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왕을 모욕하다니, ‘범상부도’ 죄로 다스려라
[죄인 심문기록으로 본 조선후기④] 영조 즉위 첫해에 ‘이의연의 상소문’ 자신의 즉위과정을 정당화시켜준 글 반대파는 ‘이의연 단죄’를 요구하는데 왕은 이를 수용하며 내세운 ‘公心’
범상부도 죄는 무엇인가
첫 글에 이어 ②편과 3편에서 왕의 친족사건과 관련하여 추국을 열거나 혹은 왕의 친족이 추국의 대상이 된 사건을 살펴보았다. ④편과 ⑤편에서는 왕과 신하의 관계에 주목해보자.
오늘 살펴볼 사건은 범상부도(犯上不道) 죄로 죽게 된, 이의연(李義淵, 1692∼1724)에 관한 것이다.
범상부도, 글이나 발언 상의 특정 문구가 왕을 모욕하였다는, 즉 왕의 존엄을 해치는(犯上), 또는 도리에 어긋난(不道) 행위라는 이유로 형벌을 받아야 했던 죄목이다. 조선에서는 왕에 대한 불경한 언행에 대해서 조선 초기부터 제재해 왔는데, 조선초기에는 주로 난언(亂言) 죄를 원용하여 형벌을 내렸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범상부도’라는 별도의 죄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숙종 시대 이후의 추국 죄인 중 상당수는 ‘무력 봉기’나 ‘반란 모의’가 아니라 범상부도라는 이유로 추국을 받았다.
왕이 단순히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가 있을 경우, 신하가 쓴 글이나 혹은 그의 언행을 이유로 이들을 가혹하게 처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범상부도의 죄목은 왕권의 자의적이고 전제적인 행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나 인권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범상부도 죄는 더욱 문제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범상부도 죄목으로 많은 신하들이 추국장에서 죽어 나갔다는 사실을 들어서, 이것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지적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진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영조 즉위년에 발생한 이의연 사건을 둘러싼 정치과정은 이런 식으로만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일파만파, 이의연의 상소문
조선의 21대왕 영조는 1724년 8월 30일에 즉위했다. 그런데 두 달 후 10월 30일, 늦가을 날씨인데도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천재지변의 원인을 통치자의 부덕함으로 여겼던 조선에서는, 이러한 일이 있으면 각계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영조도 곧 각계에 의견을 구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11월 6일, 아무런 벼슬도 없던 33세 유생 이의연이 상소문을 올렸다.
“하늘은 비록 저 높은 데 있지만 낮은 데까지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하늘이 위엄을 크게 떨쳐 전하께서 ‘뒤돌아보게’ 하려 하시니, 하늘이 우리 전하를 돌보고 도와주시는 것이 또한 깊다고 하겠습니다.”
이의연은 이 천재지변으로 영조가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의연은 임금인 영조가 즉위하기 전, 자신의 지지세력(노론)을 탄압했던 적폐세력(소론)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점을 하늘이 문제 삼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무엇보다 영조의 지지세력을 역적으로 몰아서 비판했던 김일경의 글에 영조를 모함하는 문구가 있다고 했다. 이른바 김일경이 ‘범상부도의 죄’를 저질렀다는 고발이다.
여기서 잠깐 영조의 즉위 과정을 살펴보자. 조선의 19대 왕 숙종에게는 여섯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넷째 부인 희빈 장씨에게서 20대 왕 경종이, 다섯 번째 부인 숙빈 최씨에게서 21번째 왕 영조가 나왔다. 숙종 말년에 이 두 아들을 두고 신하들은 크게 대립하였다.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으로 양분되어, 노론 세력에 의해 경종의 친모인 희빈 장씨가 죽음에 이르렀다고도 한다(1701년, 무고(巫蠱)의 옥).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즉위하였지만, 경종 1년에 노론은 연잉군(이후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했고, 심지어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호룡이라는 자가 노론 세력이 반역을 꾸미고 있다며 고발하고 나서면서, 노론 세력이 대대적으로 처형당하게 된다. 이때, 소론에 의한 노론 탄압사건을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신임사화 이후로 소론이 정국을 주도했지만,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갑자기 병으로 승하하고 만다. 그렇게 다음 왕인 영조는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조가 경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경종 독살설’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김일경은 이를 굳게 믿는 신하였다. 무수리인 숙빈 최씨의 소생, 장자가 아닌 선왕의 이복 동생으로 선왕의 왕위를 넘보는 듯한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선왕의 죽음 등이 맞물려, 영조는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의 정당성 문제로 시달렸다.
