩과 감초속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중국 북동부, 몽고와 러시아 등에 자생한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약용으로 재배된다. 뿌리와 땅속줄기는 굵고 튼튼하고 속은 연한 노란색이다. 줄기는 1m 정도까지 자란다.

잎은 어긋나기하고 깃꼴겹잎으로 작은잎은 7~17개 정도 달린다. 꽃은 7~8월에 자주색으로 피고 총상꽃차례를 이룬다. 열매는 협과로 편평한 선형이고 활처럼 굽으며 겉에 가시 같은 샘털이 있다.

감초속(Glycyrrhiza) 식물은 꽃차례의 모양, 작은잎의 개수와 열매의 모양 등으로 여러 종으로 나뉜다. 개감초(가시감초, G. pallidiflora)는 함경북도 경원 등에 자생하는 종이다. 더불어 국내에서는 재배되지 않지만 약용과 관련하여 양감초(민감초=광과감초, G. glabra)와 창과감초(G. inflata)도 알려져 있다.

감초라는 이름의 유래

감초라는 식물명은 중국에서 유래한 한자어 甘草(감초)가 어원이다. 약재로 사용하는 뿌리에서 ‘단맛이 난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조선 초기의 『구급방언해』(1466)와 조선 중기의 『언해두창집요』(1601) 등에 한글 표기가 나타나지만 모두 한자 감초를 발음대로 읽은 것이었다.

콩과 감초속의 G. uralensis라는 특정한 종에 대해 종래 통용되던 감초라는 명칭을 사정한 것은 최근에 일로서 『대한식물도감』(이창복, 1980)에 의한 것이었다. 식물분류학에 따른 감초속 식물에 대한 우리말 이름은 G. glabra라는 종을 ‘시베리아감초’로, G. uralensis라는 종을 ‘우랄감초’라 하고 두 종을 통칭하여 ‘감초’라고 한 『한국식물명감』(이춘녕·안학수, 1963)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중국과 북한은 우리처럼 식물명으로 G. uralensis를 감초(甘草)라 하지만, 일본은 G. glabra를 감초(カンゾウ, 甘草)라 하고 있다. 학명 중 속명 Glycyrrhiza는 옛 그리스어 glykys(달콤한, 단맛이 나는)과 rhiza(뿌리)의 합성어로 약재로 사용하는 ‘뿌리에서 단맛이 나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콩과 감초속 식물을 일컫는다.

속명의 뜻에서 옛날 유럽에서도 이 속 식물의 뿌리를 약재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종소명 uralensis는 라틴어로 ‘우랄 지역에 분포하는’이라는 뜻으로 주된 분포지의 지역 명칭에서 유래했다.

약방의 감초 그리고 민속

감초(甘草)는 뿌리와 땅속줄기에 해독 작용을 하는 글리시리진산(glycyrrhizic acid)을 함유하고 있다. 다른 약을 중화시키고 백 가지 독을 없애 주기 때문에 예부터 ‘나라의 어른’이라는 뜻으로 ‘국로(國老)’라고도 불렀다. 한방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약재였고, 이로 인해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감초에 대한 기록은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일본 문헌에서 신라 경덕왕 11년(752년)에 일본(왜)에 파견된 신라 사절이 감초를 포함하여 60여 종의 약재를 가져가 귀족에게 팔았다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는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 신라의 목간에서 약재 처방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감초 1냥을 처방한 것이 있다.

<주의> 이경화, 「조선전기 감초의 토산화와 그 의미」, 의사학 제24권 제2호(2015), 426쪽은 중국의 『태평광기』(978)에 기록된 고구려 정복에 참여한 당의 관리 곽정일(郭正一, ?~689)이 고구려 출신 여종 옥소(玉素)의 독살 시도를 흙물과 감초를 복용하여 해독했다는 고사를 최초로 보았다. 그러나 『태평광기』에 따르면 당의 수도이었던 장안(長安)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옥소에 대해서도 ‘投化高麗’(투하고려: 귀화고구려인)이라고 표현했으므로 감초의 복용은 당에서 일어난 일로 보인다.-필자주

고려시대에도 『고려사』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과 자료에서 감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230년대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에는 11회에 걸쳐 처방약으로 감초가 언급되었다. 그런데 음식으로 인한 중독에 관한 부분에서, 고려에는 감초가 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기록했다.

감초는 매우 중요한 약재이었음에도 국내 생산이 되지 않아 재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조선 초기 『태종실록』(1411.5.20.)에는 당시 개성의 관리이었던 이문화(李文和, 1358~1414)가 재배한 감초 화분 1개를 바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비록 화분이었지만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후 세종 때에 일본(왜)에서 여러 차례 감초를 진상했는데 세종 30년(1448)에는 전라·함길도 감사에게 왜인이 헌납한 감초를 심어 가꾸게 하였다. 문종 원년(1451년) 5월 1일에는 전라 광양에 식재 한 묘가 죽게 되자 담당 관리를 처벌하였고, 11월 3일에는 서울 밤섬에 감초를 심어 무성해지자 각도에 나누어 심도록 하였다.

