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관료는 ‘조선’을 어떻게 봤을까
[죄인 심문기록으로 본 조선후기] ‘만동묘’ 설립을 제안한 송시열 “망한 명나라 황제에 제사” 논란 “노론에 복수해야” 시대 논리까지 겹쳐 제후국 조선, 明황제 예법 만들 수 있나
과연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외적인 질서 속에서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주요 관료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조선 후기 정조 즉위년의 이명휘(李明徽, 1711-1776) 사건이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봐야하느냐고.
송시열을 탄핵하는 유생
강원도에 거주하는 유생(儒生) 이명휘는 정조 즉위년인 1776년 4월 18일에 상소문을 올렸다.
“대체 어찌하여 우리나라는 예의를 지키는 땅인데, 이에 일개 배신(陪臣)의 주장으로 천자의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냅니까. (...) 분수로서 감히 제사 지낼 수 없는데 제사 지내고, 예법으로서 감히 의논할 수 없는데 의논한 것입니다. 밖으로는 천자가 높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안으로는 임금과 신하의 분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주장에 따라 조선에서 명나라의 두 황제를 위한 사당을 짓고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비판하는 상소였다.
송시열은 노론의 대표주자이며 성리학의 대가이자, 송자(宋子)라고 불리는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30년 전인 1644년에 멸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계속해서 지켜야 하고, 중원에 새롭게 자리잡은 청나라에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을 주장한 자다. 송시열이 죽고 나서, 숙종 30년(1704년)에 조정은 송시열의 뜻을 기리면서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를 파견했던 명나라의 신종(神宗, 재위 1573-1620)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재위 1627-1644)에 대한 제사를 그동안 지내왔었는데, 이명휘가 이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제후국은 명 황제의 예법 만들 수 없다?
이명휘의 논리에 의하면, 제후국에 불과한 조선은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황제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天子)만이 가능한 것이기에, 제후국인 조선은 감히 제사를 지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자고 주장한 자가 ‘일개 배신(陪臣)’인 송시열이었다는 점도 문제적이다. 이 ‘배신’이라는 용어는 송시열을 천하인 명나라의 신하이면서, 제후국인 조선의 신하라는 의미다. 이명휘가 보기에 일개 신하인 송시열이 명나라 황제를 기리자고 한 주장은, 대외적으로도, 대내적으로도 분수와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명휘는 만동묘를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된 과정 자체도 그 의미를 부정하였다.
“세상을 떠난 상신(相臣) 송시열이 효종대왕(孝宗大王, 재위 1649-1659)의 세상에 없는 예우를 받으며, 오랑캐를 토벌하고 명나라를 회복하는 공로를 자임했지만, 마침내 이루어진 일이 없어서 죽어도 여한이 있게 되자, 죽을 때가 되어 자기 제자들에게 글로 부탁하여 황제의 묘를 세워 만력(萬歷, 명나라 신종)과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 두 천자를 제사 지내도록 했습니다.”
송시열이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고자 했던 것은, 조선인으로서 명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전에 호언장담한 내용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행한 조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송시열이 자신이 청나라를 북벌하겠다고 장담해 놓고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기에 이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쯤으로 이명휘는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명휘는 송시열을 상신(相臣)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송시열은 정조대에 선대(先代)의 현인(賢人)이라는 ‘선정’(先正)으로 칭해졌는데, 이명휘는 ‘선정’과 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 일부러 ‘상신’이라고 표현하였다. 추국 과정에서 정조는 “왜 선정이라 칭하지 않느냐”며 이명휘에게 따져 묻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이명휘가 송시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이명휘의 상소문은 조정에서 어떻게 논의되었을까? 송시열을 비판하는 것은 효종(孝宗)을 무함하는 것이고, 이는 곧 천자를 무함하는 것, 즉 범상부도(犯上不道)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명휘는 추국을 받는다. 정조는 궁궐에서 진행된 추국의 장소까지나와 어떻게 그러한 논리를 편 것인지를 이명휘에게 조목조목 따졌다.