상소문이 되려 자신의 목을 겨누고
이런 상황에서 이의연이 고발한 것은 단순히 김일경이라는 개인의 범상부도함이 아니었다. 이는 신임사화때 노론을 반역자로 몰아가던 소론 세력에 대한 청산을 주장한 것이었다. 사실 영조나 노론의 입장에서 경종 때 받았던 탄압을 생각하면, 이번에야말로 이들을 청산할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또한, 이의연은 영조의 즉위 과정이 ‘숙종의 유언을 받든 것’일 뿐만 아니라, 과거 ‘요나라와 순나라 때도 있었던 일’이라며 칭송했다. 불안했던 영조의 즉위 과정을 그야말로 이의연이 정당화하고 있었다.
조정은 이의연의 상소문으로 난리가 났다. 한편에서는 이의연이 김일경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선대왕 경종을 모욕하고 있으므로 이의연도 추국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의연이 추국받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의연의 상소문이 왕의 구언(求言) 명령에 응답한 응지(應旨) 상소였음을 강조했다. 영조가 의견 수렴하는 과정에서 말이 다소 지나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었기에 상소문의 내용을 빌미로 이의연을 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조가 추국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영조가 더 이상 이의연의 상소문을 논하지 말라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이의연의 상소문이 윤리질서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맞섰다. 이의연이 김일경을 추국해야 한다고 했던 동일한 논리가, 이의연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영조는 추국을 명령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 우의정에게 물어보고 도배(島配: 섬으로 귀양보내는 것)했는데, 지금 영의정에게 물으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주(人主: 임금)가 가볍게 죽일 수는 없으므로 반드시 대신(大臣)에게 물어본 뒤에 국청(역적 등의 중죄인을 신문하기 위하여 설치하던 임시 관아)을 설치한 것이니, 대신에게 공심(公心)이 있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훗날 만약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대신들은 이 뜻을 체득하였다가 나를 돕는 것이 좋겠다.”
이의연이 추국에 서게 되지만, 그것은 영조 본인의 적극적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조는 자신 마음대로 죄인을 죽이고 살릴 수 없으며 공심을 갖고 있는 신하들을 믿기에, 이의연을 추국에 세우게 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임금과 신하가 공유한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이의연은 11월 26일부터 추국을 받게 된다. 그리고 매질 30대를 동반한 두 차례의 심문 끝에 그만 죽고 만다. 유배나 참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추국 과정에서이의연이 추국을 받아야 하는지, 받는다면 어떤 구절을 중심으로 심문할지, 추국은 어떤 형태로 진행해야 할지, 그리고 이의연이 죽고나서 그 죄를 과연 다른 가족에게까지 연좌할지 여부를 논의하는 부분에서 영조의 머뭇거림이 여실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만일 영조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이의연을 추국에 세운 것이라면, ‘범상부도’라는 죄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선왕을 모욕한 것은 곧 왕실에 대한 모욕이라는 주장, 이 선례를 남겨두면 다른 윤리질서, 결국 국가까지 무너질지 모른다는 반대파 의 주장을 결국엔 저버리지 못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의연 사건에서 범상부도 죄목은 왕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 도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의연을 벌주지 않고자 하는, 왕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막았다. 적어도 당시에는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는 공적인 가치가 공유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일방이 타방을 완전히 자의적이거나 폭압적으로 누를 수 있는 형태가 아니다.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관계로 곧바로 환원되지 않는 공동의 정치이익, 나라가 나라다울 수 있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 가장 자의적으로 보이는 죄목의 적용조차 자의적으로 할 수 없게 만든 일정한 가치가 공유되고 있던 것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나은지 뒤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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