결국 국내에서 생산되는 향약만을 수록한 『향약집성방』(1433)과 주요 지역의 토산물을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기록되지 않았던 감초는 재배에 성공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전라도, 함경도와 경상도 등 여러 지역이 생산지로 수록되었다.

17세기 초에 편찬된 『동의보감』(1613)의 탕액편에는 감초를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약재로 보았고 함경북도에서 자란 것이 가장 좋다고 기록했다.

식물명과 약재명의 차이와 전승

2014. 7. 19. 감초의 뿌리(경기도)
2014. 7. 19. 감초의 뿌리(경기도)

식물명 감초는 G. uralensis라는 식물의 종을 일컫는 이름이다. 그런데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약재명(생약명) ‘감초(甘草)’는 “이 약은 감초(G. uralensis), 광과감초(G. glabra), 창과감초(G. inflata)의 뿌리 및 뿌리줄기로서 그대로 또는 주피를 제거한 것이다.”라 정의된다(이에 대해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 고시 제2025-18호 대한민국약전 의약품각조 제2부 참조). 감초속 3종 식물의 뿌리와 뿌리줄기를 약재로 사용하고 그 이름이 ‘감초(甘草)’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식물명이 식물의 형태적, 생물적 또는 분자계통적 차이에 따라 최소 분류 단위로 종(species)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명칭인 반면, 약재명은 한의학(본초학)에서 병에 대한 치료 목적의 약재에 대한 명칭이어서 약성이 유사하면 같은 것으로 분류하고 식물 전체보다는 약성이 강한 부위(기관)가 중요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옛날의 전통적 본초학은 약재명에 식물분류학에 따른 학명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약재명에서 서로 달라 보이는 식물을 함께 언급하거나 식물의 기관별로 나누어 약재명을 붙이는 것에서 현대 본초학과 동일한 인식의 지평 위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예컨대, 중국 송대의 『중수정화경사증류비용본초』(증류본초, 1239)에는 ‘甘草’(감초)라는 표제하에 분주감초(汾州甘草)와 부주감초(府州甘草)라는 서로 다른 이름의 식물을 그림으로 소개했다. 『동의보감』(1613)의 탕액편에는 약재로 사용하는 뿌리를 ‘甘草’(감초), 잔뿌리를 ‘甘草梢’(감초초) 그리고 뿌리에서 형성되는 수지를 ‘甘草節’(감초절)이라는 이름을 별도로 부여하고 각각을 다른 종(種)으로 취급했다.

이처럼 옛 문헌(특히 본초학)을 살필 때는 식물에 관한 명칭이 곧 식물명이 아니라 약재명 또는 그에 가까운 내용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조선 초기부터 식재되기 시작하여 『동의보감』에서 완전히 국내에 정착된 약재로 기록된 감초가 현대의 식물분류학을 따를 때 구체적으로 어떤 종의 식물(들)이었는지는 그때의 식물체, 표본 또는 세밀화 등이 있거나 식물분류학에 요구되는 분류군의 고유특징이 제대로 기술되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판별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의 교류와 교통이 현재와 같지 않았고 자생하는 분포지가 한반도와 가장 가깝다는 점과 더불어 전승되어 현재에도 국내에 재배되고 있는 감초 종류가 무엇인지에 근거하여 보자면 현재 우리가 식물명으로 감초라고 일컫는 G. uralensis라는 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최근 발간된 『동의보감 탕액편에 나오는 식물들』(신현철, 2026)이라는 책은 본초학 서적인 『동의보감』 탕액편의 약재명을 식물명으로 혼돈하여 대체하고 제대로 된 근거가 없거나 민속 연구에 필요·충분한 정보도 없이 자의적으로 식물분류학적 종으로 동정하여 옛 문헌의 이해에 대한 혼선과 어려움을 낳고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유감스럽다.

일본의 감초 재배와 시사점

일본(왜)은 한때 우리보다 일찍 감초 재배에 성공하여 조선 세종 때에만 16차례에 걸쳐 진상한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전국시대(1467~1603)를 거치면서 국토는 황폐해졌고 감초의 재배지역은 사라졌다.

일본에서 편찬된 종합백과사전 성격의 『화한삼재도회』(1712)에는 일본에도 옛날에는 감초가 있었지만 18세기 초반에는 전혀 나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에도막부가 대마번에게 시켜 조선의 약재를 조사하고 몰래 가져간 과정에 관한 『약재질정기사』(1721~1726)에는 경북 영덕에서 자라는 감초를 화분에 넣어 오히려 일본에 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국민적 이해관계가 있거나 중요한 산업 분야에서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것에서 시사점이 있다.

여행길 그리고 감초

올해 6월 중순에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내몽고의 사막지대를 여행하는 호사를 누렸다. 들과 낮은 산지의 건조한 모래 땅 곳곳에 잡초처럼 자라 꽃을 피우고 있는 감초(G. uralensis)를 만나 그에 얽힌 민속을 떠올릴 기회가 되었다. 낯선 곳의 여행길에서 만나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이 칼럼을 영상으로 · 1:52 조선시대 일본이 몰래 훔쳐간 ‘약방의 감초’ 이야기!
글쓴이

조민제 변호사

조민제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29기로 수료한 후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야생 식물 탐사와 옛 식물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와 책으로 ‘한국 식물이름의 유래’가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