송시열의 주장이 정말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면, 숙종이 이를 모르고 했겠는가 라는 질문부터, 왜 선정이라는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을 상신이라고 칭했는지 하나하나 따져서 물었다.
그런데 이명휘는 이러한 압박 심문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본인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오히려 우리가 잘못된 예법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고 하거나, 중요한 대의라 하더라도 지나친 곳(예법에 어긋나는 곳)은 반드시 제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반박 논리 만드는데 골몰한 조선 유생들
이명휘에 대해 유생 심유진(沈有鎭)은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 중국의 예악과 의절(儀節)이 모두 오랑캐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니 이명휘의 생각은 과연 오늘날의 예악이 어디에서 나와야 참람(僭濫: 분수에 넘쳐 너무 지나침)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의는 현자에게서 나오는 법이니, 현명한 선정(先正, 송시열)이 명나라가 멸망한 것을 생각하여 이렇게 예문(禮文)에는 없으나 그 뜻을 미루어 시행하게 되었으니, 천리와 인정으로 볼 때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참람함에 대해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심유진은 변화된 국제질서 하에서 더이상 청나라의 천자에게서만 예악과 의문이 나온다고 말할 수 없고, 현자(賢者)인 송시열도 예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유생 홍이유(洪履猷) 등도 결국 예법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지위(천자의 지위)에서만이 아니라, 덕(德)에서 찾아야 한다며 이명휘를 비판했다.
“.. (이러한 일들은) 지위와 덕을 갖춘 자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그런 지위를 얻고 그런 도를 행한 사람은 주공(周公) 한 분뿐이었습니다. 그 밖의 수 많은 성현들은 모두 그런 지위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도를 만들어 천하에 시행하지는 못하였지만, 사적으로 강구해 보고 자신이 실행하는 것은 국가에서 금지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성현들도 이미 사적인 차원에서 예의를 행한 바 있는데, 이는 국가에서 금하지 않았었다는 점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명휘는 추국을 받은 후 섬으로 유배되어 가는 길에 죽고 만다.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이명휘 사건이 정조 즉위년에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사건을 정조 즉위와 더불어 노론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즉,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세력’을 탄압하고자 이명휘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을 겨냥한 상소문을 썼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명휘도 추국에서 첫 진술에서 “근래에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가 있는데, 저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관료, 중원의 변화만 바라봤을까
그런데 노론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희생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이명휘의 논리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정조는 이명휘가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 그 관례가 예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해버리면, 이를 승인해준 숙종까지 욕보이는 것이므로 선왕에 대한 불충(不忠)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느 학자의 주장처럼 개인적으로 송시열에 대한 동경심을 정조가 지녔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필자는 이명휘의 상소문이 특정 정파를 몰아내기 위한 정략적인 수단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보다 근본적으로 조선이라는 국가의 대외적인 위상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한 것으로 보고 싶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자면 이미 멸망한 지 130년이 지난 명나라에 대해 아직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명휘는 이제 그런 관례를 그만두고, 이미 변해버린 국제질서를 직시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놀라울 것이다. 이명휘가 보기에 만동묘를 짓고 70년 동안 계속해 오던 관례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제후국에 불과한 조선이 감히 행할 수 없는 예식이라는 말이다. 결국 이명휘 주장대로라면, 조선은 제후국으로서의 한계를 명확히 지니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명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의도,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만족스러운 반론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에게 조선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상에게 마음대로 제사조차 지낼 수 없는 존재는 아니다.
예법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명나라가 망해버리고, 그동안 멸시의 대상이었던 오랑캐 국가가 중원을 차지한 국제변화 속에서, 이제 이들은 조선의 위상을 새롭게 보려고 한다. 제후국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더 이상 그 지위에 구속되지 않고 덕이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조선의 역할을 재규정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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