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명을 거역하는 조관빈, 쩔쩔매는 영조

[죄인 심문기록으로 본 조선후기] 왕의 명령 거역한 대제학 조관빈 “어긋난 왕의 명령, 국가 저버리는 행위” 저항하는 신하와 동조하는 하급관리들 전제권력자 영조, “짐이 곧 국가’ 실현못해

드라마에서 임금이 추국하는 장면.
드라마에서 임금이 추국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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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어머니 공적을 적으라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년)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년)는 원래 궁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무수리로 알려져 있다. 1694년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 후의 영조)을 낳고 숙의(淑儀)가 되었으며, 1695년에는 귀인(貴人)에 오르고, 1699년 정1품 숙빈(淑嬪)에 봉해졌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채 숙종 44년인 1718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숙빈 최씨의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선왕(先王)이나 왕후 등에 대한 추시(追諡: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내림), 세자나 대군의 왕으로의 추존(追尊: 어떤 인물이 죽은 뒤에 생전의 직위보다 높은 직위를 올려주는 것) 등은 흔한 일이지만, 후궁이었던 자신의 생모를 추숭(追崇: 왕이나 왕비가 되지 못하는 생부와 생모의 사적 지위를 사후에 왕과 왕후로 추존하여 공적 지위로 격상시켜 주는 국가전례)하고자 한 것은 광해군과 영조 뿐이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사당을 짓고 ‘숙빈묘(淑嬪廟)’라고 칭하였다. 영조 20년에는 어머니 사당을 육상묘(毓祥廟)로, 어머니 무덤을 소령묘(昭寧墓)로, 영조 29년에는 육상궁(毓祥宮)과 소령원(昭寧園)으로 각각 승격하였다. 그해에 사당과 무덤을 승격하면서 어머니에게 시호(諡號)를 올리면서, 어머니의 덕을 기리는 글(책문)을 대나무에 새기는 죽책문(竹冊文) 작성 명령을 대제학(大提學) 조관빈이 거역한 것이다.

대제학 조관빈의 초상. 출처= 구글 아츠&컬쳐 동영상 캡쳐
대제학 조관빈의 초상. 출처= 구글 아츠&컬쳐 동영상 캡쳐

거역하는 명분 “국가를 저버린다”

“... 나라의 크고 작은 책문(冊文)은 종통(宗統)을 이은 비빈(妃嬪)이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 조금이라도 열조(列朝)의 전례(典例)에 어긋나는 점이 있는데 다시 깊게 생각해 보지 않고 명을 받들어 죽책문을 지어 바친다면 이는 국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 어찌 감히 단지 임금님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영조 29년 7월 29일 조관빈이 예법에 어긋나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국가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상소문을 올리자, 영조는 화를 내면서 왕이 직접 추국을 주재하는 친국(親鞫)을 열라고 명령하였다. 의금부도사가 곧바로 조관빈을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자시(子時, 오후 11시~새벽 1시)에 궁궐 안에서 친국이 시작되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 먼저 궁궐을 병사들이 호위하였다. 왕은 북쪽에 자리하고, 전·현직 정승들은 동쪽 자리에, 의금부 당상관과 승지는 서쪽에, 대간(臺諫)은 남쪽에 자리하였다. 그 외 추국 과정을 기록하는 문사낭청(門事郎廳: 조선시대 죄인 취조에 참여한 임시 관직)들과 추국 과정을 집행하는 의금부 당하관들 여러 명도 쭉 늘어섰다.

조관빈은 이들 앞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고, 결국 유배형을 받았다. 영조는 조관빈을 함경도의 삼수부(三水府)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즉,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러한 추국의 기록을 보면, 추국장은 마치 전근대 국가의 전제적인 권력을 과시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문무 양반을 통틀어 가장 영예로운 관직이라 여겨졌던 대제학(현대의 교육부장관)이, 한밤중에 추국장에 끌려와서 심문 받았다. 그리고 불과 두 차례의 심문 끝에, 서울에서 머나먼 함경도 제일 끝자락에, 그것도 가시로 울타리 쳐진 곳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영조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영조는 과연 이 추국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을까? 우선, 실록 기사를 보면, 왕이 불같이 화를 내며 대제학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리는 과정에서 신하들은 영조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의금부 도사인 윤광렬(尹光烈), 신대손(申大孫)은 추국을 곧바로 거행하지도 않았고, 추국 과정을 기록하는 관리인 문사낭청 김광국(金光國)은 조관빈의 이름을 적으면서도 그 앞에 ‘죄인’이라는 두 자를 쓰지도 않았다. 결국, 영조가 이들 관료들도 모두 추국하겠다고 위협을 가하고 나서야 조관빈에 대한 추국이 진행되었다.

