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형 각오하고 왕 앞에 서고자 했던 백성
[죄인 심문기록으로 본 조선후기⑦] ‘반역사건 무고는 참형에 처한다’는 엄벌 방침에도 거짓 ‘반역사건’ 고한 사건 알고보니 지방행정 비리 목숨걸고 고발 백성은 왜 국가권력에 읍소했을까
지방은 중앙권력을 어떻게 대했을까
지난 6편까지 조선 후기 심문기록을 통해서, 주로 조선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생각하는 국가, 왕과 신하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국가, 나아가 대외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이제 시야를 지방사회로 넓혀보자.
통신수단이나 교통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던 조선시대, 과연 중앙에서 응축된 정치적 권력은 지방으로까지 효과적으로 뻗어나갔을까? 혹은 지방에서는 과연 중앙의 국가권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앞으로 이 질문들을 고민하기 위해서 몇몇 추국 사건을 살펴볼 것인데, 그 첫 번째로 ‘거짓으로 반역을 고발하는 무고(誣告)사건’을 보자.
조선시대에 거짓으로 누군가를 고발하는 행위인 ‘무고’에 대한 경계심은 왕조실록과 같은 연대기 자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조선 사람의 습속 자체에서 무고를 빈번하게 하는 특징을 아래처럼 말하기도 한다.
“고자질을 하는 풍속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해하려고 무명장(無名狀)을 거는 사람이 있고, 분풀이하고자 신문고(申聞鼓)를 치는 사람도 있으며, 수령을 참소하는 사람 또한 많아서 벌떼처럼 일어납니다.”(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4월 8일)
분명, 거짓으로 반역죄를 고발해서 누군가를 국가로부터 벌을 받게 하려는 것은, 개인이 국가권력을 사적으로 악용하는 것이며, 사법질서 체계에 혼란을 가져오는 중대한 위법행위이다. 더구나 정치체제 근간을 흔들지 모를 ‘반역’ 행위를 거짓으로 고발하는 것은 다른 그 어떤 사건들보다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다.
‘반역사건’ 밀고 뒤에 숨겨진 진실
조선후기 영조 22년에 반포된 속대전(續大典)에서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무고한 자는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참형(斬刑)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고 행위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고발한 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게 하는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하는 것과 달리, 반역에 대한 무고죄는 곧바로 ‘참형’함으로써 엄벌에 처하겠다는 의미다.
오늘 볼 사건은 영조 27년(1751년)에 일어난 ‘김정구(金鼎九)사건’이다. 김정구는 훈련도감의 포수인데, 3월 12일 영조가 영화당(映花堂)에 있을 때 어전(御前)으로 함부로 난입했다가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을 때 김정구가 ‘반란에 대해 고발하겠다’라고 말하여, 왕의 추국 받게 되었다.
그런데 3월 14일 시작된 추국에서 김정구는 엉뚱한 말을 한다. 자신이 반란을 고했던 것은 거짓이며, 자신의 숙부가 살고 있는 변안 지역의 김득구(金得九)라는 자가 침학하고 일련의 비리를 저지르는 일을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어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반역사건이 아닌, 지방의 부정부패 사건을 고발한 것이었다.
“죽을 죄가 된다는 것을 제가 모르지는 않았으나 친문(親問)의 계제로 삼고 싶어서 이러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포도청에서 진술했던 것은 대체로 이러한 지경까지 오기 위한 계책이었고 애초에 살고자 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한 몸 비록 죽더라도 대체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3월 14일 김정구 1차 진술
즉, 김정구는 거짓으로 고한 행위로 인해서 자신이 죽을 수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조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정구의 진술에 의하면 문제는 변안지역 사포서(司圃署: 왕실의 채소와 밭을 관리하는 관청) 도장(導掌: 조선 후기, 조세 사무를 위임받은 민간인) 김득구의 과도한 징세에 있었다.
“김득구가 본 고을의 수령과 친했기 때문에 해마다 세금을 거둘 때 2, 3결씩을 더 거두어 5백여 냥을 만들었고 수령에게 돈을 보내 주었으며, 그가 도장 노릇을 한 지 30여 년이 되었는데 여태껏 수령을 지냈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서 돈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짓을 하였으므로 그 당시에 사람들은 김득구가 돈을 빼앗아 가는 점에 대해 하늘에게 원망하였으나 어사, 감사도 내려오지 않아서 그자의 짓을 모두 적발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3월 14일 김정구 1차 진술
지방 탐관오리까지 연루된 사건
김정구는 중간관리자인 김득구의 침탈 행위가 이미 30여 년간 지속된 것이지만, 변안지역의 수령들이 오히려 김득구에게 뒷돈을 받아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수령을 감찰해야 할 어사나 감사도 내려오지 않아서, 변안지역 사람 모두가 원망하고 있지만, 문제가 해결될 여지가 없다고 했다.
