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부름에 거역하다니, 추국하라
[죄인 심문기록으로 본 조선후기⑤] ‘윤구종 사건’에서 드러난 신하의 국가관 유성한 “사도세자 죽음 정당하다”고 주장 ‘광병’ 핑계 윤구종도 노론 입장서 동조해 사도세자 아들 정조, 증거조사후 추국 개시 채제공 “신하들, 국가 호위보다 당파 비호”
지난 ④편에서는 글이나 발언 상의 특정 문구가 왕을 모욕했다는, 범상부도(犯上不道) 죄목을 통해서 영조시대 왕과 신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왕명의 부름에도 제대로 응하지 않았던 정조시대 윤구종(尹九宗, 1740-1792) 사건을 살펴보자.
‘윤구종 사건’이 벌어지기 전
윤구종은 현직 대간(臺諫)의 한 명으로서 왕을 비롯하여 다른 공직자에 대해 감찰하고, 공직자가 본인의 직분을 넘어선 행위를 할 경우 이를 탄핵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조 16년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자를 다들 탄핵하는데 혼자 침묵할 뿐만 아니라, 왕명이 있음에도 광병(狂病)이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여기서 문제가 된 공직자는 바로 또 다른 대간 유성한(柳星漢, 1750-1794)이었다.
유성한은 정조 16년 4월 10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어 4월 18일에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표면적으로는 왕에게 “학문을 지속적으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간언(諫言)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경연에 참여하지 않고, 향락을 즐기고 있다며 비판하는 과정에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른바 ‘임오의리(壬午義理)’를 유성한이 두둔하고 있는 듯한 부분이 논란이 되었다. ‘임오의리’란 영조가 말한 사도세자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의리를 말한다.
정조 재위기간 내내 임오의리에 대해서 함구하도록 명령이 내려졌기에 모두들 조심하고 있었는데, 유성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하자, 조정에는 유성한을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빗발치게 되었다. 4월 20일 부로 사간원 정언이 된 윤구종만이 유성한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온 나라가 이처럼 한 목소리로 유성한의 죄를 성토하는 때에 이르러, 자신이 현직 대간이면서도 성토할 뜻이 없이 갑자기 광병이라 핑계를 대며 오로지 피할 길만을 일삼았습니다. 유성한의 탄핵이 처음 제기된 날에 동참하지 않았고, 또 이튿날 연명으로 탄핵할 때에도 왕의 부름을 어기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음흉한 의도와 유성한을 비호한 행적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떠들어 대며 전하고 있으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추국을 망설이는 정조대왕
이러한 요청에 정조는 왕명을 거역한 윤구종을 곧바로 처벌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정조는 윤구종에 관한 사안이 ‘풍문’이기 때문에 모두 믿을 수는 없다고 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도 관직에 계속 있던 윤구종이 갑자기 실성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윤구종을 추국장에 세우지 않고, 일단 조사부터 진행하도록 했다.
정조의 이와 같은 신중한 모습은 영조와 크게 대조적이다. 영조 48년 유언민(兪彦民 1709-1773)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을 때,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가 추국을 받은 일이 있다.
“나라는 오직 나라이고 임금은 오직 임금인데, 듣자니 대사헌에 제수되고는 시골에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법을 시원히 바로잡지 않아서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한 것이다. 내일 아침에 남문으로 나아가 신치운(申致雲)의 예에 따라 나라의 형률을 시원히 시행할 것이니, 해당 부로 하여금 붙잡아 와 문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영조는 유언민이 관직에 임명되고도 곧바로 그 명을 받들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이 법을 바로잡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화부터 냈다. 왕인 본인의 권위가 제대로 서지 않고, 신하가 함부로 자신의 부름을 거역하는 것이라며 그러한 신하를 벌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본인의 부름을 거역하는 행위를 실제로 반역모의를 하다가 붙잡혔던 반역자에 비견해서 벌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정조는 기본적으로 윤구종이 본인의 명에도 조정에 나오지 않았지만 윤구종이 말했던 ‘광병’ 핑계에 대해서 보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를 요구하고, 대신에게 물어보고 절차를 진행하라고 명하는 등 보다 신중하게 사건을 접근하고 있다.