또한, 영조는 조관빈 사건을 다루면서 사대부 전체의 기강을 잡는 문제로 의제 전환하려 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조관빈이 신하의 분수가 조금도 없기 때문에 추국을 해야겠다고 말하지만, 2차 심문과정에서 영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또다시 진술하게 하는 것은 다만 내가 지극히 괴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조선 사대부의 기풍과 절개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이전처럼 잡아떼지 말고 숨김없이 바른대로 진술하라.”

왕의 명을 거역한 신하 한 명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다. 사대부 전체의 왕에 대한 태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문제로 영조는 재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조관빈은 이 문제가 사대부 전체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 답한다. 이에 대해 영조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별도로 사대부에 대한 경고를 이어 나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최종 형벌을 결정할 때, 조관빈이 사대부의 일원이라는 점은 결정적인 고려 요소였다. 높은 관직에 있던 사대부 집안의 아들이라는 점이 조관빈을 사형이 아니라 유배형으로 감형한 근거가 되었다.

전제권력자 임금을 조롱하는 신하

무엇보다 조관빈은 두 번의 심문 끝에 마치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듯한 진술을 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석고 못난 탓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으니, 저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저도 모르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고 지만(遲晩)했어야 합니다. 저는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고 스스로 지만합니다. 제가 사람됨이 어둡고 변변하지 못해서 글의 내용이 마구 섞여 자연히 제가 불만스러운 마음을 가진 것으로 되어 버리긴 했으나 지시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불만을 가졌겠습니까? 그러나 지만하지 않으면 매질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지만하는 것입니다. 이에 제가 불만을 가졌다고는 해도 남의 사주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조관빈은 마치 자신이 죄를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자신의 죄를 뒤늦게 인정한다는 의미의 ‘지만(遲晩)’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고 ‘지만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지만하지 않으면 ‘매질을 당할 것이기에 지만하는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한다.

조선시대 추국과정에서 ‘지만’이라는 죄인의 자백은 유죄를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오늘날의 재판에서는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일 경우, 자백의 증명력이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추국장에서는 죄인의 자백은 단순히 범죄사실에 대한 피고인의 진술을 의미하는 것에서 넘어서서, 죄를 승인하고 판결을 승복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조관빈은 본인의 죄를 자백하는 듯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진술 후 끝까지 죽책문 쓰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 결국, 영조는 조관빈이 아닌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죽책문을 쓰도록 했다.

신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영조가 자신의 생모를 위해 사당을 짓고, 무덤의 격을 높이고, 시호를 내리는 등의 노력에 대해서 역사학계에서는 주로 ‘의례’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해 왔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있다. 영조가 생모의 지위를 높임으로써 본인의 권위도 높이고자 하는, 즉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추승작업을 보는 경우다. 혹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영조가 추승작업을 추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생모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더 적극적으로 하고 싶었을 텐데, 왕권이 안정적으로 된 집권 후반기에야 비로소 그러한 노력을 구체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모두 영조가 생모를 위해 펼쳤던 의례적인 차원의 노력을 정치적인 수단이나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조관빈을 추국하는 추국장을 보면, 영조가 이를 통해서 왕권을 성공적으로 강화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이를 추진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예법에 어긋나는 것을 요구하는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곧 국가를 저버린다는 조관빈의 주장은 끝내 굽혀지지 않았다. 영조는 하급 관료들의 미시적인 저항에도 부딪혔다. 형식적으로는 좌의정을 통해서 죽책문을 완성하여 자신의 생모를 기리는 작업을 진행했을지라도, 이는 이미 대제학에 의해 거절된 것일 뿐인, 미완의 작업에 불과했다.

끝으로, 여기서 영조의 전제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중요한 기제로 조관빈이 국가 관념을 호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관빈은 자신이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유가 국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즉, 숙빈 최씨에게 죽책문을 올리는 것은 영조의 사적인 이익에 불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를 행할 경우 국가의 이익에 해가 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조관빈의 주장에는 왕의 이익으로 환원되지 않는 국가가 상정되고 있다.

글쓴이

이하경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하경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조선시대 반역자 심문 기록을 분석하여 전근대 국가의 특성을 조망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치사상 및 법제사 관련 교과목을 가르치고, 노무현재단 ‘민주주의 리더십 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및 전근대 국가론이 주된 관심 영역이며, 주요 연구로는 『역사화해 이정표』 (공저), 『조선후기 사법기구』 (공저), “조선후기 추국장의 정치적 의미”, “조선후기 범상부도죄의 정치적, 법제사적 의미”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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