김득구의 이러한 수탈행위는 이미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감내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으며, 변안지역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구구절절 진술했다.
“그러던 중에 백성 이성채(李星彩)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제게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우러러 아뢸 수 있겠는가’ 하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격고(擊鼓) 하면 임금님께서 들으실 수 있을 것이다…….’ 하였고 이성채가 격고를 하였으나 그 후 저의 아버지와 함께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3월 14일 김정구 1차 진술
먼저, 이성채라는 자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성채가 김득구의 수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왕에게 직접 이와 같은 부조리를 알리는 것이었다. 격고(擊鼓) 즉, 왕이 행차할 때 북을 두드려서 왕에게 직접 변안지역의 문제를 알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격고를 시도하다가 이성채는 오히려 더 큰 곤혹을 치르게 된다.
“그러자 김득구는 말을 타고 즉시 수안에 가서 수령과 함께 문서를 만들어 낼 계략을 꾸였고, 문산(文山) 만호(萬戶)는 수안 군수와 함께 상의하여 문서를 고쳐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만약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문득 잡아다가 무섭게 다스리고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저의 숙부도 이성채의 숙부, 서울에 왕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모두 붙잡혀 엄하게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3월 14일 김정구 1차 진술
이성채가 격고한 이후 김득구는 수령을 비롯한 군수, 만호, 유향소의 세력가 등 주위의 권력자들과 힘을 모아서 이성채를 몰아낼 계책을 세우거나, 문서를 조작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혹여나 서울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릴까 두려워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제지하여, 변안지역의 문제가 서울에 알려지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정구의 숙부도 억울하게 매질을 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반역사건 ‘무고’ 아닌 지방행정 비리 고발로
추국장에 서게 된 김정구는 3월 14일에 한 차례 심문과 한 차례 형문을 받은 뒤 곧바로 판결을 받았다. 3월 14일 영조는 김정구에게 “다른 사람을 무고한 의도가 그 자를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국청에서 심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이므로, 사형이 아니라 도배(島配: 섬으로 귀양을 보냄)하라“라고 판결하였다. 그리고 사건의 근원이 된 김득구를 다음과 같이 벌하라고 명하였다.
“사건의 근본을 캐 보면 바로 하잘것없는 김득구 무리로, 지방에서 해로운 폐단을 끼치면서 김정구로 하여금 이러한 괴이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으니, 임금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 엄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형조로 하여금 무기한으로 유배를 보내도록 하라.”
결국, 변안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킨 김득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속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거짓으로 변란을 고한 경우, 그 무고자는 부대시 참형(추분 때를 기다리지 않고 행하는 참형)에 해당하지만, 이 사건에서 무고자인 김정구는 사형이 아니라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김정구 사건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첫째, 변안이라고 하는 지방에서 발생한 사회 내의 문제를 해당 사회 내에서 체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30년이나 지속된 중간관리의 수탈행위를 수령이나 그 외의 국가기관에서 제대로 감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해당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성채나 김정구는 모두 중앙에 이러한 사태를 알리고자 계속해서 노력할 뿐이었고, 김득구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문서를 조작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막는 등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당시 중앙의 국가권력이 지방으로 효과적으로 침투하여 지방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다루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둘째, 김정구 사건을 보면 ‘무고’ 행위가 갖는 의미를 다르게 볼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고’는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에 의해 고소나 고발제도를 악용하여 타인에게 고의적인 해를 끼치고자 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본인이 죽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무고를 행하는 김정구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무고가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울러, 이 사건에서 김득구가 결국 벌을 받게 되었기에, 김정구는 무고를 통해서 자신이 의도하였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무고모역(반역을 꾀했다는 무고) 사건은 무고 말고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었던 전통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신뢰받았던 국가권력
셋째, 김정구처럼 누군가를 반역행위로 무고를 해서라도 ‘왕 앞에 서고자’하였던 것을 고려해 보면, 당시 지방의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구제를 위해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에는 중앙의 국가권력이었다는 점이다. 김득구가 문서를 조작하고 서울로 가려는 자들을 매질해서라도 이들을 막으려 했다는 점 역시, 국가권력에 대한 신뢰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일단 왕 앞에서 발언권을 얻기만 한다면, 국가가 나서서 지방사회에서 발생하는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고 문제가 되는 김득구를 처벌해 줄 것이라고 모두 믿고 있었다. 국가권력에 대한 신뢰가 그때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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