“나는 신하의 절개가 없다”
이후 결국 윤구종을 추국하기로 하였지만, 정조는 논지를 전환하였다. 윤구종을 비판하던 자들이 윤구종의 충심을 의심하며 꺼냈던 일화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날 윤구종이 경종(영조의 이복형으로 숙종과 장희빈 사이의 아들)의 원비(元妃)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심씨의 무덤인 혜릉(惠陵)에서 예를 표하지 않았으며 ‘나는 신하의 절개가 없다(無臣節)’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왕비의 무덤에서 감히 신하가 예를 표하지 않고, 본인은 신하된 절개가 없다고 말한다는 점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신분제적 사회인 조선시대, 최고의 정치 권위자에 예를 표하는 것은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였다. 특히 경종 이후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 서로 지지하는 왕을 둘러싸고 신하 내에서 격하게 대립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특정 왕비에 예를 표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자신이 속한 정치적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는 사안이었다.
윤4월 12일부터 윤구종의 추국이 시작되었다. 윤구종은 1차 심문에서는 자신이 광병이 거짓이 아님을 밝히려 했다. 병이 언제부터 어떻게 발병한 것인지, 그리고 최근에 얼마나 힘들게 치료받았는지를 상세하게 말했다. 혜릉에 관련해서도 만약 자신이 정말 그런 말을 한 것이라면, 당시 능을 지키던 군사들이 들었을 테니 그들과 대질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장 25대를 맞은 후, 윤구종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때 자신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말에서 내려야 하는지를 되묻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그 모든 일이 평소에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윤구종은 형신(刑訊: 죄인을 형구로 고문하면서 신문해 자백을 받아내는 조사 방법. 주로 정강이 부분을 형장으로 때리면서 죄인을 신문하는 것)을 동반한 세 차례 심문을 받은 끝에 갑자기 물고(物故: 죄를 지은 사람이 죽음)되었다.
국가보다 자신의 당을 비호하는 신하들
윤구종이 추국을 받다 죽게 되면서 윤구종이 형신에 못이겨 자백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불충한 의도에서 혜릉에서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윤구종의 이 자백은 ‘노론들이 경종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선행연구에서 묘사되고 있다.
윤구종의 이런 불충한 태도는 신하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론 전체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이는 곧 정조 16년 윤4월 27일에 영남지역의 유생 1만 명이 상소문을 올린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사건으로 이어졌다. 영남만인소 사건이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요청하는 것이었지만, 그 직접적인 계기는 유성한의 상소문과 윤구종의 흉언이라는 의미다.
당시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윤구종이 죽고 나서 아래처럼 말한다.
“불행하게도 사대부들 사이에 문호가 갈라져 자기에게 이롭게 하기를 국가 호위하는 것보다 먼저하고 당파 비호하기를 임금 높이는 것보다 중히 여깁니다. 그리하여 경종(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에 있어서는 윤구종과 같은 극악한 역적이 감히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멋대로 하였고, 선세자(先世子: 사도세자)에 있어서는 유성한(柳星漢)과 같은 흉악한 역적이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식사를 폐지할 수 없다는 등의 말로 은근히 선세자를 핍박하였습니다.”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는 윤구종에 대해서 채제공은 국가보다 자신을 위하고, 자신의 당을 비호하는 행위라며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채제공의 말 속의 국가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정치행위자들도 정치가 개인의 이익이나 특정한 정치지배층의 이해관계보다, 국가이익이라고 하는 상위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이 흥미로운 지점은 정조가 추국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왕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직 고위 관료가 추국받다가 심지어 죽게 되는 사례는 분명 왕의 전제적인 권력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윤구종에 대한 추국과정을 보면, 정조는 윤구종을 추국청에 세우는 것부터, 윤구종이 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 신중한 태도가 두드러진다. 정조가 자의적으로 혹은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본인의 명령을 거역했기에 윤구종을 벌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대신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대신들과 논의를 통해서 해결방안을 모색하면서 추국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윤구종의 잘못이 드러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조 대왕은 섣부른 판단에 앞서 격노하지 않았고,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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